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장. 뒤바뀐 입장. -02
그때 모용척이 이대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요 녀석들에게 여동생을 소개시켜 줄 수 없다는 듯이 평소에 보기 드문 진지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아, 형!”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면 찾아와. 그럼 그때 생각해 보마.”
“그땐 모용 소저가 없잖아요!”
“이야. 내 말뜻을 제대로 이해했네.”
모용척이 놀랍다는 듯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누가 봐도 놀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정현이 발끈했다.
“너, 너무하세요!”
“너무한 건 너 아닐까. 지금 내 앞에서 여동생 몸을 훑어보는 게 누군데?”
“안 훑어봤거든요! 저도 선은 지켜요!”
“그럴 리가.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눈알을 직접 봤는데?”
“어, 자연스럽게 다른 삼봉도 보다 보니…….”
정현이 말을 더듬었다.
나름 변명을 하기는 했으나 누가 보더라도 찔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대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용척의 말에 다들 황급히 시선을 회수했다.
“한마디로 본능이 이겼다는 말이네?”
“죄송합니다…….”
연이어 날아오는 맹공에 정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더는 둘러댈 수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불제자가 거짓말을 할 수도 없기에 사죄를 표했다.
“으이그. 그렇다고 풀 죽으면 어떡해? 내가 괴롭힌 거 같잖아?”
“누구라도 네가 그렇게 말하면 정현이처럼 될걸.”
“어, 그 정도예요?”
정현에게는 강했으나 모용척 역시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반호진의 한마디에 모용척이 움찔거렸다.
“결과가 눈앞에 있잖아?”
“으음!”
“뭐, 네 입장도 이해는 해. 하나뿐인 여동생의 전신을 훑어보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겠지. 그래도 아직 애들이잖아. 한창 혈기왕성할 때고. 넌 안 봤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여인의 몸매를 훔쳐보지 않았다면 네 편을 들어 줄게. 아니지. 내가 사과할게.”
“……저도 봤죠.”
모용척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정현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같은 남자로서 동질감이 들어서였다.
“거봐. 나도 보는데. 이건 본능이야. 이성이 어쩔 수 없는.”
“형님도요?”
“난 남자 아냐? 나도 언젠가는 장가갈 거야.”
“그럼 이 중에서 고르시면 될 것 같은데요? 까놓고 말해서 여기 있는 여자들의 일 순위가 형님이시잖아요.”
모용척의 말에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삼삼오오 대화하고 있었음에도 다들 이쪽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것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말이다.
거리가 제법 떨어진 곳에서조차 이곳을 쳐다보자 모용척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죄송합니다. 입조심하겠습니다.”
방금 전 정현이 했던 것처럼 모용척도 고개를 숙였다.
두말할 여지가 없는 자신의 실수였기에 모용척은 변명하지 않았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네.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을 볼 줄이야.”
“너도 정신없어 보이던데?”
“나는 선우세가의 소가주잖아. 소가주로서 보여야 하는 모습이 있으니까. 척이가 좀 특이한 거고.”
말한 대로 입조심을 하겠다는 듯이 모용척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평소였다면 곧장 반박했을 텐데 지은 죄가 있다 보니 눈빛으로 말을 대신했다.
근데 문제는 선우방이 모용척을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각자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척이 저 녀석도 여기로 도망 온 거야. 네 곁에 있으면 사람들이 귀찮게 안 하니까.”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맞아. 너무 시달려서 도망 왔어. 하하하.”
선우방이 머쓱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인정받고 대우받는 것 같아서 좋았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가식을 은근히 떨어야 했기에 선우방도 힘들었다.
선우세가의 소가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이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눈치껏 슬그머니 빠진 정현 대신에 두 인영이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바로 팽화영, 팽수영 자매였다.
특히 언니인 팽수영은 선우방과 혼담이 오고 가는 사이답게 자연스럽게 선우방의 옆에 섰다.
“오랜만입니다. 근데 벌써 그렇게 진척이 된 겁니까?”
두 자매의 인사를 받아 주며 반호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팽수영이 선우방의 옆에 자리를 잡은 게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와서였다.
그건 입을 다물고 있는 모용척도 마찬가지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선우 공자님은 다른 것 같아요.”
“어……. 그게, 그러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어서일까.
웬만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선우방이 말을 더듬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훅 들어올 줄은 몰랐기에 선우방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반면에 팽수영과 팽화영 자매는 쿡쿡 웃었다.
“남자답지 못하네.”
“너까지 그러면 난 어떡하냐.”
“근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난 엄밀히 따지면 제삼자지.”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놀리기는 해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선우방과 팽수영 정도쯤 되면 가문 대 가문의 일이었기에 반호진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었다.
“그럼 반 공자님은 어떠세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요?”
“글쎄요. 아직은 교제를 할 생각이 없어서요. 정세가 흉흉하기도 하고.”
“흉흉함도 그냥 때려 부수실 것 같은데요?”
팽화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림의 정세가 심상치 않은 건 사실이지만 반호진에게는 크게 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아서였다.
“호진이 성격상 그러고도 남죠.”
“당장 여기 있는 후기지수들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잖아요. 저희도 오기까지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반 공자님께서 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어서.”
동조해 주는 선우방 덕분인지 팽화영이 조심스럽게 속내를 드러냈다.
단어 하나하나 신경 쓰는 모습으로 말이다.
“티 났습니까?”
“그럼요.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이 둔감한데도 다들 못 다가오잖아요.”
“그래서 우리들만 죽어나고 있잖아. 너는 부담스럽지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편하니까.”
선우방이 동생들에게 눈짓했다.
여기에 있는 모용척을 제외한 서조운, 정이륭, 사마의성 모두 후기지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각자 열댓 명씩 말이다.
안면이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초면인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다 너희들에게 약이 되고 돈이 되는 시간이니라.”
“지금 그 말투는 완전 애늙은이 같았어.”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완전 인정.”
나름 생각해서 해 준 말인데 선우방, 팽수영, 팽화영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세 사람의 모습에 반호진은 다시 한번 느꼈다.
좋은 말을 해 줘도 듣는 사람이 제대로 듣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싫으면 다 가세요. 저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니.”
“대체 얼마나 필요하신 거예요?”
“많이요.”
팽화영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반호진도 진심으로 대답해 주었다.
“네?”
“저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제일 행복합니다.”
“허어.”
팽화영은 물론이고 팽수영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림검성이라는 별호를 얻은 무인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런데 표정을 보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절대고수는 고독한 법이지요. 저도 형님을 닮고 싶습니다!”
“벌써 입을 여는 거야?”
“흡!”
두 자매와는 다르게 두 눈 가득 존경심을 담고서 소리치던 모용척이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뒤늦게 자신이 묵언수행 중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만하면 됐어.”
“감사합니다!”
“그보다 슬슬 여동생한테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 겪어 본 일도 아닌데요. 그리고 여기서 잘 보이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어려서부터 미모로 동네가 아니라 천하에 이름을 떨친 이가 모용희수였다.
그런 만큼 남자를 상대하는 데 도가 텄을 터였다.
‘저쪽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고.’
반호진의 시선이 사마의성에게로 향했다.
이번에 철혈성과의 전쟁에서 보인 활약 덕분인지 사마의성이 받는 관심도 상당했다.
다른 일행들만큼은 아니지만 주변에 후기지수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제갈세가도 있었다.
‘제갈세가라.’
한때 경쟁했던 사이였으나 지금은 격차라는 말을 꺼내기도 힘들 정도로 두 가문의 위치는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마의성의 표정은 밝았다.
열등감에 빠진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의 경쟁 가문의 자제가 있음에도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보기 좋네.’
주눅 들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대화하는 사마의성의 모습에 반호진이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원석을 발굴해서 잘 키운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자식까지는 아니고 조카가 잘 자란 느낌이었다.
‘조운이랑 이륭이야 뭐.’
두 사람은 말하면 입 아플 지경이었다.
둘 다 염룡과 은룡이라 불리는 만큼 주변이 꽃밭이었다.
특히 상일기가 천하십대고수가 되면서 정이륭은 서조운 못지않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반 공자님은 대단하신 것 같아요.”
“갑자기요?”
“풋! 아뇨.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선우 공자, 두 번째는 서 공자.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크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인간관계라는 게 마음만 맞는다면 시간은 크게 중요치 않으니까요. 아무리 오래 봐도 정이 생기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서 공자야 구양절맥을 앓았기에 은연중에 재능이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정 공자, 모용 공자에 이어 사마 공자까지 발굴하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반 공자님은 안목도 대단하다는.”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요?”
반호진이 겸손하게 말했으나 팽화영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 모였다고는 보기 힘들어서였다.
“애들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저 때문이라고 하는 건 애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겁니다.”
“아, 저는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팽화영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결단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어서였다.
반호진 역시 그걸 알았기에 빙그레 웃었다.
“압니다. 다만 한 번쯤은 말하고 싶어서요. 솔직히 말해서 인연이 닿았기에 만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방이와 조운이는 팽 소저 말대로 제가 직접 찾아간 것이고요.”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요.”
“흐음. 저희 사이가 가까웠던 적이 있었나요?”
왠지 모르게 풀이 죽은 듯한 팽화영의 어조에 반호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절대 선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아직 반호진은 어디에도 얽매일 생각이 없었다.
“그게 더 서운한데요?”
“근데 의외로 둘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요.”
“꽤 잘 어울리죠?”
팽화영도 내심 놀랐다는 듯 말을 받았다.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였다.
특히 언니가 내숭을 떠는 게 팽화영은 가장 충격적이었지만 그걸 입 밖에 꺼내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성격적으로도 잘 맞는 것 같네요. 워낙에 방이가 둥글둥글해서.”
“저희 언니가 까탈스럽다는 거죠?”
팽화영이 샐쭉한 표정으로 반호진을 흘겨봤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에 흔들릴 반호진이 아니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방이가 누구라도 잘 맞춰 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격은 누구나 다 있죠. 방이도 화낼 때는 냅니다.”
“그래요?”
선우방이 흥분한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팽화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너무 좋아도 사는 데 있어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성깔이 있어야 했다.
“예.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안 그래도 아빠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선우 공자의 몸값이 너무 올랐다고요.”
“하하하.”
“선우세가주님도 확답을 안 해 주셔서. 근데 한편으로는 이해해요. 정말 많은 곳에서 혼담이 들어올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