제 63장 무당검왕(武當劍王). -03
철혈마황을 잡았으나 반호진은 지금의 경지에 절대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젊어진 만큼 남은 천하사패의 주인들도 젊어져서였다.
물론 철혈마황처럼 전생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반대로 육체가 젊기에 어떤 의미로는 더 상대하기 까다로울 수도 있었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보다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우선은 지금의 비무에 집중해야지.’
타앗.
빠르게 상념을 털어 낸 반호진이 땅을 박찼다.
애초에 빈틈이나 허점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운상씩이나 되는 검객에게 빈틈이 있을 리 만무해서였다.
만약 있다면 그건 일부러 보이는 것이었다.
스르륵!
그렇기에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한데 미끄러지듯이 파고드는 검격에 따라 대기가 출렁였다.
따로 기도를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들이 충돌한 것이었다.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기운들을 느끼며 반호진은 오랜만에 달마삼검을 펼쳤다.
따아아앙!
청아한 금속음과 함께 운상의 검이 반호진의 검격을 비틀었다.
무당파 특유의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정확히 궤적만 비튼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운상의 검이 끊임없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당파의 상징이자 정화라 할 수 있는 태극검이었다.
우우우웅.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게 태극권과 태극검이었다.
하지만 운상이 펼치는 태극검은 세상에 알려진 태극검과는 달랐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슷하나 그 안에 담긴 무리는 감히 비교를 불허했다.
느리게 그려지는 원에는 삼라만상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달마삼검도 격이 떨어지진 않아.’
지금 운상이 펼치는 태극검은 태극검이되 태극검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태극검이면서 태극혜검이었다.
무당파의 정수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펼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기죽지 않았다.
웅웅웅웅!
태극혜검이 천하제일검공을 노리는 무공이라 하나 그건 반호진이 익힌 달마삼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서 그렇지 달마삼검도 천하제일을 충분히 노릴 만한 검법이었다.
그걸 반호진은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 줄 생각이었다.
쌔애액!
웬만해서는 펼치지 않았던 달마삼검의 첫 번째 초식인 출검(出劍)이 펼쳐지며 운상에게 쇄도했다.
끊임없이 원을 그리는 운상의 미세한 빈틈을 노리고서 말이다.
터어어엉!
절묘하게 파고드는 반호진의 검을 운상은 여전히 느릿한 움직임으로 막아 냈다.
단순히 검속만 따지자면 반호진이 훨씬 더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운상은 방어만 하지는 않았다.
반호진의 검을 튕겨 낸 순간 허공에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반호진의 단전을 노렸다.
스슥!
방어하면서 반호진의 검을 튕겨 내 빈틈을 만든 후 찌른 것이었다.
하지만 반호진도 만만치 않았다.
공수가 절묘하게 전환되는 순간이었으나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더욱이 달마삼검을 처음 겪는 운상과 달리 반호진은 전생에서 태극혜검을 본 적이 있었다.
‘봤다고 해서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느리지만 그 어떤 검보다도 빨라질 수 있는 게 무당파의 검이었다.
더구나 무당파의 장문인이라면 완급조절이 입신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운상의 검을 튕겨 냈다.
스르륵!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원인 것처럼 운상의 공격은 한 번 막아 냈다고 끝이 아니었다.
공수전환이 그 어떤 무공보다 완벽한 태극혜검답게 운상은 계속해서 반호진을 밀어붙였다.
어느 순간 수세에 몰리는 광경에 반호진은 역시나란 생각을 했다.
“흐읍!”
하나 그렇다고 가만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기술은 반호진도 자신이 있었다.
까가가강!
느리지만 정밀하게 쇄도하는 검세를 반호진은 똑같은 방식으로 밀어 냈다.
정확히 검극에는 검극으로, 검신에는 검신으로 운상의 검격을 맞받아쳤던 것이다.
그 모습에 운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첫 합을 나누었을 때도 느꼈었지만 반호진이 얼마나 기본기를 단단히 수련했는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어서였다.
까아앙!
한편 운상의 검세를 단숨에 밀어낸 반호진은 강검을 펼쳤다.
아무래도 육체적인 능력에서는 자신이 월등하기에 그 부분을 노린 것이었다.
물론 부족한 근력을 심후한 공력으로 보충하겠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반호진도 꾸준히 내공수련을 해서 이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고 말이다.
따다다당!
힘이 제대로 실린 강격이 운상의 전신에 쏟아졌다.
이번에는 반호진이 운상을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흔들릴지언정 운상은 밀리지 않았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반호진의 맹공을 운상은 뛰어난 기교로 흘려냈다.
슈우욱!
그뿐만 아니라 간간이 반격까지 했다.
반호진의 파상공세를 흘려내고 튕겨 내면서도 빈틈이 보이면 여지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균형이 맞춰져 갔다.
절정에 달한 유능제강(柔能制剛)으로 반호진의 강격들을 흐트러뜨리며 서서히 수세에서 벗어났다.
‘역시 연륜은 무시할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사실을 반호진도 알아차렸다.
아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육안으로 보이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조급함을 느끼는 대신에 감탄했다.
쉬이익!
종이 한 장 차이로 볼을 스쳐 지나가는 검을 느끼며 반호진은 씨익 웃었다.
서늘한 검신도 검신이지만 검이 스쳐 지나가면서 일어나는 검풍도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게 반호진은 좋았다.
과거로 돌아온 뒤 처음으로 기술적으로 뒤떨어지지 않는 상대를 만나서였다.
따아앙! 따앙!
수십 년 동안 쌓아 온 운상의 검은 달인의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 수 싸움에도 능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축적한 경험 역시 적지 않다는 듯이 운상은 그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게 반호진은 너무 재미있었다.
‘장문인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한데 그건 운상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없이 공방을 주고받고 있음에도 반호진의 눈에는 보였다.
처음과 달리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운상의 모습이 말이다.
쌔애액!
물론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운상의 검초는 매서웠다.
아주 미세한 틈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찔러 넣을 정도로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운상은 이화접목과 사량발천근에도 능했다.
반호진이 힘으로 밀어붙이자 교묘하게 그걸 이용했다.
은근히 그가 체력을 낭비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일부러 수세에 몰리는 척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어림없지.’
육체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으나 정신적인 나이는 서른한 살이었다.
그리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가 반호진이었다.
아무리 운상이 교묘하게 함정을 팠어도 반호진은 넘어가지 않았다.
스스슥!
대신 방식을 바꿨다.
더 이상 초식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변초와 허초가 가득하기는 했어도 반호진의 검초에는 기본적으로 정형화된 틀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한순간에 사라지자 운상이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반호진이 무엇을 노리는지 짐작 가는 게 있어서였다.
쌔애애액!
기세가 일변함과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검로들이 펼쳐졌다.
불규칙적인 검식들이 뿌려지며 운상을 노렸다.
그러자 운상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까가가강! 까앙!
전신요혈을 노리고서 파고드는 예리한 검격에 운상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역시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무초식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한창때의 반호진과 달리 그는 육체적 전성기가 예전에 끝났다는 점이었다.
스윽! 스극!
노쇠화한 근력과 체력은 공력으로 어찌어찌 대체할 수 있었지만 감각은 달랐다.
반사신경과 판단력은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나름 꾸준한 수련과 대련으로 실전감각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반호진 정도의 고수와의 싸움에서 감각이 둔하다는 건 너무나 큰 단점이었다.
심지어 반호진은 감각이 예민할 대로 예민한 시기였기에 상대적으로 더더욱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 사실을 증명하듯 연거푸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검세에 운상의 청의무복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직접적으로 몸에 닿지는 않았으나 반호진 정도의 검객이 뿌리는 검풍은 검기와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육신쯤은 손쉽게 갈라 버릴 수 있기에 운상은 침음을 흘리며 집중력을 가일층 끌어 올렸다.
하지만 늙은 육신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덜덜덜.
반응하는 속도는 물론이거니와 생각의 속도도 느려졌는데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오른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격렬한 비무로 인해 쌓이고 쌓인 충격이 결국 몸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똑같이 검을 수백 합 나누었음에도 반호진의 몸에는 변화가 없었다.
운상보다 훨씬 젊다 보니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점 역시 높은 것이었다.
스윽.
그걸 확인한 순간 운상은 미련 없이 검을 놓았다.
이대로 계속 비무를 이어 가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방식을 바꿔야 했다.
이왕이면 그에게 유리하게 말이다.
쌔애애액!
운상은 검을 놓았으나 신기하게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반호진을 향해 한줄기 빛살처럼 날아갔다.
“흡!”
던진 것도 아니고 단순히 놓은 것뿐인데도 전광석화처럼 날아오는 운상의 검에 반호진이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워낙에 부지불식간에 쇄도해서였다.
하지만 놀란 표정과 달리 반호진의 반응은 기민했다.
괜히 한창때의 육체가 아니라는 듯이 벼락처럼 파고드는 운상의 검을 정확하게 튕겨 냈다.
후우웅!
그러나 튕겨 나간 검은 이내 허공에서 궤적을 틀었다.
재차 반호진에게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어검술이 아니라 이기어검이었다.
동시에 반호진은 운상의 생각을 눈치챘다.
‘직접적인 충돌은 더 이상 힘들다는 말이렷다.’
안 그래도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운상의 반응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는 걸 느꼈던 반호진이었다.
그러니 운상으로서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을 터였다.
쌔애애액!
맹렬한 기세로 수직 낙하하는 운상의 검을 보며 반호진은 싱긋 웃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이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도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를 반호진은 실력으로 보여 주었다.
따아앙!
한줄기 은광과 함께 반호진의 정수리를 노리고서 떨어져 내리던 운상의 검이 되레 튕겨졌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은빛 섬광이 운상에게 쇄도했다.
운상의 검을 튕겨 낸 반호진의 검이 운상에게 날아갔던 것이다.
쉬이이익!
그와 똑같이 이기어검을 펼치는 반호진의 모습에 운상이 황급히 제운종(梯雲縱)을 극성으로 펼쳤다.
육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기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운상은 튕겨 나갔던 검을 재차 조종했다.
자리를 이동했음에도 추격해 오는 반호진의 검을 막기 위해서였다.
까가가강!
이윽고 허공에서 난타전이 벌어졌다.
몸을 직접 움직여야 하는 좀 전과 달리 지금은 검을 조종만 하면 되었기에 운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검을 조종하며 반호진을 살펴봤다.
정확하게는 손과 눈동자를 말이다.
‘역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모습에서 운상은 알 수 있었다.
반호진이 그와 똑같이 심어검의 경지에 올라 있음을 말이다.
‘그렇다면…….’
운상의 눈빛이 빛났다.
경지가 비슷하다면 남은 건 공력과 경험이었다.
직접 검을 잡고 휘두르는 것과 이기어검을 펼치는 건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반호진은 이기어검으로 대결을 펼쳐 본 적이 없을 것이기에 운상은 자신이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
하지만 그 생각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점점 더 빨라지는 속도도 속도지만 반호진의 검이 그리는 기상천외한 궤적에 운상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떠올랐다.
따다다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