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장. 달라진 위상. -03
정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어느 정도는 깔려 있어서였다.
원래도 소림사의 천재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아예 전 중원에 유명했다.
그렇기에 정현은 제대로 조언을 받고 싶었다.
“내가 알려 준다고 해도 네가 소화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야.”
“그래도 듣다 보면 머리에 각인될 테고, 그럼 나중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방이나 동생들 보고 느끼는 게 없어?”
“어…….”
반호진의 말에 정현이 말끝을 흐렸다.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였다.
“아이들은 나에게 조언을 자주 안 구해. 왜 그럴까?”
“……무공이 달라서?”
“그럴 리가. 익힌 무공이 달라도 극에 이르면 다 통하는 법이야. 그리고 지금 일행들의 수준은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최상위라 할 수 있지. 그런데도 왜 도움을 청하지 않을까? 본인의 무공에 자신이 있어서?”
“어, 그것도 좀 있지 않을까요?”
“아예 파악을 못 하네. 스스로 답을 최대한 찾아보려는 거다. 이런 방법도 해 보고, 저런 방법도 시도해 보고. 그러다가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을 때 날 찾아오는 거다. 그럼 여기서 문제. 이렇게 헤매는 시간이 낭비일까, 아닐까?”
정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본능적으로 말을 잘해야 한다는 걸 느껴서였다.
그래서 정현은 두 눈을 정신없이 굴리며 지금까지 반호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어…… 음…….”
궁리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정현의 모습에 반호진이 독촉하지 않겠다는 듯이 지그시 바라봤다.
얼마든지 고민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라고 할 만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거라도 괜찮아. 네가 생각해 낸 것 중에 답이 있을 수도 있고.”
“잘 모르겠어요. 어느 쪽도 답이라고 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서요.”
“지금처럼 고민하는 것 자체가 너에게는 도움이 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달라지는 게 느껴지지도 않지만 분명한 건 고민하는 시간이 의미 없지는 않다는 뜻이지. 잘 생각해 보면 인생도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지.”
“아!”
“그러니까 요행을 바라지 말고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 조언은 네가 모든 걸 다 해 봤는데도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구하는 거다.”
반호진이 부드럽게 말했다.
요행을 바라는 건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심리였다.
누구나 다 인생역전을 꿈꾸고, 신분상승을 바랐다.
더욱이 정현은 이제 겨우 열세 살이었기에 지름길을 찾는 건 절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사백님의 말씀, 뼈에 새기겠습니다! 매일 잠들기 전에 한 번씩 생각하고 잘게요!”
“헛소리는 그만하고 수련이나 하러 가. 농땡이 피우지 말고.”
“네!”
반호진의 말에서 무언가 느끼긴 했는지 정현은 곧장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 모습을 반호진은 가만히 지켜봤다.
“이 평화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
한가롭게 나무 위에 누워 있었으나 반호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운 좋게 인경보를 쓰러뜨렸으나 아직 세 명이 남아 있었다.
그게 반호진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이었으나 사마의성의 방만은 훤히 밝았다.
등잔불을 피워 놓고서 사마의성이 백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민거리가 있는 모양인지 표정이 진지했다.
“이대로는 한계가 있어.”
벼루에 먹물이 가득 담겨 있었으나 정작 사마의성은 붓을 들지 않았다.
책상 위에 새하얀 한지를 펼쳐 놓고서 말이다.
대신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력이 필요해.”
세인들은 철혈성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만 생각했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그러나 철혈성과의 전쟁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예로 반호진과 일우를 들 수 있었다.
상일기의 등장은 기뻐하면서도 반호진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직 젊은 나이인 것도 있지만 소림사 출신이기에 경원시하는 게 없지 않아 있었다.
소림사가 더욱 강해지는 걸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소림사는 형님의 세력이 아니야.”
소림사는 분명 반호진에게 있어 훌륭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속가제자이기에 반호진이 가지고 있는 권한은 전혀 없었다.
사마의성은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형님만의 세력은 반드시 필요해.”
모든 이들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 사마의성은 다른 걸 봤다.
다른 사람들이 간과한 것을 사마의성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반호진이 철혈성주를 잡은 건 분명 대단한 성과였으나 그게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건 아니었다.
만약 화산파와 종남파, 남궁세가, 하북팽가 등등의 세력들이 받쳐 주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반호진이라고 하더라도 멀쩡히 인경보를 잡지는 못했을 터였다.
설사 잡았다고 해도 살아서 빠져나오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마의성은 이 부분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정예로는 한계가 있어. 일행들 전원이 천하십대고수급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지만 그게 아니니까.”
사마의성은 냉정하게 현재 전력을 판단했다.
전술의 기본은 아군의 전력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때문에 사마의성은 사적인 감정은 내려놓고 지극히 객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봤다.
“형님께서도 독립하실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
반호진이 바라는 게 현상유지라면 이런 고민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마의성이 본 반호진은 분명 마음이 있었다.
소림사에서 나와 자기만의 가문을 일으킬 마음이 말이다.
다만 아직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똑똑똑.
“나다.”
“들어오세요, 형님.”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사마의성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던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반호진의 음성이었다.
늦은 시각인 데다가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으나 사마의성은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아직도 불이 켜져 있길래 와 봤어. 따로 할 일이 많아?”
“그건 아니고요. 좀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요. 잠도 오지 않고.”
“차를 너무 많이 마셔서 잠이 안 오는 건 아냐?”
“그러기에는 몸이 너무 많이 적응했습니다. 하하하.”
반호진에게 자리를 권하며 사마의성이 빙그레 웃었다.
차와 수면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서였다.
잠을 쫓는 차도 있다고는 들었으나 사마의성이 주로 마시는 차는 그런 류의 차가 아니었다.
“요즘에 잠을 통 못 자는 것 같은데?”
“그래도 필요한 만큼은 자고 있습니다. 적당한 수면은 일의 능률을 올려 주거든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사마의성이 따라 주는 차를 받으며 반호진이 걱정스레 말했다.
웬만해서는 누구를 걱정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사마의성은 달랐다.
농땡이를 피우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기에 가끔씩은 잡아 주어야 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진짜 괜찮아요.”
“무공수련도 틈틈이 하고 있는 건 아는데, 사람은 기계가 아냐. 하물며 기계나 기관진식도 고장이 나는데 사람은 오죽하겠어?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과 미련한 건 다른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근데 요즘에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반호진이 물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딱히 고민거리가 없어서였다.
전쟁도 얼추 정리가 되었는데 혼자 심각한 것 같아서 반호진은 자연스럽게 툭 물어봤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형님입니다.”
“나? 내가 왜? 난 나름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고 있는데.”
“그건 저도 잘 알죠. 다만 철혈성과의 전쟁에서 제가 느낀 게 좀 있어서요.”
“어떤 거?”
“형님의 무위는 대단하지만 그걸 받쳐 줄 세력이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마의성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사람이라는 게 칭찬보다는 지적에 민감했다.
그리고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게 지적이었기에 사마의성은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자칫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어서였다.
“세력이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소림사의 제자지만 권한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그러나 사마의성의 걱정과 달리 반호진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사실에 기분 나빠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 모습에 사마의성은 내심 안도하며 생각하고 있던 말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냉정하게 말해 방이 형과 척이 형은 선우세가와 모용세가 소속이지 않습니까. 우호 세력은 되어 줄 수 있어도 형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곳은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네 말은 독립을 해야 한다?”
“정확하게는 형님의 의중을 알고 싶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독립도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은데, 맞으신가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기는 해. 언제까지고 숭산에서만 머물 생각은 없거든. 사부님께서는 어떤 결정을 하든 지지해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나도 장가는 가야지. 그럼 자연스럽게 독립이 되지 않겠어?”
“따로 계획을 세운 건 아니군요.”
사마의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보면 막연해 보이지만 반호진의 입장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언제, 누구와 혼인할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일을 벌이기도 애매했다.
무림정세가 뒤숭숭했고 말이다.
“아직 혼인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거든. 전쟁통에서도 싹 트는 게 사랑이라지만 난 아직 그런 게 없어서.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고.”
“그건 모르는 일이죠.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내 성격 보면 몰라? 지금쯤이면 파악이 끝났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
긍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어느 쪽도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았기에 사마의성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대답을 피하겠다는 뜻이었다.
“일단 네 생각은 알겠어. 근데 세력이라는 게 마음을 먹었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냐. 성급하게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해.”
“맞습니다. 어중이떠중이들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준비는 어느 정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무작정 시작하는 것보다는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게 확실히 나으니까요. 그래서 형님께 여쭈어본 것입니다.”
“그게 정석이기는 하지. 근데 나보다는 네가 더 급하지 않아? 사마세가의 후손들이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정작 그건 말이 없네?”
“으음. 그게 말이죠.”
“표정이 복잡하네?”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어서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마의성에 말에 반호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그래도 형님께 조언을 구하려고 했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후손들의 등장에 기뻤어요. 저 혼자만 남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조금 의심이 되더라고요. 아무리 제가 철혈성과의 전쟁에서 조금 활약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게요.”
“혈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 법도 하지. 오히려 순순히 믿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기도 하고.”
“사실일 수도 있지만요. 근데 그걸 구별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간의 고민을 말해 주듯 사마의성의 표정에는 고뇌가 짙게 서려 있었다.
총명한 사마의성이지만 마음먹고 하는 거짓말을 판별하는 건 쉽지 않았다.
조숙하긴 해도 사마의성의 나이는 이제 열여덟에 불과했다.
“어렵지. 나에게도 쉽지 않은데. 그렇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방법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