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장. 달라진 위상. -02
담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였다.
반호진의 성격상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놓고 안 좋다고 할 텐데 오히려 고마워하자 담현은 기뻤다.
선물한 보람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스르릉.
담현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할 때 반호진은 반쯤 뽑았던 검을 완전히 뽑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사부가 얼마나 이 검에 신경 썼는지를 말이다.
전체적인 균형은 물론이고 검신의 길이, 검병이 길이가 모두 원래 사용하던 검과 똑같았다.
두께 역시 마찬가지였고.
다만 다른 점은 무게였다.
‘무게는 거의 비슷하지만 강도와 날카로움은 이게 월등히 높아.’
띠이이잉!
검의 균형을 확인하던 반호진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원래 쓰던 검보다 훨씬 청아한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게다가 탄성 역시 비교 불가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명검 중에서도 최상급인데.’
무림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신검들은 애초에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장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천운이 따라 주어야만 탄생하는 게 신병이기였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지금 들고 있는 검은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무가지보라 불리는 신병이기들을 제외하면 최상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작도 제작이지만 재료비가 상당히 많이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만.”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의미가 없는 법이지. 그리고 네가 소림사의 명성을 드높인 걸 생각하면 오히려 남는 장사지.”
“그렇긴 합니다만.”
“이름을 지어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 정도 검인데.”
담현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굳이 재료비, 제작비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소림사가 기본적으로 절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돈이 없지는 않았다.
더욱이 제자를 위한 것이었기에 아깝지도 않았고.
“이름이라.”
“떠오르는 게 있느냐?”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니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소천(少天)입니다.”
담현이 피식 웃었다.
소천(小天)이 아니라 소천(少天)이라고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어서였다.
“소림사의 하늘이란 뜻이더냐?”
“달마삼검에 어울리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의미로는 소림사를 지키겠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구나.”
“그래도 어울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화려한 이름보다는요.”
“그렇긴 하지.”
담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보기에도 소천검은 화려한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잘 쓰겠습니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좋은 게 낫지. 그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을 게야.”
“그럴 것 같습니다.”
“참, 구천문의 소식은 들었느냐?”
조심스럽게 검을 검갑에 집어넣는 반호진을 보며 담현이 물었다.
혹시나 들은 게 있나 싶어서였다.
“아직 들은 게 없습니다. 혹 결판이 났습니까?”
“결과가 나오긴 나왔는데, 좀 찝찝하게 나왔더구나. 구천문이 묘강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적지 않은 피해를 입긴 했으나 그렇다고 물러날 정도는 아닌데 미련 없이 떠났다고 하더구나.”
“도주가 아니라 퇴군이군요.”
“맞아.”
담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좀 이상한 구석이 있어서였다.
왠지 모르게 께름칙했기에 담현이 미간에 골을 만들었다.
“사천당가 연합은 어떻게 하기로 했답니까?”
“섬서무림처럼 묘강에 갈 생각은 없는 것 같더구나. 아무래도 어중간한 승리이다 보니 구천문의 영역에 들어가기가 부담스러운 모양이야.”
“신중해서 나쁠 건 없죠.”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철혈성과는 상황이 달랐다.
수뇌부가 전멸한 철혈성과 달리 구천문은 건재했기에 묘강으로 진격한다면 피해가 클 터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원정은 여러모로 위험해. 완벽하게 승산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 침공하면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게야.”
“근데 찝찝하기는 하네요. 먼저 공격했던 구천문이 스스로 물러났다는 게.”
지난 생과는 완전히 달라진 미래에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이제는 그도 예상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천하사패 중 한 곳을 무너뜨렸다는 점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반호진에게는 정말 큰 성과였다.
“사천당가도 같은 생각일 테니 알아보겠지. 내부정보를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해내야지. 더욱이 사천당가는 빚을 지고는 못 사는 가문이지 않더냐. 그보다 철혈마황에 대해서 얘기해 다오. 이래저래 듣기는 했지만 역시 가장 잘 아는 건 너이지 않겠느냐.”
담현이 눈을 반짝거렸다.
천하십대고수 중 상위의 강자라 할 수 있는 이들조차 감히 일대일로는 상대가 안 되었던 무인이 철혈마황이었다.
그렇기에 담현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간략하게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자세하게 말씀드릴까요?”
“자세하게.”
담현이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간단하게는 이미 많이 들었다.
그리고 담현이 원하는 건 인경보의 무경에 대해서였기에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 의지가 눈빛에서부터 느껴졌기에 반호진은 인경보를 만났을 때부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체적인 전투부터 시작해서 대전사들과 천하십대고수들 간의 싸움, 마지막으로 인경보의 무경에 대해서 말이다.
그중 대전사들에 대해서도 담현은 귀를 기울였다.
대전사들의 실력이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달라서였다.
그래서인지 담현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반호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때로는 경악하고, 때로는 감탄하면서.
***
어느덧 여름이 훌쩍 지나가고 가을이 오는 것 같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반호진이 오랜만에 나뭇가지에 늘어져 있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만끽했던 것이다.
“좋군. 아주 좋아.”
다시 돌아온 여유로운 일상에 반호진은 두 눈을 감은 채로 흥얼거렸다.
새들의 지저귐도 반호진에게는 노래처럼 들렸다.
“다시 한번 붙죠!”
“그래그래.”
멀리서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혈성과의 전쟁이 좋은 자극이 되었는지 기합 소리에는 열의가 가득했다.
특히 서조운의 기합 소리가 가장 컸다.
서가장이 다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기쁘지만 자신의 존재가 가문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더 기분 좋은 듯했다.
“선순환이지.”
반호진이 히죽 웃었다.
과거로 돌아와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서조운을 치료한 것이었다.
그로 인한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었기에 반호진은 아주 흡족했다.
또 대전사들을 보고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승부욕을 불태우는 것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대로 쑥쑥 잘 크면 된다.”
일우가 한 팔을 잃었으나 대신 상일기가 등장했다.
더욱이 인경보 덕분에 개왕과 남궁호, 팽만철, 일우가 경각심을 가졌으니 크게 보면 중원무림의 이득이었다.
거기다 사부인 담현도 티는 내지 않았으나 은근히 충격을 받은 기색이라 반호진은 기대가 되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질 담현이.
“나도 좀 더 강해져야 하고.”
반호진이 누운 채로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는 냉정하게 말해 운이 좋았다.
철혈성의 침공이 지난 생보다 일찍 시작되었다고 하나 그럼에도 예상했던 것보다 인경보의 무경이 낮았다.
만약 인경보가 전생과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이번처럼 큰 상처 없이 이기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어쩌면 북해빙궁주 역시 마찬가지일 수도 있는데, 문제는 확인할 방도가 없다는 거지.’
북해빙궁주 정도 되는 고수의 무경을 조금이라도 엿보려면 최소 비벼 볼 정도의 실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반호진이나 천하십대고수급이 직접 만나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되면 결과는 두 가지뿐이었다.
친구가 되거나 적이 되거나.
북해빙궁주의 야심을 생각하면 전자보다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거기다 구천문도 찝찝하고.’
시원스럽게 결판이 난 게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묘하게 불안했다.
그가 아는 구천문주는 이대로 어정쩡하게 끝낼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 주려는 심보를 지니고 있었다.
어찌 보면 사천당가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개방을 믿어 봐야지.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니까. 난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새로운 검이 생긴 만큼 지금은 소천에 적응하는 게 먼저였다.
원래 사용하던 검과 거의 흡사하지만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았기에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의 진기에 잘 반응하도록 길도 들여야 했고.
거기에 틈틈이 철혈성주와의 대결을 복기해야 했다.
“사백님! 사백님!”
“넌 여전히 날 잘 찾는구나. 장소를 매번 바꾸는데.”
“흐흐! 숭산에서 사백님이 가실 곳이야 뻔하죠, 뭐. 늘 조용한 곳을 찾으시지만 거처에서 그렇게 멀리는 안 가시잖아요.”
정현이 히죽 웃으며 콧대를 세웠다.
어디를 가든 찾아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과도한 정현의 자신감에 반호진은 문득 장난기가 솟았다.
다음번에는 절대 찾아낼 수 없는 곳을 가야겠다고 말이다.
“이제는 좀 생각해 봐야겠어.”
“제가 또 숨바꼭질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무공은 늦게 습득해도 놀이 분야에서는 제가 최강자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많이 놀았다는 뜻이잖아.”
“헉!”
“농땡이를 많이 피웠다는 말을 되게 잘 포장하네?”
정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검게 변했다가 하얘졌다가를 반복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울상을 지었다.
“아, 아닌데요…….”
“그런 표정으로 부정하면 참 신뢰가 가겠다.”
“으윽!”
“근데 무슨 일이야? 지금 오후 수련할 때 아닌가? 이 시간이면 나한진 수련을 할 때인데.”
“헙.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정현이 대경한 표정으로 두 눈을 껌뻑였다.
근래 일과에 대해서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였다.
“다 들려.”
“역시 청춘은 대단한 것 같아요. 거기다 무공도 절세고수시니.”
“웬일이냐. 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반호진이 정현을 내려다봤다.
한쪽 팔로 머리를 지탱한 채로 말이다.
“저는 원래 사백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퍽이나.”
“진짠데요. 특히나 이번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어요! 천하십대고수들도 버거워했다던 철혈성주를 사백님께서 잡으실 줄이야! 저는 정말 자랑스러워요!”
“솔직히 말해 봐. 원하는 게 뭐야?”
정현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 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원하는 거라니요? 저는 진심으로 사백님이 자랑스러운데요?”
“흐음?”
진심 어린 표정으로 정현이 다시 한번 말했으나 반호진은 게슴츠레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정현의 말을 순순히 믿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예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이대제자들도 같은 생각이에요. 다들 쉬쉬하지만 알고 있는걸요? 사백님이 천하십대고수에 들고도 남을 실력자라고요. 아니, 검왕보다 강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건 배분과 나이에 따른 편견 때문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어요!”
“그건 고맙네.”
“세간에서는 사백님이 차기 천하제일인이라고 하지만 저희들은 생각이 달라요! 사백님이 지금도 근접해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왜 너희들이 신나 해?”
“히힛! 그야 저희 사백님이시니까요!”
정현이 히죽 웃었다.
이거면 이유로서 충분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실소가 절로 나왔다.
“지금 아부하는 거지? 좀 더 관심을 가져 달라고.”
“역시 사백님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