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장. 달라진 위상. -01
“너는 어떨 거 같아?”
“단위보다는 상 문주님이 훨씬 윕니다. 그러니 당연히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우 대협이 큰 부상을 입기도 했고.”
“적응하면 멀쩡하던 시절의 실력을 회복할 거다.”
“그 이상은 힘들 겁니다. 팔이 두 개인 것과 하나인 것은 은근히 차이가 커서.”
절치부심해서 몸이 멀쩡했을 때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도 있지만 반호진이 보기에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될 줄 모른다고 하나 적어도 현재까지 보기에는 그랬다.
“방법을 찾아내겠지.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그 녀석 성격에.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내겠지. 아, 상 대협도 별호가 생기셨다.”
“어떤 별호입니까?”
자신의 별호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반호진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일기 역시 천하십대고수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다들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뭘 거 같아?”
“이런 식으로 나오실 겁니까?”
“왜? 넌 그래도 되고, 난 이러면 안 되냐?”
팽만철이 키득거렸다.
아까의 복수를 한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오래 뜸 들이지는 않았다.
“다들 예상한 별호다. 그래서 너무 싱겁다고나 할까.”
“명왕인 모양이군요.”
“맞아. 잘 어울리기도 하고. 염왕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근데 둘이 죽이 잘 맞는 걸 보면 또 찰떡같기도 하고.”
“새로운 무림십왕이로군요.”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신권이라 불리던 전생과는 달랐지만 명왕이라는 별호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별호라는 게 계기만 있으면 바뀌기도 했고.
“그럼 이륭이는 이제 무림십왕의 제자가 된 거네?”
“하하하.”
정이륭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신분이 상승된 느낌에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저는 숭산으로 돌아가야죠. 제 몫 이상을 했으니까요.”
“하긴. 네가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이나 마찬가지긴 하지. 사실 나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
“믿기 싫으시면 안 믿으시면 됩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두 눈으로 직접 봤는데 어떻게 안 믿어? 어쨌든 기다리고 있어. 본가에 들렀다가 찾아갈 테니까.”
반호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놓고 싫은 티를 팍팍 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호진의 표정에도 팽만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오시려는 겁니까?”
“제대로 붙어 보고 싶어서. 왠지 너에게 깨지면 보완해야 할 점을 알 수 있을 것 같거든.”
“그건 상 문주님도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상 대협도 숭산에 계실 거 아냐?”
반호진은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틀리지 않아서였다.
다시 강호유람을 떠날 수도 있지만 일단은 숭산까지는 같이 갈 게 분명했다.
“나도 갈 것이네.”
“자네는 왜?”
그때 남궁호가 다가왔다.
인경보에게 당한 부상으로 인해 상반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술을 한잔했는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자네와 같은 이유일세.”
“허어.”
취기가 살짝 오른 얼굴로 의미심장하게 웃는 남궁호의 모습에 팽만철은 불안해졌다.
단순히 비무만이 목적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다른 목적이 있는 듯했기에 팽만철은 퉁방울만 한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그가 말릴 방법은 없었다.
“우선 부상부터 치료해야 하시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금방 낫네.”
“술 때문에라도 금방 안 나을 것 같습니다만.”
“벌써부터 늙은이 취급하는 건가?”
남궁호가 씨익 웃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는 웃음이었다.
“건강은 젊었을 때부터 챙겨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치료로 치료지만 몸조리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걱정 말게. 아직 그 정도로 나이를 먹지는 않았으니까. 자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정정하네. 팽 가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나와 비교하면 쓰나. 타고난 몸뚱이가 다른데.”
팽만철이 어따 비교하냐는 듯이 투덜거렸다.
연배는 비슷할지 몰라도 신체 능력은 완전히 달라서였다.
누구보다 튼튼한 몸을 가진 게 하북팽가의 특징이었기에 팽만철은 고개를 저었다.
“뜻대로 하십시오.”
무슨 말을 해도 숭산에 오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기에 반호진은 포기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반호진은 두 사람에게서 신경을 끄고 일행들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
숭산에 돌아온 반호진은 곧장 방장실로 향했다.
철혈성과의 전쟁에 대해서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앉거라.”
“예.”
또르륵.
반호진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담현은 미리 정성스레 우려 두었던 차를 따라 주었다.
이윽고 방장실에 그윽한 차향이 잔잔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얘기는 들었다. 철혈성주를 쓰러뜨렸다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나서지 않는 것이었는데, 상황이 나설 수밖에 없게 흘러갔습니다.”
“허허허.”
제일 큰 전공을 세웠음에도 으스대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상황이 닥친 것이 불만이라는 듯 투덜거리는 반호진의 모습에 담현이 옅게 웃었다.
무명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음에도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였다.
도리어 귀찮은 기색이 완연했다.
“그렇다고 저만 활약한 건 아닙니다. 일행들도, 그리고 상 문주님께서도 정말 크게 활약하셨습니다.”
“나도 들었다. 명왕이라는 별호를 얻으셨다고. 상 문주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지.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담현이 싱긋 웃었다.
상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낸 사람이 바로 반호진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반호진은 마치 이렇게 될 줄 아는 듯했다.
“상 문주님은 충분히 천하십대고수에 오를 자격이 있지요. 일단 단위보다 강하시니까요.”
“억울하지는 않더냐?”
“무림십왕의 자리 말씀이십니까?”
“그래.”
“전혀 억울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건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제 자신의 실력이지요.”
담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가 반호진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어서였다.
물론 다른 이들의 시선과 평가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거기에 목을 매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러나 중요한 건 반호진이 지금 한 말대로 자신의 실력이었다.
스스로의 실력이 밑바탕되지 않으면 결국 허명일 뿐이었다.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구나. 하긴, 이미 나를 넘어섰으니. 허허허.”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기에 담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소림사 방장이기에 앞서 그 역시 한 명의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제자가 천하에 우뚝 서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배움은 내가 청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무공만이 전부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마음가짐이다. 무경의 고하만으로 승부가 갈리지 않기도 하고.”
담현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제자이지만 정말 잘 자라 주었기에 고마웠다.
거기다 반호진은 단순히 강해진 걸 넘어 소림사의 검을 천하에 알렸다.
그렇기에 담현은 더욱 기꺼웠다.
“맞습니다.”
“이걸 받거라.”
스윽.
미소가 떠나지 않은 얼굴로 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무명천으로 단단히 뒤덮여 있었는데 워낙에 형체가 뚜렷해서 반호진은 보는 순간 무엇인지 알았다.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여기에 다른 사람이 더 있더냐?”
“제 검은 아직 괜찮습니다만.”
“꺼내 보거라.”
“예.”
반호진이 허리춤에 메여 있던 검을 풀었다.
몸이 성장함에 따라 검을 바꿨고, 지금 쓰고 있는 검은 사 년 전부터 쓰던 것이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무명천으로 닦고 관리를 해서 그런지 낡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다만 곳곳에 그동안 싸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사 년 정도 되었지?”
“예.”
“이번 검은 꽤 오래 쓰는구나. 예전에는 참 많이 부러뜨렸는데.”
“하하하.”
오랜만에 나오는 옛날 얘기에 반호진이 멋쩍게 웃었다.
검을 수련한답시고 부러뜨리거나 망가뜨린 검이 상당히 많아서였다.
특히 연습용 검에서 벗어났을 때 유독 많이 깨트려 먹었었다.
익숙하지 않은 실전용 검이다 보니 함부로 다루어서였다.
스르릉.
“검집도, 검신에도 네가 싸워 온 세월이 담겨 있구나.”
“네. 거의 제 분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수명이 거의 다했어.”
“아직은 괜찮습니다.”
여러 개를 부러뜨리며 검을 어떻게 다루고, 관리해야 하는지 습득했기에 지금 사용하는 검은 쓴 기간에 비하면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로 반호진이 애지중지해서였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내부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철혈성주와 싸우면서 내구도가 상당히 나빠졌는데 담현은 그걸 한눈에 알아봤다.
띠잉. 띵!
단순히 보는 걸 넘어 담현은 검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때렸다.
그러자 청명한 소리 속에서 미세한 둔탁함이 느껴졌다.
“무릇 모든 물건에는 수명이 존재하는 법이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고. 무가지보라 불리는 것들 중에는 거기에서 벗어난 물건이 있기는 하나, 보통은 그렇다. 아마 철혈마황 수준의 강자와 한 번 더 싸운다면 검이 버티질 못할 거다.”
“으음.”
반호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어서였다.
사실 주인인 그가 모르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다만 부러지기 전까지는, 사용할 수 없을 때까지는 함께하고 싶었기에 검을 바꾸지 않은 것이었다.
“꼭 검을 바꾼다고 해서 쓰던 검을 버릴 필요는 없지. 오히려 온전한 모습으로 더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새 검을 사용하는 것이기도 해.”
“하지만 그러면 존재 의미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왜 없어? 혼자 수련할 때 사용하면 되지 않더냐. 검무를 추거나.”
“호오.”
“네가 사용하기 나름이다.”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부의 말대로 꼭 관상용으로만 둘 필요는 없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지금의 검도 함께할 수 있었다.
“부러진 다음에 새 검을 찾는 것보다는, 예비용 검을 두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다른 검객들도 그렇게 하고 있고. 뒤늦게 적응하는 것보다는 미리 적응하는 게 낫지.”
“그 말씀은 제가 싸울 일이 많다는 뜻이겠죠?”
“곡해하지 말고. 난 순수한 마음으로 준비한 게다. 너를 위해서 말이지.”
은근슬쩍 찔러보는 반호진을 향해 담현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다른 뜻은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너무 무심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일단 보겠습니다.”
스르륵.
반호진은 담현이 올려놓은 검을 들어 올렸다.
투박하게 감싸고 있던 무명천을 풀자 지금까지 사용했던 청강검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직 실용적인 측면만 강조한 듯한 무던한 검이었는데 뽑는 순간 반호진의 표정이 일변했다.
검신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어서였다.
“마음에 들더냐?”
“직접 주문제작 하신 겁니까?”
“본사에 은근히 보물이 많다. 그러나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 꽤 있지. 그중에 괜찮은 것들을 가지고 그 검을 만들었다.”
“너무 과분한데요.”
“전혀. 너는 소림지검(少林之劍)이지 않더냐. 그만한 검을 쥘 자격이 있다. 막말로 본사에서 너보다 검을 더 잘 다루는 이가 있더냐?”
살짝 부담스러워하는 반호진을 향해 담현이 웃으며 말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현재 반호진의 위상을 생각하면 지금 들고 있는 검은 절대 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현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선물한 검은 명검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지만 반호진의 진기를 온전히 다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된다.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