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장. 대막일패(大漠一覇). -02
아흉을 두 동강 낸 반호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걸 느낀 순간 도흉은 몸을 돌렸다.
조금만 더 가면, 한 발짝만 더 뛰면 서이경의 목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도흉은 포기했다.
한 발을 떼는 순간 아흉을 토막 낸 검기가 그에게 날아올 것 같아서였다.
“상황 판단은 나쁘지 않은데, 몸이 머리를 따라가질 못하네.”
“컥!”
비명과 함께 도흉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에서부터 두 다리가 잘린 채로 말이다.
베였다는 걸 느끼지 못한 모양인지 허공에 잠시 붕 떠 있다가 땅바닥에 나뒹군 도흉이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두 다리는 잃었어도 아직 두 팔은 멀쩡하기에 재차 도주하려는 것이었다.
“생존에 대한 갈망이 대단하네.”
“끄윽!”
물론 그걸 가만히 지켜볼 반호진이 아니었다.
지풍을 날려 단전을 박살 내 버린 반호진은 그대로 마혈과 아혈을 짚고는 뒤쪽으로 던져 버렸다.
천하의 도흉을 짐짝처럼 다루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말한 대로 해충을 박멸하듯 산적들을 쓸어버렸다.
“사, 살려 줘!”
“으아아악!”
사신처럼 무자비하게 죽이는 반호진의 모습에 처음에는 달려들었던 산적들이 나중에는 뿔뿔이 흩어졌다.
싸움이 아닌 학살에 죄다 도주를 택한 것이었다.
“어딜 가느냐!”
“오는 건 네놈들 마음이지만 가는 건 아니다!”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산적들을 향해 개방도들이 몽둥이를 들고 추격했다.
그 뒤를 서이경이 뒤따랐다.
지금 살려 두면 철혈성의 진영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기에 개방도들과 서이경은 악착같이 뒤쫓았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 한계가 있었다.
“이제 그만하시죠.”
“반 가까이 놓친 것 같습니다.”
오랜만의 실전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상기된 얼굴로 서이경이 말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는 장남인 서정운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도망쳤어도 철혈성에 쉽게 합류하지는 못할 겁니다. 이 근방에 개방도들이 쫙 깔려 있기도 하고, 일단은 섬서성이니까요. 섬서성은 화산파와 종남파의 영역입니다. 설사 합류한다고 해도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할 걸 뻔히 아는데 과연 철혈성에 합류할까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아마 몇 년 숨어 살 계획일 겁니다. 그마저도 쉽지는 않겠지만.”
소수라면 모를까 얼추 봐도 천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었다.
그 정도 인원이 한 번에 움직였으니 흔적이 안 남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개방도들의 숫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개방의 역량을 믿었다.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마 저 혼자였다면 지금의 반도 죽이지 못했을 겁니다.”
“더 많이 잡았을 것 같습니다만.”
겸손한 반호진의 대답에 서이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겸양이 너무 과한 것 같아서였다.
“이제 본진에 합류하죠.”
“그런데 도흉은 왜 생포하신 건지요?”
“숨겨 놓은 것들이 많아서요. 찾아서 최대한 주인에게 되돌려줄 생각입니다. 겸사겸사 수고비도 챙기고요.”
“읍! 으으읍!”
반호진의 말에 가장 나이 많은 개방도에게 들쳐 메져 있던 도흉이 발악했다.
말도 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음에도 도흉은 억눌린 괴성을 쉴 새 없이 질러 댔다.
그러나 반호진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형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자 정이륭과 사마의성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런 둘에게 서이경과 서정운을 소개시켜 준 반호진은 이내 서조운을 불렀다.
누가 뭐래도 가장 반가워할 사람은 서조운일 것 같아서였다.
잠시 후 오랜만의 가족 상봉에 세 부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직 결판이 안 났네.”
“피해는 대전사들 쪽이 커요.”
“그래 보이네.”
반호진의 시선이 빠르게 대전사들을 훑었다.
그동안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는 걸 말해 주듯 여섯 명 중 멀쩡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이들도 없었다.
상처는 상일기와 남궁호, 팽만철, 개왕도 입었고.
뿌우우웅!
그때 어제 들었던 묵직한 뿔피리 소리가 전장을 갈랐다.
상아로 만든 듯한 새하얀 뿔피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던 것이다.
그러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철혈성의 전사들이 썰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쉽게 보내 주지 않는다!”
“이번에 끝장을 내자!”
다만 백도무림의 대응은 어제와 달랐다.
하나같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어제와는 달리 지금은 쉽게 보내 주지 않겠다는 듯이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그건 상일기 쪽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하면 한둘 정도는 잡을 수 있을 듯했기에 끈질기게 붙들었다.
“흐음.”
그 모습에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순간적으로 고민이 되어서였다.
철혈성주를 생각하면 대전사들의 숫자는 최대한 줄이는 게 이득이었다.
그래서 나서려고 했는데 그 순간 물러나던 철혈성의 전사들이 상일기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앙! 쾅!
대전사들이 물러날 시간을 벌기 위해 전사들이 희생한 것이었다.
덕분에 대전사들은 무사히 철혈성주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아…….”
그 광경에 사마의성이 장탄식을 흘렸다.
조금만 더 몰아붙였으면 한둘 정도는 잡는 것도 가능할 듯싶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해서였다.
다 잡은 먹잇감을 코앞에서 놓친 기분이었기에 사마의성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러나네요.”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 이대로는 피해가 너무 크니까. 이흉과 산적들이 별다른 피해를 못 입히기도 했고.”
물러나는 철혈성의 병력을 보며 반호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결과는 그가 나서지 않고서 철혈성주를 잡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상황만 보면 그건 힘들 듯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우리가 이겼다!”
“적들이 도망친다!”
씁쓸한 반호진의 표정과 달리 진영 곳곳에서 기쁨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와는 다른 결과에 다들 승리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패배에 가까웠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다들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왜 그러세요, 형님?”
“아아. 아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보다 어때?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 본 소감이.”
다들 기뻐하는데 혼자 심각한 얼굴로 서 있는 반호진을 향해 사마의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서였다.
그 말에 반호진은 표정을 수습하며 화제를 돌렸다.
“얼떨떨해요. 많이 아쉽기도 하고요. 좀 더 잘했다면 전멸시키지는 못했어도 피해는 더 입힐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처음인 걸 감안해야지.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야. 네 나이를 생각해.”
“아직 많이 부족해요.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도 부족하고요. 산적들은 정말 예상 밖이었어요.”
어제보다 훨씬 나은 상황을 만들어 냈음에도 사마의성은 기뻐하기보다는 보완해야 할 점부터 생각했다.
타고난 향상심이 사마의성을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또한 완벽주의자에 가까웠기에 이런 어정쩡한 승리는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 잘 막아 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원래 삶은 변수의 연속이야. 그리고 네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네 능력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어서야. 그 또한 어떻게 보면 네가 부족해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잘했으니까 조금은 기뻐하도록 해. 그래야 준비할 때 힘이 나지.”
“네!”
어느 하나 틀린 말이 없기에 사마의성은 싱긋 웃었다.
완벽한 승리는 아니지만 어제보다는 확실히 나은 결과였기에 사마의성도 내심 뿌듯하기는 했었다.
자신의 손으로 지금의 결과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전투가 시작되기 전과 달리 지금은 눈동자에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
사인교에 오른 장년인, 인경보가 찬찬히 수하들을 훑어봤다.
확실히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많이 처져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말을 잡아먹기는 했으나 모두의 배를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거기다 몸 상태 또한 어제와는 달랐기에 인경보의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
“오늘은 기필코 저놈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성주님.”
“사왕의 목을 성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인경보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눈치챈 대전사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대전사들의 결연한 목소리에서 인경보는 불안함을 느꼈다.
전세가 더는 철혈성에 유리하지 않음을 대전사들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흐음.”
하지만 결의의 찬 대전사들의 눈빛과 표정에도 인경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쪽만 바라봤다.
사실 인경보는 섬서성을 점령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이 정도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고, 대전사들의 역량이라면 섬서성 정도는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중원에 천하십대고수가 있다면 대막에는 대전사들이 있어서였다.
더욱이 이번 전투에 천하십대고수 중 단 셋만 참전했기에 더더욱 쉬울 거라 예상했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넷을 잃었지.’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을 거라고는 생각했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중원무림이 아무리 평화에 취했다고 해도 오랜 시간 증명해 온 저력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을 줄은 몰랐었다.
고전하기는 해도 어렵지 않게 섬서성을 정복할 줄 알았는데 결과는 지금 이 상태였다.
“하, 한 번만 더 믿어 주십시오!”
“이번에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가끔 눈살을 찌푸리는 인경보의 모습에 대전사들이 안절부절못했다.
저러다가 어느 순간 폭발한다는 사실을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어서였다.
더욱이 지금까지 못난 모습을 보였기에 대전사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예!”
“이번에는 반드시……!”
사인교에 탄 인경보가 이제는 여섯만 남은 대전사들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하지만 누구 하나 믿음이 가지 않았다.
두 번이면 이미 충분히 기회를 주기도 했고.
“됐다.”
“서, 성주님!”
“출발해라.”
대전사들을 일별한 인경보가 수신호위이자 가마꾼인 넷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대전사들의 표정이 망연자실해졌다.
지금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스르르륵.
그러는 사이 인경보를 태운 사인교는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한데 그 위치가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후미에서 전사들을 따라가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가장 앞에 섰다.
“뭣들 해? 어서 따라가지 않고!”
그 모습을 순간 멍하니 바라보던 창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였다.
이윽고 여섯 명의 대전사들이 황급히 인경보의 뒤를 따랐다.
스윽.
사인교 위에 비스듬히 앉아서 인경보는 전방을 주시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가 움직이기 무섭게 백도무림의 진영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경보의 시선은 처음부터 단 한 곳에만 향해 있었다.
바로 젊다기보다는 앳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청년, 중원에서는 신룡이라 불리는 반호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작 스물하나에 광랑을 잡았단 말이지.”
상대 진영에는 천하십대고수가 무려 네 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인경보의 시선은 반호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개왕과 염왕, 도왕, 투왕 모두 대단한 고수인 건 분명하지만 그에게 있어 딱히 위협적인 존재들은 아니었다.
근데 반호진은 달랐다.
“신룡이 거슬리시면 제가 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