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장. 진실을 외면한 대가. -02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굳이 대화할 필요성은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검을 뽑았다.
그러자 모여 있던 일행들이 물러났다.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준 것이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본색이라기보다는. 이걸 원하는 것 같아서.”
방만춘의 얼굴이 순간 달아올랐다.
이렇게 대뜸 반말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반호진은 태연했다.
“흐음. 망나니를 원한 것 아니었나? 난 원하는 대로 해 준 것뿐인데?”
노기를 감추지 못하는 방만춘을 향해 반호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원하는 대로 해 주었는데 왜 흥분하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이다.
그 말에 지켜보던 후기지수들도 놀랐다.
설마하니 반호진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말을 놓을 줄은 몰라서였다.
“감히!”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토록 원하는 명분을 내가 만들어 주었는데.”
짐짓 대노한 얼굴로 땅을 박차는 방만춘을 보며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제삼자가 보더라도 얄미울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방만춘이 공동파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신공인 육합구소신공(六合九韶神功)을 극성으로 펼쳤다.
후우우웅!
구대문파의 일좌인 공동파의 장문인답게 방만춘의 전신에서 거대한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고수만의 위압감이 폭발하듯 솟구쳤던 것이다.
그걸 보여 주듯 방만춘의 무복이 거칠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걸 보고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
쌔애액!
육합구소신공의 진기를 머금은 복마검법(伏魔劍法)이 벼락같이 펼쳐지며 쇄도했음에도 말이다.
방만춘의 검극이 정확하게 명치를 노리고서 파고드는데도 반호진은 검을 늘어뜨린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역시!’
그 모습에 방만춘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맺혔다.
역시나 그가 예상한 대로였다.
검이 쇄도하고 있음에도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방만춘은 확신했다.
반호진이 운 좋게 철혈마황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체력적인 문제든, 아니면 무공의 상성 때문이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천운이 닿은 덕분에 철혈마황을 쓰러뜨렸다고 말이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이제 겨우 스물한 살에 초월경의 경지라니. 그건 달마 선사나 장삼봉이 다시 태어나면 모를까 불가능한 일이다.’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를 받고 온갖 영약을 다 먹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도 이십 대 때는 고작해야 절정의 경지가 한계였다.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해도 절정 말엽, 혹은 최절정이 한계인데 반호진이 초월경에 올랐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수십 년 동안 무공에 매진한 그조차도 초월경의 벽을 넘지 못한 상태인데 반호진이 올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만춘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단지 현 무림의 정세가 불안정하기에, 영웅이 필요하기에 개왕이나 염왕, 도왕이 반호진을 띄워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까아아앙!
방만춘은 그 사실을 지금 이 순간 만천하에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말이다.
한데 그의 귓가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검을 쥔 손목에서 저릿한 고통이 전해졌다.
“크윽?!”
예상치 못한 강렬한 반탄력에 방만춘의 입에서 비틀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일검에 반응하지 못한 듯해 보였던 반호진은 정확하게 검극에 똑같이 검극을 맞대어 튕겨 내고는 그대로 재차 휘둘렀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심드렁한 얼굴로 느리게 검을 내리그었다.
츠츠츠츠!
별다를 것 없는 사선 베기였으나 반호진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해 보이는 초식과 달리 방만춘을 찍어 누르는 검압은 무지막지한 수준이었다.
더불어 방만춘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반호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가 무엇인지 말이다.
“이이익!”
그가 그토록 닿고 싶었으나, 평생의 꿈이자 목표였으나 결국 닿지 못한 경지.
바로 초월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만이 뿜어낼 수 있는 위압감에 방만춘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초월경의 벽을 넘지 못한 그가 발산하는 기도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 짓밟히기만 했다.
푸스스스…….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방만춘에게는 선명하게 느껴졌다.
반호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그의 기도를 순식간에 집어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웅웅웅!
하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록 반호진이 진짜 초월경의 고수라고 하나 승부라는 게 꼭 무공의 고하로만 승패가 결정되지는 않았다.
갖가지 변수로 인해 결과가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기에 방만춘은 젖 먹던 힘까지 모조리 끌어올렸다.
기세가 한껏 치솟아 있다는 뜻은 달리 말하면 방심하기 딱 좋은 순간이라는 말과도 같았다.
더욱이 반호진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에 한창 기고만장할 터였다.
방만춘은 바로 그걸 노릴 작정이었다.
‘어쩌면 상성으로 봤을 때 내가 유리할 수도 있다.’
다른 이들이 반호진을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방만춘은 아직도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경지는 반호진보다 낮을지 몰라도 경험과 연륜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겠지만 장기전으로 간다면 상대적으로 반호진보다 막대한 공력을 이용해 충분히 승부를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약점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따다다당!
흔한 검기 하나 서리지 않은 검과 검의 충돌이었으나 그로 인해 일어나는 후폭풍은 엄청났다.
검끼리 부딪칠 때마다 대지가 쭉쭉 갈라졌던 것이다.
거기다 보이지 않는 무형검강들이 살벌하게 휘몰아치자 대부분의 후기지수들이 화들짝 놀라며 더욱더 물러났다.
쩌어억! 쩌적!
반호진의 검격에 따라 지면이 쩍쩍 갈라졌다.
장기전을 노리고서 방만춘이 직접적인 충돌을 회피해서였다.
정말 피할 수 없는 건 흘려 내고 웬만한 공격들을 피해 내자 공터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 모습에 반호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움직임만 봐도 방만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여서였다.
‘근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고 있군.’
자신의 열세를 알면서도 방만춘은 여전히 반호진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 증거가 바로 눈이었다.
반격은커녕 회피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방만춘은 아직도 반호진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반호진은 방만춘의 실전감각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유추 가능했다.
쩌어어엉!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반호진의 검격이 달라졌다.
이제부터 제대로 검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동시에 방만춘이 얼마나 안일한 계획을 짜고 있는지 알려 줄 작정이었다.
진짜 무인들의 대결에서 요행이나 기적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꽈앙! 꽈아앙!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인한 결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반호진의 검세가 맹렬하게 방만춘에게 쇄도했다.
나름대로 방만춘이 검세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
방만춘이 빠져나갈 틈을 반호진이 주지 않아서였다.
“큭!”
광풍처럼 사납게 몰아치는 공세에 방만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무지 피할 공간이 나지 않아서였다.
단순히 경지가 높은 걸 떠나서 반호진의 초식에는 깊이가 있었다.
애송이의 검이라고 폄하할 수준이 아니었다.
스극. 슥!
게다가 문제는 반호진의 검속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그를 농락하듯 반호진은 서서히 검속을 높였는데 이제는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였다.
그로 인해 말끔했던 백의무복은 어느새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머리도 봉두난발로 변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체력이었다.
“헉헉헉!”
한창때의 혈기왕성한 반호진과 달리 방만춘의 육신은 전성기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하물며 체력단련을 극한으로 하는 반호진과 달리 방만춘은 지금처럼 전력을 다해 비무해 본 적이 요 몇 년간 없었다.
자기 딴에는 매일 꾸준히 수련을 한다고 하나 한계까지 몰아붙인 적이 없기에 해가 갈수록 체력은 점점 더 줄어들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지이익!
그래서인지 반호진의 검이 더욱 빠르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반응속도가 느려지고 감각이 둔해지니까 상대적으로 말이다.
우우웅!
그걸 느낀 순간 방만춘은 승부수를 띄웠다.
반호진보다 확실하게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공력으로 승부를 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초월경의 고수라고 해서 꼭 공력이 엄청난 수준인 건 아니기에 방만춘은 한 방 싸움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이대로 시간을 끌다간 패배가 분명했기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차아합!”
결단을 내린 것과 동시에 복마검법의 비전절초가 펼쳐졌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검을 날렸던 것이다.
방만춘이 평생 동안 고련한 무공의 정수가 담긴 검격이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파스스스…….
그러나 초절정과 초월경의 차이는 방만춘이 생각하는 것보다 극명했다.
벽을 넘었느냐, 넘지 못했느냐는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실제로 체감되는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모든 힘을 쏟아부었음에도 방만춘의 검은 반호진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아니, 닿기도 전에 검신을 감싸고 있던 진기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터어엉!
그와 동시에 반호진의 검이 방만춘의 검신을 강타했다.
호쾌하게 후려쳤던 것이다.
“크윽!”
단순한 충돌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검을 통해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방만춘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따앙!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방만춘은 기를 쓰고 입술을 앙다물었으나 이어지는 연타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반호진의 검격은 단단하고 강맹했다.
거기다 얄미울 정도로 완벽하게 몰아붙여서 피하는 것도, 흘려 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큽! 헉! 윽!”
연이어 쇄도하는 검격에 방만춘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어찌어찌 막아 내고는 있으나 누적되는 충격만은 어쩔 수가 없어서였다.
최대한 지면으로 흘려보내고 있으나 그조차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방만춘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검게 변해 갔다.
쩌어엉!
누가 봐도 이미 패색이 짙었으나 방만춘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포기할 수 없었다.
패배를 자인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는 단순히 한 명의 무인이 아니라 공동파의 수장이었기에 지더라도 절대 이렇게 질 수는 없었다.
‘어, 어떻게든……!’
이미 체력은 바닥이었고, 정신력도 한계였으나 그럼에도 방만춘은 버텼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처참할 정도로 밀리고 있었으나 그렇기에 그는 반호진이 방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즉에 끝낼 수 있었는데도 끝내지 않았다는 게 그걸 방증했다.
터어어엉!
“컥!”
이제는 신음을 억누를 수도 없는 상태까지 왔는지 방만춘이 초점 없는 눈빛으로 비틀거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주춤주춤 물러났으나 반호진은 멈추지 않았다.
어중간하게 끝내는 건 그의 성격이 아니어서였다.
“이제 그만하려무나. 이쯤 하면 충분해.”
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