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장. 진실을 외면한 대가. -03
거의 농락하는 수준으로 방만춘을 몰아붙이던 반호진의 앞에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바로 담현이었다.
방장실에 있던 그가 반호진과 방만춘이 싸우는 걸 느끼고 온 것이었다.
“으으으…….”
“장문인은 아직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요.”
“너도 참.”
부들거리는 손으로 아직 검을 움켜쥐고 있는 방만춘의 모습에 담현이 피식 웃었다.
사람으로서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 명의 검객으로서는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방만춘이었다.
이번 일도 과한 질투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고.
하나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사부님께서 원하시니 그만하겠습니다.”
“뒤는 나에게 맡기거라.”
“알겠습니다.”
담현이 왜 끼어들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반호진은 순순히 검을 검집에 넣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실력 차이를 보여 주기도 했고.
아마 앞으로는 자신의 앞에서 무공 가지고 따지지는 못할 것이었다.
모른다면 그때 또다시 알려 주면 되었다.
“아, 아직…….”
“장문인은 저와 따로 얘기 좀 하시지요.”
승부가 났음에도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는 방만춘을 담현은 가볍게 제압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어깨에 짊어졌다.
여기서 대화하기는 좀 그렇기에 자리를 옮기려는 것이었다.
한데 이동하기 전 담현은 먼 곳을 잠시 응시했다.
“자자, 우리는 다시 시작하자.”
담현이 어딜 보는지 알았기에 반호진은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의 말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요? 좀 쉬셔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지쳐 보여?”
대표로 서조운이 물었으나 반호진은 씨익 웃었다.
어째서 묻는지 알지만 그는 정말 괜찮았다.
공력을 많이 소모하기는 했으나 애초에 무한 대련 훈련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기에 상관없었다.
체력도 아직은 여유가 있었고.
“그래도 막 비무를 끝냈잖아요.”
“괜찮아. 바로 시작하죠.”
대화하는 사이 담현은 방만춘을 데리고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없어졌던 것이다.
그걸 뒤늦게 깨달은 후기지수들이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 모여!”
엉거주춤하게 눈치를 살피는 후기지수들과는 달리 금호연의 호위대주는 곧바로 호위대원들을 집결시켰다.
군말 없이 즉각적으로 반호진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 모습에 후기지수들이 하나둘 반호진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
“아이고, 죽겠다.”
“힘들어 보이기는 하더라.”
모용척의 처소를 방문한 모용희수가 살짝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가 보기에도 오늘 있었던 무한 대련 훈련은 엄청 힘들어 보였다.
자신이었다면 아예 시작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말이다.
“힘들긴 한데, 또 하다 보면 개운하고 좋아. 진짜 잡념이 사라지거든. 오직 비무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래 보이더라. 난 단체로 뭐에 홀린 줄 알았어.”
“일시적인 무아지경에 빠진다고나 할까. 신기한 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상대의 다음 초식이 무엇일지도 보인다는 거야. 엇비슷한 경지까지는. 근데 형님한테는 전혀 안 보여. 그냥 본능적으로 움직여야 해. 생각할 틈이 없어. 생각하는 순간 이미 형님의 검신이 옆구리를 때리고 있거든.”
“살벌하긴 했어.”
모용희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공동파의 장문인과 대결을 펼쳤음에도 반호진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심지어 방만춘을 가지고 놀았었다.
적어도 모용희수가 보기에는 그랬다.
“진짜 대단하시지. 오히려 공동파 장문인이 형님의 실력을 제대로 이끌어 내지 못했을 정도니까. 근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지? 진짜 우연으로 형님께서 철혈마황을 잡았다고 생각한 건가? 그래도 너무 생각 없이 찾아왔던데.”
“이길 자신이 있었나 보지. 원래 꽉 막힌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게 무조건 맞다고 여기잖아. 실패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한동안 대외 활동은 못 할 거야. 굴욕도 그런 굴욕이 없으니.”
“아마 곧장 떠나지 않을까? 방장의 표정을 보니 좋게 넘어갈 것 같지는 않던데.”
모용희수는 갑자기 나타나 방만춘을 짊어지고 떠난 담현을 떠올렸다.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표정만 봐도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지 상상이 갔다.
“나였어도 열 받지. 내 제자를 괴롭힐 목적으로 찾아간 거 아냐. 물론 실력은 안 되지만 중요한 건 그 의도지. 의도가 전혀 순수하지가 않잖아. 셋이 같이 보자고 할 수 있음에도 지 멋대로 무작정 찾아간 거니까.”
“그렇지.”
“근데 털린 건 방 장문인이었지.”
“자업자득이지 뭐.”
모용희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중에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모용척의 말대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찾아왔기에 된통 당해도 쌌다.
“근데 무슨 일이야? 이 늦은 시간까지 날 기다리고.”
“어머? 어떻게 알았어? 내가 목적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걸.”
“……날 바보로 아는 거야?”
모용척이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대놓고 무시하자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평소하고는 너무 달라서. 참고로 이건 칭찬.”
“가. 난 할 말 없다.”
모용희수를 향해 모용척이 손을 휘휘 저었다.
벌레를 쫓듯이 크게 팔을 흔들었으나 모용희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새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빠는 할 말 없어도 나는 있어. 나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어?”
“앞뒤 다 자르고 말하지 말랬지? 말할 거면 제대로 말해.”
여동생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모용척이 조금은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슬쩍 모용희수의 표정도 살피면서 말이다.
“반 공자님 말이야.”
“아하.”
“아하는 무슨 아하야. 오빠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그랬었지. 근데 난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어. 당장 식사자리만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널 데려가잖아. 내 여동생이라고.”
“중요한 건 결과지.”
모용희수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탕탕 두드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오빠가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모용희수가 원하는 건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나라고 뭐 도와주기 싫은 줄 알아? 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나한테 독촉하고 있어.”
“그 이유를 알잖아?”
“알지. 너무나 잘 알지. 형님 옆에서 바로 보고 있는데.”
“이대로 암사자들에게 반 공자님을 빼앗길 거야?”
“그건 싫지만, 막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결국 중요한 건 형님의 결정이니까.”
모용희수만큼이나 모용척도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호형호제하는 사이이지만 그래도 혈연관계에 비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모용희수와 맺어진다면 반호진은 매부(妹夫)가 되었기에 모용척으로서도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그나 여동생이 바란다고 반호진과 혼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남궁세가나 사천당가, 하북팽가가 냉큼 낚아채 갈 거야.”
“그것도 쉽지는 않을걸. 너도 알잖아. 우리 형님 성격.”
“알지. 근데 여우가 괜히 여우겠어? 특히나 네 명은 여우를 뛰어넘은 암사자들이야.”
“암사자들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기는 하네.”
“으이그! 지금 나만 답답하지!”
속 편한 말만 내뱉는 모용척의 모습에 모용희수가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러나 가슴 깊이 막힌 무언가는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좀 차분해져 봐. 조급해한다고 될 일이었으면 진즉에 됐을 거야. 우리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자고.”
“냉정하게?”
“그래. 너도 알고 있지? 결정권은 형님께 있다는 거. 그렇다면 머리를 잘 써야 해.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형님은 여자에 관심은 분명히 있어. 혼자 살 생각이 없단 말이지. 그런데도 여인에게 거리를 두는 건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야. 자세한 건 모르지만 내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래. 조운이도 같은 생각이고.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거. 형님은 여자의 외모를 크게 따지지 않아. 예로 널 들 수 있지.”
“내가 한 미모 하기는 해.”
“그렇지만 견줄 만한 미녀가 없는 건 아니지. 당장 이곳에만 하더라도 독봉과 매봉이 있지. 다행스럽게도 매봉은 따로 연모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고. 자, 그러면 독봉만 남았을까? 아니지. 세상은 넓고 고수와 미인은 많아. 너랑 독봉에 비견될 만한 미녀가 한 명 있어. 심지어 미인계에 능하기까지 하지.”
모용척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한껏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무심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생각을 많이 했다는 듯이 말이다.
“하오문의 소문주?”
“응? 알고 있네?”
“반 공자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걸? 소문주를 직접 본 사람은 없지만. 근데 진짜 그렇게 예뻐?”
모용희수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었다.
그러나 두 눈은 모용척의 표정 변화를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매섭게 빛났다.
“엄청. 너도 미녀이지만 결이 좀 달라. 당 소저하고도 다르고. 좀 더 요염하다고 해야 하나. 너나 당 소저보다 남자에 대해 훨씬 더 잘 알 것 같은 느낌이야. 남자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을 것만 같다고나 할까?”
“방중술도 잘 알 테니 잠자리 기술도 뛰어나겠지.”
“얘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모용척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단둘만 있다고 하나 이곳은 소림사였다.
더욱이 같은 전각 안에는 다른 이들도 있었기에 모용척은 마치 자신이 부친이라도 된 것처럼 엄한 표정으로 눈썹을 잔뜩 모았다.
“이 정도 가지고 뭘? 여자끼리는 더한 말도 하는데.”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에서는 조심해야지. 말이 사람 인상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데!”
“알았으니까 하던 말이나 이어서 말해 봐.”
“네가 예쁜 건 알지만 미모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너만큼 예쁜 여자가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다른 무기를 찾아야지. 남들과는 차별화된 무기 말이야.”
“차별화된 나만의 무기라.”
모용척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모용희수는 턱을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그녀 역시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입만 벌리고 복숭아가 떨어지길 기다리면 복숭아가 떨어지나? 나무를 흔들든, 장대로 따든 해야 할 거 아냐? 더구나 복숭아나무 아래 너 혼자만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오빠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무기를 가져야 할 거 같아?”
“으음.”
여기까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모용척이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나름 고민한다는 듯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서 말이다.
하지만 딱히 좋은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지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네?”
“나도 수련하느라 바빴으니까.”
“그건 인정. 그래도 고민은 좀 해 줘. 나 혼자서는 힘들어.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해. 오빠도 매부가 반 공자님이면 좋잖아?”
“당연하지. 널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상한 놈한테 가는 것보다는 형님과 맺어지는 게 백배 나으니까. 너도 봐서 알겠지만 형님은 자기 사람은 확실하게 챙겨. 우리들만 해도 이 정도인데 부인한테는 얼마나 잘하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모용희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반호진을 선택한 건 단순히 무공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무림세가 출신이기에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무공실력이었다.
그러나 성격적인 부분도 반호진을 선택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나는 일단 은근슬쩍 취향에 대해서 물어볼게. 남자라면 보통 이상형이 있으니까. 그러니 너는 당 소저나 팽 소저, 남궁 소저들을 제칠 수 있는 걸 찾아봐.”
“알았어.”
모용희수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나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일단 무공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