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장. 뒤바뀐 입장. -01
괜한 우려일 수도 있지만 제갈문곡은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일하게 있다가 당한 후에 허겁지겁 준비한다면 그때는 늦었다.
이미 철혈성과의 전쟁으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말이다.
“너무 앞서 걱정하는 것 아니오? 제갈세가주의 말대로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나 그럼에도 중원은 강하외다.”
“감숙성을 통해서 신강의 마교가 넘어올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경우 공동파 혼자서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무리 본파가 강성해도 그건 무리외다!”
“그러니까 꺼낸 말입니다. 혼자서는 힘드니 서로 도와주자는 겁니다. 장문인께서는 그게 싫으십니까?”
“…….”
공동파 장문인이 입을 다물었다.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서 쏘아보는 걸 보니 제갈문곡의 말이 거슬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갈문곡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마주 봤다.
“새외세력의 침공은 단순히 한 문파의, 한 성의 위기가 아닙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당장 철혈성만 하더라도 섬서성 혼자만의 힘으로 싸웠다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까. 약해 보이는 순간, 만만해 보이는 순간 잡아먹힌다는 걸 모두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약육강식이긴 하지요.”
담담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제갈문곡의 말을 들으며 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제갈문곡과 같은 생각이었다.
공동파 장문인처럼 자기 잇속만 챙기다가는 다 같이 무너지는 수가 있기에 담현은 제갈문곡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리고 모두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구천문이 스스로 물러난 것에 대해서요.”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맞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당우혁이 이 먼 숭산까지 온 게 아니었다.
그도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도움을 청하고자 직접 방문한 것이었다.
“저는 찬성합니다.”
청성파, 아미파에 이어 종남파의 장문인인 성중경이 찬성을 표했다.
이번 전쟁으로 느끼는 바가 많았기에 성중경은 고민하지 않았다.
철혈성으로 인해 입은 피해도 상당했기에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더욱이 당장 무림맹을 창설하자는 것도 아니고 준비하자는 것이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 역시.”
“저도.”
거기에 팽만철과 남궁호도 찬성하자 다른 이들 역시 손을 들며 합류했다.
언제 습격당할지 모르는 만큼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장문인은 당연히 거절이겠소?”
“왜 단정 짓는 것이오? 나, 나도 찬성하겠소이다.”
일우의 빈정거림에 공동파 장문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제갈문곡의 말이 살짝 과장되기는 해도 허황된 소리가 아님을 알고 있어서였다.
마교가 중원을 침공해 올 때 주로 사천성과 감숙성을 통해서 넘어왔기에 공동파의 장문인으로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허어. 아까 전과는 말이 다른 것 같소만?”
일우에 이어 팽만철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꼬워할 때는 언제고 슬쩍 한 발 걸치는 게 어처구니없어서였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있는지 얼굴을 붉혔지만 팽만철은 그조차도 얄밉기 그지없었다.
“우리들조차 한마음 한뜻이 안 되면 대외적으로 좀 그렇지 않겠소.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다 함께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흥!”
뻔뻔하게 대세를 따르겠다는 듯이 말하자 팽만철이 콧방귀를 뀌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데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일우와 성중경 등등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공동파 장문인을 바라봤다.
하나 그럼에도 공동파 장문인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찌 됐든 결론은 나왔구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전부 찬성했기에 개왕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어서였다.
처음 발의한 제갈문곡도 개왕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구천문도 문제지만 중원 내의 사도문파와 마도문파에 경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적보다 더 위협적인 게 내부의 적이니까요.”
당우혁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특히 철혈성과 악전고투했던 이들이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철혈성도 철혈성이지만 냉큼 휘하로 들어간 이들로 인해 입은 피해가 상당했다.
“경고 겸 단속을 할 필요가 있긴 하지요. 죄 없는 이들을 핍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철혈성과 구천문의 경우가 있으니 크게 반발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천당가에서 본보기를 보여 주기도 했으니.”
“그렇습니다. 하나,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제갈문곡보다 당우혁의 나이가 더 많았으나 공적인 자리였기에 예의를 차렸다.
더불어 팽만철과 같은 부류로 엮이기 싫은 것도 한몫했다.
“당가주께서는 좀 더 강경하게 나가기를 바라시는 모양이군요.”
“예.”
“하지만 지나친 압박은 오히려 명분을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어르고 달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제갈문곡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그의 말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고, 반대로 당우혁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충돌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면한 문제도 문제지만 후기지수들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응?”
그때 남궁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보면 생뚱맞은 주제를 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말에 팽만철과 당우혁이 지지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기에 황보세가주도 합류했다.
“후기지수들은 백도무림의 미래이지 않습니까. 이번에 죽은 이들도 상당하고. 현재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미래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구려. 남궁세가주께서 그런 말을 하실 줄은 몰랐지만.”
“이번에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방주님.”
“하면 해결책도 생각해 두셨는지요?”
“잘 성장할 수 있는 장을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는 걸 넘어 선배들이 대련도 해 주고 조언도 해 주면 어떨까 합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시작으로 무림을 종횡하면서요. 그럼 경험도 쌓이고, 자연스레 손발도 맞게 되지 않겠습니까?”
의외로 그럴듯한 계획에 모두가 살짝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남궁호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한데 놀랄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에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 모인 김에 처음은 소림사에서 하고, 두 번째는 남궁세가에서 하면 어떨까 합니다. 원래부터 있던 용봉회를 조금 더 키우는 것이니 크게 부담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호오.”
제갈문곡을 시작으로 몇몇 수장들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듣다 보니 괜찮은 계획 같아서였다.
특히 타 문파나 무가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저는 좋습니다.”
“취지는 나쁘지 않은 듯하오.”
담현과 개왕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하자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하는 쪽으로 쏠렸다.
크게 반대하는 이들도 없었고 말이다.
다만 팽만철만이 묘한 눈으로 남궁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분명 뭔가 노리는 게 있는데 말이지. 제갈세가주는 알고 있으려나.’
미간을 좁힌 팽만철이 꽤나 호응하고 있는 제갈문곡을 바라봤다.
그라면 남궁호의 속내를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팽만철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인지 제갈문곡은 성중경을 비롯해서 청성파, 아미파의 장문인과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팔짱을 낀 반호진이 얼굴 가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하던 그의 거처가 저잣거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북적거려서였다.
아니, 북적거리는 수준을 넘어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그것도 한창때의 남녀들로 말이다.
“우와! 우와!”
“저분이 독봉 당 소저!”
“저기에는 백봉 모용 소저가 계셔!”
“매, 매봉도 있고! 이게 꿈이야, 생시야?”
눈살이 잔뜩 찌푸려진 반호진과 달리 정현을 비롯한 이대제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삼봉이 소림사를 찾아온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소림사를 방문해도 대개 숙소에 머물거나 혹은 용건이 있는 사람만 만나고 떠났었기에 이렇게 편하게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환한 얼굴로 삼봉을 훔쳐보고 있었다.
“엄청나다…….”
“괜히 손꼽히는 미녀가 아니구나.”
“모용 공자님과는 확실히 닮으셨다. 근데 모용 소저가 훨씬 더 예쁘다.”
“넌 당연한 걸 심각하게 말하고 있어?”
쉬지 않고 숙덕거리는 이대제자들의 모습에 반호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림사 망신은 다 시키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속가제자였다면 차라리 이해를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모여 있는 녀석들은 전부 진산제자들이었다.
“소림사의 미래가 어둡구나.”
“사, 사백님!”
“허어. 그래도 내가 눈에 보이기는 하는 모양이구나? 전부 다 삼봉에게만 향해 있는 줄 알았는데.”
“에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넓은데요. 사백님도 보고, 다른 분도 볼 수 있죠.”
“다른 분은 무슨. 그냥 삼봉이잖아.”
정현을 보며 반호진이 혀를 찼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달라서였다.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눈알은 오직 삼봉에게만 향해 있었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잖아요. 저희가 언제 또 삼봉이 다 모여 있는 걸 보겠어요?”
“그렇게 좋으면 아예 가서 인사라도 나누지 그래?”
“어, 그건 좀 부끄러워요.”
정현이 몸을 비비 꼬았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훔쳐보는 건 안 부끄럽고?”
“히히! 마음 편히 볼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많아서 저희가 훔쳐보는 것도 티 나지 않고.”
“참나.”
“근데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은 건 처음 아니에요?”
“나야 모르지.”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은 채로 반호진이 대꾸했다.
사실 그야말로 궁금했다.
갑자기 이렇게 모여든 게 말이다.
모용희수나 팽수영, 팽화영 자매야 나름 친분이 있기에 이해가 가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특히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게 반호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어서였다.
“사백님을 찾아온 건 확실해 보이는데요.”
“그건 나도 알아. 근데 이 정도로 모이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지.”
“도전하러 온 건 아닐 테죠? 진짜 비무신청하러 온 거면 염치가 없는 건데.”
“그냥 보던 거나 봐. 괜히 신경 쓰는 척하지 말고.”
“헉! 티가 났어요?”
정현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미 들켰는데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도 웃겨서였다.
그리고 반호진의 성격상 이 정도 일 가지고 꽁해 있지도 않았다.
“네 스스로를 돌아봐. 티가 날 것 같은지, 안 날 것 같은지.”
“그래도 저에게 있어 우상은 영원히 사백님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냥 가. 좋은 자리 차지해서 마음 편히 봐. 인사라도 나누고 싶으면 척이 데려가고. 독봉과 매봉은 몰라도 모용 소저와는 가능할 테니까.”
“어…….”
정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듣고 보니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인사 정도라면 모용척과의 친분을 이용해 나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다른 이대제자들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눈을 반짝였다.
“의도가 불순해서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