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장. 근성이란. -01
가뜩이나 컸던 팽만철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반호진이 말을 하면서 담현과 상일기, 남궁호, 당우혁을 차례대로 바라봤는데 그 의미는 명백했다.
이 자리에 천하십대고수만 그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 있다는 걸 눈으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호오.”
“이건 생각 못 했네.”
다 같이 왔음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 못 했다는 듯이 팽만철뿐만 아니라 당우혁과 남궁호가 묘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소가주일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지만 가주가 된 이후로 비무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에 법왕과 명왕이라면 비무 상대로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는 안 계시지만 개방주님도 있지요.”
“허어. 십왕 중 아홉 명이 숭산에 있군요.”
담현도 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평화의 시기가 끝났다는 걸 느꼈기에 마음가짐 역시 달라졌다.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수련밖에 답이 없었다.
그리고 상일기 역시 내심 겨뤄 보고 싶었기에 눈을 빛냈다.
“저보다는 비슷한 연배가 심적으로 훨씬 편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한테 떠넘기는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저는 순수하게 의도로 자리가 만들어졌다는 걸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이렇게 모인 적은 있어도 서로 비무를 한 적은 드물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팽만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모인 적은 일 년에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손속을 겨룬 적은 드물었다.
따로 만나서 조용히 비무를 한 적은 있어도 이처럼 천하십대고수급들이 모여서 돌아가며 비무한 적은 없었다.
“이참에 무를 겨루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귀찮아서 피하려는 건 아니고?”
“그렇게 매몰찬 성격은 아닙니다.”
반호진의 말에 팽만철은 물론이고 남궁호와 당우혁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세 사람의 생각은 달라서였다.
“오늘은 아닌 듯하니 우리끼리 하지요.”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오겠네.”
“예.”
반호진의 성격상 조른다고 해서 마음이 달라질 리 없기에 담현이 자리를 정리했다.
꼭 오늘만 날인 건 아니어서였다.
또 자신들이 치근덕거리는 게 다른 이들에게 좋게 보일 리도 없기에 당우혁은 담현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나 눈빛으로는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팽만철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반호진과 제대로 붙어 보고 싶다고 말이다.
그 시선에 반호진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따아아앙!
사부를 비롯한 네 명이 떠나자 반호진은 뒷짐을 지고서 공터를 찬찬히 둘러봤다.
동생들이 잘하고 있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한데 가장 큰 활약을 하는 건 선우방도, 동생들도 아닌 팽화영이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후기지수들을 휘젓고 다녔다.
“확실히 재능이 있어.”
선우방과 마찬가지로 지난 생보다 빠르게 알을 깰 것 같은 팽화영의 모습에 반호진은 흡족했다.
팽만철이나 오빠들은 팽화영의 재능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이 아는 건 빙산의 일각이었다.
오빠들을 생각해서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꾹꾹 눌러 놓고 살아온 게 팽화영이었다.
그게 지금 풀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강렬하게 말이다.
그래서인지 팽추영과 팽주영은 막내 여동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흐음.”
하북팽가 일가를 일별한 반호진은 느릿하게 공터를 다시 한번 훑었다.
그러나 그가 찾는 이들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봉문이라도 한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확인하며 반호진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열기가 대단하네.”
소문으로 들었음에도 실제로 보니까 느낌이 달랐다.
훨씬 더 뜨거운 열기에 금호연은 자신도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의욕 가득한 후기지수들을 보자 그도 심장이 벌렁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호위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꿀꺽!
무림에서 난다 긴다 하는 후기지수들이 전부 모여 있는 광경에 나이를 막론하고 호위무사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 역시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기에 호승심이 끓어오른 것이었다.
곳곳에서 비무가 벌어지는 광경에 호위무사들은 잠시 본분을 잃고 뛰쳐나갈 뻔했다.
“허어.”
뒤이어 호위무사들 사이에서 깊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탄성에 앞장서서 걷고 있던 금호연이 피식 웃었다.
호위무사들이 누구를 보고 저렇게 탄성을 터트리는지 그는 알아서였다.
“크흠!”
그러나 호위대주는 그게 기강이 해이해진 것으로 봤는지 일부러 크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삼봉의 미모가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금호연의 호위대였다.
그 본분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호위대주의 헛기침 소리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후기지수들이 이쪽을 쳐다봤다.
그중 금호연은 안면이 있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지나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소장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서 공자님. 섬서성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형님께 힘을 조금 보태 드렸을 뿐입니다.”
“제가 들은 것과는 내용이 많이 다른데요?”
반호진을 제외하면 안 시간이 제일 긴 사람이 서조운이었다.
그래서인지 금호연은 서조운을 상당히 편하게 대했다.
“진짭니다. 저만 힘을 보탠 것도 아니고요. 일단 들어가시죠. 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원래는 나오시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이래서.”
“괜찮습니다. 매번 마중 나와 주시지 않았습니까. 다 이해합니다. 게다가 서 공자님께서 마중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반호진의 심정을 대변하듯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짓는 서조운의 모습에 금호연이 과장되게 손사래를 쳤다.
결단코 맹세하건대 반호진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그가 본 반호진은 절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주변 상황이 어떤지 알기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끄덕끄덕.
그뿐만 아니라 호위대도 같은 생각인지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서조운이 마중을 나온 것으로도 신경을 충분히 써 준 것이었다.
반호진과 정이륭에 가려져서 그렇지 서조운도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한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께서 정말 미안해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여러모로 형님이 바쁘시거든요. 저희 무공도 봐주시고, 따로 신경 쓰는 일도 있어서요. 말로는 설렁설렁 산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십니다.”
“하하하. 저도 잘 알죠. 그게 진심이라는 것을요. 근데 능력이 있으면 그게 참 힘듭니다. 성격적으로도 눈앞에 일이 있으면 그냥 못 넘어가시잖아요.”
“맞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구보다 언행불일치를 보여 주는 사람이 반호진이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게 반호진의 매력이었다.
툴툴대면서도 챙겨 줄 건 다 챙겨 주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장주님.”
“저는 반 대협의 소식을 계속 듣고 있어서 그런지 어제 뵌 것 같습니다. 하하하!”
서조운과 두런두런 대화를 하면서 금호연은 반호진의 거처로 들어갔다.
그러자 반호진이 미소와 함께 반겨 주었다.
“제 소식이라. 하긴. 소문이 좀 퍼졌다고는 들었습니다.”
“소문이라기보다는 명성이죠. 철혈마황을 잡으셨다는 소식이 중원에 자자합니다.”
“근래 좀 큰 사건이기는 했죠.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서조운이 공손한 말투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준 것이었다.
그런 서조운을 향해 금호연이 고맙다는 감정을 듬뿍 담아 눈인사를 했다.
“모시느라 고생했어.”
“에이. 고생은요. 저도 오랜만에 봬서 반가웠는걸요.”
서조운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반호진을 보며 손을 휘저었다.
이 정도 일은 일도 아니어서였다.
“그럼 저녁에 식사를 같이하시죠? 모두 함께요.”
“좋죠. 그럼 저희가 음식을 준비할게요.”
“어, 그냥 등봉현에 있는 객잔에서 주문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괜히 번거롭게 직접 준비하는 것보다는요.”
금호연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서조운을 비롯해서 일행들의 개인 시간을 빼앗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방법이 있는데 굳이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주문해.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흐흐! 하긴. 돈도 적당히 써야 한다고 들었어요. 너무 쥐고만 있으면 안 된다고. 알겠습니다. 제가 후딱 다녀올게요.”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금호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신이 먼저 제안한 만큼 계산도 그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손님께 계산을 시키다니요. 그건 아니지요.”
“맞습니다. 당연히 주인이 계산하는 게 맞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서조운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방을 나섰다.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금호연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 참. 이럴 거면 제가 미리 주문을 하고 올라올 걸 그랬습니다.”
“꼭 오늘만 날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금호연의 모습에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차를 따라 주었다.
이윽고 방 안을 그윽하게 채우는 향에 금호연은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만 맡을 수 있는 차향에 빠져든 것이었다.
“언제 맡아도 이 차향은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마음이 편안하다고 할까요. 그래서 그런지 가끔 생각이 납니다. 하하하.”
“비싼 게 아니니 챙겨 드리겠습니다.”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금호연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굳이 거절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의외로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아 많이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러니 넉넉히 챙겨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요즘에는 별일 없으시죠?”
“저야 반 대협 덕분에 하루하루 행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고요. 만약 반 대협께서 찾아와 장주님과 독대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처했겠지요.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금호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반호진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금하륜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금가장은 지금처럼 평온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구천문의 산하로 들어갔던 운남성의 문파들처럼 멸문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을 게 분명했다.
“제가 아니었어도 현명한 결정을 내리셨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반 대협께서 직접 찾아와 주신 게 크다고 생각합니다. 반 대협의 방문이 아니었다면 장주님의 고민도 길어졌을 테고, 그로 인해서 애매한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컸을 겁니다.”
“그랬을 수도 있지요.”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반호진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가 알고 있는 미래는 틀어졌고, 중요한 건 현실이었다.
“저는 그게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면 저와 금가장을 신경 써 주신 거니까요. 그 저변에는 아마도 제가 있겠지요?”
“맞습니다. 망하는 길이 뻔히 보이는데 그냥 지켜볼 수는 없으니까요.”
“하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반 대협. 정말로요. 아참. 이걸 드리려고 왔는데 너무 감사 인사만 드렸네요.”
스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