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장. 근성이란. -02
환하게 웃던 금호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품속에서 곱게 접힌 서찰을 꺼냈다.
제법 두툼한 두께였는데 그걸 보며 반호진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가 설명해 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훨씬 빠를 겁니다. 그림이라 두께가 나가는 거지 실제로 내용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서찰을 가운데의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금호연이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적어도 안 좋은 건 아닐 거라 짐작한 반호진이 느릿하게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집어 들었다.
촤라락.
고급스러운 재질이라 그런지 꽤 질긴 감촉과 함께 서찰이 활짝 펼쳐졌다.
그리고 반호진의 동공도 살짝 커졌다.
“이건 혹시?”
“맞습니다. 섬서성에서 철혈성과 마지막 전투를 치를 때 반 대협을 공격했던 산적들의 산채입니다. 그때 제대로 추격하지 못하시지 않았습니까? 살아남은 이들의 산채를 지도에 간략하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완벽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팔 할 정도는 추적했다고 생각합니다. 아, 산채의 위치는 대략적인 위치입니다. 아무리 저희라도 산채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건 어려워서요.”
“이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만.”
반호진은 진심으로 놀랐다.
이런 정보는 구하기도 힘들지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주로 출몰하는 지역을 표시해 두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는 상단도 있고, 표국도 있다 보니 녹림도들과는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드는 데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수고스러운 건 사실이니까요. 중원 전역에 산채가 한두 개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저 역시 산적들이 싹 다 사라지길 바라거든요. 통행료로 나가는 지출만 진짜 상당합니다. 다른 표국들과 상단들도 마찬가지겠지만요.”
금호연이 이를 갈았다.
그 역시 상행을 이끌었던 적이 있는 만큼 직접 빼앗긴 적도 적지 않았다.
산적들이야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라고 지껄이지만 금호연의 입장에서는 도둑놈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작 산적들이 머무는 산은 그들의 재산도, 사유지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조사를 한 건 조금이라도 반 대협께 도움이 되었으면 싶어서입니다.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까지 저를 신경 써 주신 거니까요.”
“알아주시면 그걸로 됐습니다. 하하하.”
금호연이 환하게 웃었다.
다행히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였다.
안 좋게 받아들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리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앞으로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야 해.’
금호연은 속으로 다짐했다.
철혈성과의 전쟁 전에도 반호진의 무명은 대단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나이 때문에, 혹은 질투심 때문에 천하십대고수에 들지 못했지만 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다.
반호진의 실력이 무림십왕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음을 말이다.
오히려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철혈마황과 염왕, 투왕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었으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반호진이 가장 강할 거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은 없을 터였다.
‘품을 수 없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해.’
한때 반호진을 품으려고도 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금호연은 이제 현실을 알았다.
금가장주가 되더라도 반호진을 품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가까워져야 했다.
‘경쟁자도 있으니.’
일신의 무력이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반호진에게 부족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중 대부분을 금호연은 채워 줄 수 있었다.
서로 상부상조가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하오문 역시 그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하오문은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부족할지 모르나 다른 분야에서는 금가장을 압도했다.
거기다 하오문의 소문주인 난희주는 반호진과 오빠, 동생 하는 사이로까지 가까워졌다.
금호연은 바로 거기서 위기감을 느꼈다.
‘나도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어야 해.’
게다가 난희주는 혈연관계가 될 일말의 가능성도 있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그보다 좀 더 유리한 고지에 있었기에 금호연은 알게 모르게 조급함을 느꼈다.
“이건 잘 사용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저희들끼리 말이 나오긴 했었거든요.”
“다행히 시기를 잘 맞춰 온 모양이네요.”
“그렇습니다. 참, 오늘 저녁에 내려가십니까?”
“급한 일정은 없습니다. 반 대협께서도 아시다시피 강호정세가 많이 흉흉하지 않습니까. 구천문 일도 있고. 저희도 저희 나름대로 운남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중이기는 하나 특별히 바쁜 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물어보시는지요?”
“일행들이 급성장한 비결을 묻는 이들이 하도 많아서 내일 직접 알려 줄 생각이거든요. 정확하게는 몸으로 느끼게 해 줄 생각인데, 괜찮으시다면 호위대가 참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금호연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안 그래도 그 역시 궁금하던 차였다.
아무리 반호진이 절대고수라고 하나 스스로 수련하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건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 반호진은 그걸 해냈기에 금호연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엄청 궁금했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예. 근데 대단한 건 아닙니다. 직접 보시면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되게 단순한 거라.”
“참여할 수 있다면 참여하고 싶습니다!”
반호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으나 금호연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크게 소리쳤다.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반호진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터였다.
직접 겪어 보는 이는 다를 것이기에 금호연은 혹시라도 반호진이 말을 거둘까 싶어 냉큼 받아들였다.
“호위대원들이 소장주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만. 진짜 힘들 겁니다. 특히나 처음 겪으면.”
“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지 않습니까? 오히려 엎드려 절을 해서라도 참여하려고 할 겁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무인이었다면 당장 참여하겠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럼 내일 참여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기대되는군요. 어떤 비결일지가요.”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정말 별거 없어서였다.
다른 이들은 대단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진짜로 그런 건 없었다.
그래서 내일 직접 보여 줄 생각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공터는 고요했다.
백 명이 훌쩍 넘는 인원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떠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다들 긴장한 기색으로 반호진의 거처만 바라보고 있었다.
끼이익.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한 가운데 두 채의 전각에서 문이 동시에 열렸다.
그리고 반호진과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반호진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남녀를 막론하고 일제히 입을 열었다.
하나같이 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반면에 오늘 할 훈련이 익숙한 일행들은 덤덤했다.
아니, 무덤덤함 속에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희도 다 모였습니다.”
“너무 일찍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개운하게 잘 잤습니다. 숭산의 영험한 기운 덕분인지 정말 오랜만에 푹 잤습니다.”
빈말이 아닌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눈 밑이 살짝 검었던 금호연의 안색은 밝아져 있었다.
반대로 호위대원들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쁜 긴장이 아니라 기대감이 서린 긴장이었다.
“소장주님은 이쪽으로 오시죠. 의성이와 함께 지켜보시면 됩니다.”
“사마 공자는 참여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예. 어떻게 보면 이제 막 무공에 정식으로 입문한 셈이라.”
반호진의 말에 사마의성이 옅게 웃으며 금호연에게 목례했다.
자칫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사마의성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스스로도 무공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더욱이 소실되었던 사마세가의 무공을 다시 익히고 있는 중이었기에 오늘과 같은 훈련은 사마의성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독이 되었다.
“사마 공자가요?”
“예. 조금 다듬어야 할 게 있어서 오늘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의성이와 함께 지켜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의외기는 하나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 금호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조운이나 선우방과 달리 사마의성과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 보지 못했기에 이참에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저는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 대협.”
“그건 약속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후기지수들과 똑같이 대할 거라.”
“하하. 그거면 됩니다. 차별하지 않는 것이요.”
금호연이 다른 걸 부탁하는 게 아니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반호진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지금부터 할 훈련의 규칙은 간단합니다. 첫 번째, 내공을 사용하지 말 것. 두 번째 쉬지 않고 계속 비무를 이어 나갈 것. 부상을 당한 경우 스스로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이어 나가면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 무리이다 싶으면 바로 말려 주시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잔뜩 기대했던 후기지수들이 반호진의 설명이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비결을 알려 준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딱히 특별한 게 없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반호진은 단 한 번도 지금부터 있을 훈련이 특별하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내공을 몰래 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바로 말하면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겁니다.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이 있다면 자신과 남을 속이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발언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여기 있는 이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무인에게 있어 자긍심과 자존심은 목숨보다 더 무거운 것이기에 다들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까아앙!
그와 동시에 무한 대련 훈련이 시작되었다.
서조운이 지옥훈련이라고 부르는 훈련이 시작된 것이었다.
“끅!”
“커헙!”
내공을 사용하지 않기에 승부는 순수하게 신체적인 능력과 기술로만 승패가 갈렸다.
그로 인해서 유리한 이들도 있는 반면에 불리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불평불만을 내뱉는 이들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근원적인 대련이 지금과 같은 대련이었고, 전쟁에서 유불리를 따지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대부분 겪어 보았기에 오히려 더 기를 쓰고 대련에 임했다.
“져, 졌습니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는 곳도 있었지만 단 일수에 승부가 결정되는 곳도 있었다.
바로 반호진이 있는 곳이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반호진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자신보다 체구가 크거나 근력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어도 반호진은 밀리지 않았다.
깡! 깡! 깡!
힘이 부족하면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며 순식간에 상대를 바꿔 나갔다.
누구도 반호진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공을 쓸 수 없기에 몇몇 후기지수들이 자신의 체격만 믿고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그렇다고 근력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체격임에도 반호진은 거구의 후기지수들을 확실하게 무너뜨렸다.
상대의 힘을 흘리거나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제압하며 계속해서 비무를 이어 나갔다.
“으윽!”
처음에는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반호진과 비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기뻐했다.
구룡조차도 선뜻 비무를 청하지 못하는 게 반호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무한 대련 훈련이 시작한 지 한 식경 만에 사라졌다.
대신 곡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퍽! 푹! 퍼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