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장. 소림검성(少林劍星). -03
“하하. 제 잔도 받아 주시죠!”
“아, 예!”
한 잔을 비우기 무섭게 다른 이가 술을 따라 주자 서이경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받았다.
이들이 왜 이러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또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아들이 그만큼 무림이라는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걸 뜻해서였다.
“역시 염룡의 아버지라 그런지 술도 시원시원하게 드시는군요. 허허허.”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특히나 아들은 아빠를 닮을 수밖에 없지요.”
“그나저나 아들을 진짜 잘 키우셨습니다. 구양절맥을 앓고 있음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고요.”
“저라면 포기했을 겁니다. 돈도 돈이지만 자식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한다면…….”
서이경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또한 자연스럽게 서이경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서조운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만큼 모두가 서이경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제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조운이를 살려 준 건 반 공자님이거든요. 만약 반 공자님께서 찾아오지 않았다면 조운이는 지금처럼 건강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 비사는 저도 들었습니다.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고.”
“참 신기합니다. 반 대협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운명인 게지요.”
나이는 물론이고 배분도 반호진이 아래였으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반호진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반호진이 보여 준 무위가 너무나 대단해서였다.
천하십대고수들도 어쩌지 못한 인경보를 쓰러뜨린 게 반호진이었기에 모두가 말을 조심했다.
“저로서는 감사할 뿐입니다. 반 공자님과 인연이 닿았다는 사실이요.”
“서가장주님과 사이가 각별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사실 저도 어려운 분이라. 조운이의 아비이지만 구명지은을 입었다 보니 편하게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하하.”
서이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반호진과 친밀한 사이는 아니어서였다.
친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한 건 절대 아니었다.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반 공자가 어디 보통 인물입니까? 근데 그래도 서가장주님처럼 친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만나러 갈 때 눈치는 안 보시지 않습니까?”
“그게 엄청 크긴 하죠.”
각 가문의 수장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부터 신룡이라 불리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던 인물이 반호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후기지수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하하.”
서이경 역시 그걸 알기에 멋쩍게 웃기만 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였다.
“서가장주님. 혹시 생각해 두신 혼처가 있으십니까?”
“혼담이 많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막내아들에게요.”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서조운으로 넘어갔다.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 좋은 얼굴이었던 수장들의 눈빛에 경쟁심이 떠올랐다.
“따로 생각한 곳은 없습니다. 못난 아비인지라 혼사 가지고 이래라저래라할 자격이 없기도 하고요. 장남이 아니다 보니 막내가 원하는 처자가 있다면 반대하지 않고 허락할 생각입니다.”
“듣기로는 삼 공자의 꿈이 삼처사첩이라고 들었습니다.”
“흠흠! 저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듣긴 들었습니다.”
서이경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사실이어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구양절맥을 치료하기 전까지 늘 고통 속에서 살았고, 집에서 나가 보질 못했기에 살고자 하는 의지를 되새기고자 그런 꿈을 품은 듯했다.
“반대하시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막내의 인생이지 않습니까. 너무 과하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적당하다면, 능력이 된다면 크게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오!”
서이경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일단 서이경은 혼담에 관대할 것 같아서였다.
넘어야 할 관문이 두 개인 것보다는 하나인 게 훨씬 낫기에 모두가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막내가 아무나 만나지는 않을 겁니다. 원체 똑똑한 아이라서요.”
“삼 공자가 똑똑한 건 모두가 잘 알고 있지요. 문무겸전의 인재이지 않습니까.”
“하하. 그래서 말인데 삼 공자와 함께 본문에 한번 찾아와 주십시오. 정식으로 두 분을 초대하겠습니다.”
모두가 눈치를 볼 때 예가장주가 선수를 쳤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다 아는데 언제까지고 눈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였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말처럼 때로는 일단 질러 볼 필요가 있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막내가 현재 숭산에 머물고 있어서요.”
“하면 다 같이 오시지 않겠습니까?”
예가장주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눈을 반짝였다.
서조운과 함께 반호진, 선우방,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이 온다면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어서였다.
원래는 서조운이 목표였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또 몰랐다.
서조운이 아니라 반호진과 맺어질 수도 있었기에 예가장주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예가장에 가기 전에 본가에 들르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본문이 더 가깝습니다!”
예가장주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 모습에 서이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서조운은 몰라도 다른 일행들은 그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였다.
일단 반호진부터가 불가능했다.
“어, 저기…….”
그래서 힘들다고 말을 하려는데 누구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느새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어서였다.
“지금 뭐라 했소이까!”
“본문을 무시한 거요?!”
“허어.”
고성을 넘어 삿대질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 서이경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이들이 어린아이처럼 목소리를 높여서 싸우자 한숨이 절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서이경도 이와 비슷하게 행동했을 터였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볼까 싶기도 하고.’
당혹스럽고 곤란했으나 한편으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이 모든 게 다 서조운이 잘 자라 주어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서이경은 언제 한숨을 내쉬었냐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잘 자라다오.’
반 정도 남은 술을 천천히 들이켜며 서이경은 반호진과 함께 앉아서 웃고 있는 막내아들을 바라봤다.
안주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여기는 태풍의눈이로구먼. 죄다 눈치만 보고 있어.”
“팽 가주님.”
“너무 싫은 티를 내는 거 아냐?”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군요.”
팽만철이 피식 웃었다.
언제 봐도 지나치게 솔직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게 반호진의 매력이었다.
그에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가 없었기에 팽만철은 그냥 웃으며 넘겼다.
“뭐야? 왜 술이 없어?”
“마시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런 날에는 한 잔 걸쭉하게 걸쳐 줘야지. 죽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저 대신 많은 분들께서 마셔 주고 있지 않습니까.”
“어이쿠. 이런 재미없는 것들.”
반호진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 역시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는 모습에 팽만철이 혀를 찼다.
풍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였다.
“술이 드시고 싶으시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됩니다. 예를 들면 개방주님이 계신 곳요.”
“거기는 재미가 없어. 난 이왕이면 젊은 피가 있는 곳에서 놀고 싶다고.”
“그럼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시죠.”
“거기도 재미없어. 죄다 내 눈치를 보거든.”
“호오. 알고 계시는군요?”
반호진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워낙에 제멋대로이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라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알고 있어서였다.
“뭐야?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 거라 생각한 거야?”
“예.”
“허어.”
예의상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데도 직언을 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팽만철이 탄식을 흘렸다.
그렇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다른 이는 몰라도 반호진은 그를 이렇게 대할 자격이 있었다.
“그보다 가주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안 가기로 했다. 굳이 대막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내 몫은 다했다고 생각하거든.”
“그렇군요.”
“남궁세가도 마찬가지다. 아마 대막에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중심이 되어 갈 듯싶다.”
“필요한 일이기는 하죠.”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침공을 당한 만큼 명분은 확실했다.
또한 한 번 정도는 싹을 짓밟을 필요가 있었다.
한동안은 중원침공을 꿈꾸지 못하도록 말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가만히 있다가 한 방 맞았는데 당연히 맞받아 쳐야지. 내가 한 대 맞았으면 적어도 두 대는 때려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나중에 또 침공하겠다는 생각이 안 들지.”
“언젠가는 잊히겠지만요.”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꿈도 꾸지 않겠지. 그거면 충분해. 그보다, 너 왜 그랬냐?”
“무엇을요?”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까는 팽만철에게 반호진이 반문했다.
앞뒤 싹 다 자르고 말하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나와 했던 비무. 그때 봐준 거잖아.”
“맞습니다.”
“허참.”
“그때는 그럴 필요가 있었거든요.”
“나를 위해서냐?”
팽만철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살짝 기대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아니요. 저를 위해서였습니다. 너무 유명해지면 불편해지니까요.”
“너도 참 평범하지만은 않아.”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것도 아나? 너한테 새로운 별호가 생겼다는 거.”
“새로운 별호요?”
반호진은 물론이고 조용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일행들도 귀를 기울였다.
이 소식은 다들 처음 듣는 것이었기에 하나같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여러 개가 거론되고 있는데 그중에 검성(劍星)이 가장 유력해. 네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별호지.”
“검성이라.”
“왜?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팽만철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 지금의 표정이 신룡이라는 별호가 생겼을 때와 비슷해서였다.
그때도 반호진은 딱히 기뻐하지도, 만족하지도 않았었다.
“소림검성!”
“나는 괜찮은데?”
“저도요.”
탐탁지 않은 표정의 반호진과 달리 서조운, 선우방, 정이륭은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신룡보다는 훨씬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왕의 칭호가 붙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단위가 죽어서 한 자리가 공석이기에 당연히 반호진이 그 자리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검성이면 그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다들 한 가지 간과하신 것 같은데, 검성이라는 별호는 천하십대고수에 넣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어라? 듣고 보니 그러네.”
“허!”
사마의성의 말에 일행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울린다고만 생각했지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기에 다들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특히 모용척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적장을 베는 가장 큰 공을 세웠는데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였다.
“천하십대고수라는 게 뭔 의미가 있어? 진짜 천하십대고수도 아닌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할 말이 없네.”
사실이기에 팽만철은 입맛을 다셨다.
천하십대고수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칭호인지 철혈성과의 전쟁을 통해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기에 팽만철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쪽팔렸다.
무림십왕이라고, 천하십대고수라고 반호진 앞에서 거들먹거리던 게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아직 전쟁 안 끝났습니다.”
“구천문이 남아 있기는 하지.”
“방천문주님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천하십대고수 중 공석인 자리를 차지하느냐고 물어보는 거지?”
“예.”
반호진의 질문에 정이륭이 귀를 쫑긋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부인 상일기가 거론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