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장. 대막일패(大漠一覇). -03
창군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권패도 입을 달싹거렸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자신은 있고?”
“광랑을 잡은 건 대단하나, 아직 저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방심이라는 운도 따랐을 테고요.”
“훗.”
인경보의 실소에 창군은 물론이고 다른 대전사들도 눈을 껌뻑였다.
실소에 비웃음이 담겨 있어서였다.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뿐이었기에 여섯 명 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 성주님?”
“됐다.”
떨리는 목소리로 창군이 물었으나 인경보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이 대화를 끝내 버렸다.
그러고는 어느새 가까워진 상대 쪽 진영을 보다가 사인교에서 내려왔다.
“얼굴 한 번 보기 참 힘들구려.”
“그대는 어제 온 걸로 알고 있는데.”
“흘흘! 철혈성주가 이렇게 깐깐한 성격인 줄은 몰랐소이다.”
마중 나오듯 모습을 드러낸 개왕을 지나 인경보의 시선은 남궁호, 팽만철, 상일기를 차례대로 훑었다.
그러나 정작 생각했던 인물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비겁한 것보다는 낫지.”
“허어. 비겁이라니. 팔흉과 산적들을 끌어들인 성주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거기에 암살자까지 보냈지요.”
팽만철이 은근슬쩍 개왕의 말을 거들었다.
팔흉과 산적들도 그렇지만 가장 뼈아픈 피해는 바로 야밤의 암습이었다.
그걸 팽만철은 슬쩍 거론했다.
“당한 놈이 병신이지.”
“그럼 어제 당한 식량털이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겠군.”
“도왕이 무공수련은 안 하고 주둥아리 수련만 한 모양이야.”
“같이 했지. 크하하하!”
인경보를 더욱 도발하기 위해 팽만철이 일부러 과장되게 웃었다.
별거 아닌 내용임에도 폭소를 터트렸던 것이다.
그러나 팽만철의 이죽거림에도 인경보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눈살을 살짝 찌푸린 게 다였다.
부르르르!
대신 대전사들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 댔다.
인경보의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팽만철을 천참만륙 내겠다는 듯이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팽만철도 만만치 않았다.
대전사들의 살기 어린 눈빛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배를 잡고 웃었다.
“이렇게 앞으로 나온 걸로 보아 할 말이 있는 듯한데. 혹시 휴전을 하자고 온 것이오?”
“그게 그쪽이 바라는 것인가?”
인경보가 비릿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말하는 투가 휴전을 원하는 듯해서였다.
“전혀. 우리는 휴전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휴전은 없다.”
“그럼 왜 나왔지?”
“불필요한 피를 흘릴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 어차피 이 전쟁의 승패는 우리 손에서 결정이 날 테니까.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한다. 너희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총 일곱 명이 나서서 일대일로 싸워 패배하는 쪽이 물러나는 거다.”
“이제 와서? 그리고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남궁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엇비슷한 상황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건 백도무림 쪽이었다.
사막으로 인해 보급이 원활하지 않는 철혈성과 달리 이곳은 백도무림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조금 밀리기는 하나 다른 곳들의 지원을 받으면 이 정도 수세는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었다.
“안 그러면 다 죽을 테니까. 천하십대고수 넷이 죽는 것보다는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나을 텐데.”
“거짓말을 하고 있군.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질 것 같으니까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 아니더냐.”
“내가?”
인경보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기도를 드러냈다.
남궁호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후아아앙!
순식간에 사방을 찍어 누르는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남궁호는 물론이고 비아냥거리던 팽만철의 표정도 싹 변했다.
둘 다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개왕과 상일기, 조금 떨어져 있던 일우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천하십대고수라 불린 후 이렇게 누군가에게 압도된 적이 없었기에 다들 눈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강할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모두가 동시에 비음을 흘렸다.
“나는 너희들에게 아량을 베풀어 주고 있는 거다. 여기서 전부 죽이면 시시하니까 전력을 재정비해서 오라고. 그런데도 이 자리에서 죽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우리만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구려. 성주가 죽을 수도 있소이다.”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 봐. 근데, 못 할 거 같은데. 아니면 넷이서 동시에 달려들 생각인가? 자존심을 굽히고?”
인경보가 개왕과 세 사람을 보며 이죽거렸다.
과연 그럴 수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못 할 것도 없지. 무인 대 무인의 대결이 아니라 전쟁이니까.”
“역시 역사적으로 비겁한 족속들다워. 과거 마교주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협공해서 많이 죽였었지.”
남궁호와 팽만철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어서였다.
대신 둘은 인경보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럼 협공을 당해도 불만은 없겠소이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 난 피하지 않으니까.”
“성주가 먼저 말한 것이외다.”
“아니지. 난 아량을 베풀었는데 너희들이 걷어찬 거지. 피를 덜 흘리는 방법도 있는데. 아, 깔끔하게 피를 아예 안 흘리는 방법도 있군. 너희들이 항복하면 돼. 그럼 모든 게 말끔히 정리가 되지.”
꾸우욱!
팽만철, 남궁호와 달리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개왕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었다.
지금의 발언만은 그도 받아넘기기가 힘들어서였다.
알아서 굴복하라는 말에 개왕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소이다.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봅시다.”
쿠우우우!
개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궁호, 팽만철, 상일기가 기도를 드러냈다.
거기에 뒤쪽에 머물러 있던 일우도 가세했다.
아직 달라진 몸에 완벽히 적응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태였기에 함께 싸우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남파의 장문인인 성중경도 당연하다는 듯이 합류했다.
“성주님께 가기 전에 우리부터 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끝장을 내 보자고.”
인경보의 앞으로 창군과 권패를 비롯한 대전사들이 섰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말이다.
하나같이 단단히 각오한 듯한 얼굴에 개왕과 남궁호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물러날 수 없다.’
뒤섞인 살기로 인해 돌풍이 몰아치는 걸 느끼며 남궁호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정도로 인경보가 보여 주는 기도는 압도적이었다.
법왕이나 검왕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든 잡는다.’
동시에 중원무림이 얼마나 평화에 취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자기들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걸 몸으로 깨달으며 남궁호는 애검 창천을 움켜쥐었다.
-목표는 철혈성주다. 대전사들에게 너무 힘 빼지 마.
-알고 있네.
-그럼, 살아서 보자고.
쑤아아앙!
성급한 성격답게 팽만철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참격을 뿌리며 달려들었다.
목표는 대전사들 뒤에 있는 인경보였다.
쿠르르릉!
팽만철이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개왕과 상일기도 움직였다.
앞서 뛰어나간 팽만철과 마찬가지로 목표는 인경보였다.
“어리석은 놈들.”
“네놈들은 우리 선에서 끝난다!”
오로지 인경보만을 노리고 돌진하는 네 명을 향해 대전사들이 비웃었다.
속내가 너무 빤히 보여서였다.
어떻게든 자신들을 뚫고 인경보에게 가려는 게 보였기에 그들로서는 막기만 하면 되었다.
콰콰콰쾅!
이윽고 열 명의 주변에서 굉음과 폭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하늘이 뒤흔들리고 땅이 진동했다.
“차합!”
거기에 일우와 성중경, 그리고 각 파의 장로들이 가세하자 철혈성의 장로들과 호법들도 몸을 날렸다.
대전사들의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게 막아서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격돌한 주변이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물러나!”
“휩쓸리지 마라!”
그 광경에 철혈성은 물론이고 백도무림의 무인들 역시 점차 뒤로 물러났다.
자칫 잘못해서 휩쓸리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아서였다.
고수들의 싸움에 하수들이 끼어들면 방해밖에 되지 않았기에 양 측은 아예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반호진 일행도 있었다.
“철혈성주!”
어제보다 훨씬 더 격렬한 전투 속에서 남궁호가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그런 그의 신형은 대전사들을 순식간에 넘어 인경보에게 나아갔다.
개왕과 상일기가 만들어 준 틈을 타 인경보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우윳빛 기운에 휩싸인 남궁호는 신검합일의 경지를 보이며 인경보를 찔러 갔다.
“흥.”
하지만 한줄기 섬광처럼 쇄도하는 남궁호를 보고도 인경보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걸 직접 증명했다.
뻐어어엉!
인경보의 오른손이 도병을 잡은 순간 눈부신 섬광이 번뜩였다.
동시에 가슴이 사선으로 베인 남궁호가 피를 토하며 처참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평생 동안 쌓아 온 정수가 담긴 일검을 인경보가 너무나 쉽게 파훼한 것이었다.
“남궁가주!”
그 모습에 개왕은 물론이고 팽만철이 경악했다.
염왕이라 불리는 남궁호가 단 일 초에 무너질 줄은 몰라서였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무위에 상일기와 일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운이 좋군. 진짜 갈라 버릴 생각이었는데.”
“크, 크윽!”
한눈에 봐도 깊은 상처를 입은 남궁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싸울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지혈도 되지 않는 모양인지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모습에 개왕이 어떻게든 다가가려 했으나 창군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인경보가 하는 일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악착같이 개왕을 물고 늘어졌다.
“주군!”
“가주님은 우리가 지킨다!”
그때 남궁세가를 상징하는 청의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남궁호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자 어떻게든 그를 구하고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황급히 다가온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로들조차 인경보의 일도를 버티지 못했다.
투둑. 투두둑.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던 이들이 고깃덩이로 변하는 모습에 남궁호의 동공이 멍해졌다.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피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하자 남궁호의 두 눈에 핏발이 서며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노옴!”
남궁호가 울부짖자 가슴의 상처 부위에서 피가 솟구쳤다.
가까스로 지혈되어 있던 상처가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남궁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피를 뿜어내면서 인경보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남궁가주!”
악에 받친 얼굴로 달려가는 남궁호를 개왕이 간신히 밀어냈다.
그러고는 날아오는 인경보의 참격을 향해 타구봉을 휘둘렀다.
개방주만이 익힐 수 있는 타구봉법을 극성으로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인경보의 도격은 봉강(棒罡)을 단숨에 분쇄하고도 힘이 남았는지 그대로 개왕에게 쇄도했다.
터어엉!
“자, 자네는?”
섬전처럼 쇄도하는 도강에 반사적으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던 개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앞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