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장. 대막일패(大漠一覇). -01
반호진이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광오하기까지 한 한마디에 모두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제가 함께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 명 정도는 형님의 뒤를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괜찮아. 그리고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손님맞이는 해 줘야지. 그게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예의 아니겠어?”
걱정하는 정이륭과 달리 반호진은 여유가 철철 넘쳤다.
철혈성주라면 모르겠으나 산적들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산적이었다.
산적들 역시 그걸 알고 있었고.
애초에 지금 나타난 것도 백도무림을 심리적으로 흔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너는 이곳을 지키고 있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조심하세요, 형님.”
“오냐.”
더 이상 말해 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았기에 정이륭이 걱정을 가득 담아서 말했다.
반호진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산적들이 저렇게 나오는 데에는 따로 믿고 있는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도 지켜보고 있을게요.”
“넌 철혈성만 신경 써. 네 신경을 분산시키려고 산적들을 움직인 거니까.”
“그래도…….”
“설마 내가 고작 산적들에게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알겠어요.”
사마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또 정이륭도 있기에 사마의성은 다시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좀 이따 보자고.”
휘이익!
짧은 인사와 함께 반호진은 몸을 날렸다.
그런데 나아가는 그의 곁으로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저희들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어, 괜찮습니다만.”
하나같이 나무 몽둥이를 들고서 모여드는 개방도들의 모습에 반호진이 난색을 표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괜한 이들이 다치는 건 원치 않아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의 걱정에도 모여든 개방도들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산적 놈들 숫자가 많다지만 원래 숫자 하면 저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산적 놈들은 원래 몽둥이로 두드려 잡는 법입니다!”
“맞습니다!”
말하는 순간에도 개방도들은 빠르게 모여들었다.
특수작전조의 완벽한 임무 수행을 위해서 사마의성은 개방도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
철혈성의 정보 조직원들이 특수작전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게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인원들이 지금 반호진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뒤는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잔챙이들은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듯해 보이기에 반호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처음의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합류하겠다고 해서 꼭 다 같이 갈 필요는 없어서였다.
그래서 반호진은 가장 앞서서 산적들에게 달려갔다.
“반 대협을 따라라!”
“얼른 붙어!”
순식간에 벌어지는 거리에 개방도들도 전력으로 뛰었다.
반호진과 박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이제야 만나는구나!”
“총채주님의 복수를!”
“여기가 네놈의 무덤이다!”
“갈가리 찢어 버려라!”
잠시 후 반호진은 산적들과 마주쳤다.
혼자서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녀석들이 숫자가 많다고 다들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반호진에게야 애송이이지만 나름 강호에서는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법한 실력자들이 지금 선두에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녹림십팔채의 채주급이든 부채주급이든 반호진에게는 거기서 거기라는 점이었다.
쑤아아앙!
수십 개의 강기들과 수천 개의 검기, 도기, 부기(斧氣)들이 일제히 쏟아졌으나 정작 당사자인 반호진의 표정은 태연했다.
허공을 가득 채우는 온갖 빛들의 향연에도 반호진은 특유의 심드렁한 얼굴로 검병에 손을 가져갔다.
이윽고 반호진의 손에서 뿌려진 한줄기 섬광이 세상을 둘로 갈랐다.
쩌어어억!
무시무시한 기세로 쏟아지던 수많은 공격들이 거짓말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검기며 검강이며 할 거 없이 반호진의 일검에 모든 게 갈라지며 소멸했다.
놀랍게도 반호진의 일검이 모든 것들을 집어삼킨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기롭게 달려들던 선두의 산적 수십 명을 단칼에 양분했다.
투둑. 투두두둑!
비명을 남길 새도 없이 수십 명의 산적들은 두 토막 난 상태로 바닥에 쏟아졌다.
심지어 눈도 감지 못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 광경에 허겁지겁 반호진을 따라왔던 개방도들이 입을 쩍 벌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은 광경에 경악한 것이었다.
동시에 왜 반호진이 어째서 도왕과 염왕에게 존중을 받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천하십대고수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에 개방도들은 뒤늦게 탄성을 내질렀다.
“미, 미친……!”
“저 새끼가 이 정도였다고?”
“어, 어떻게 이런 일이?!”
한편 충격은 녹림의 산적들도 휩쓸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개방도들보다 더욱 크게 다가왔다.
개방도들이야 동료이기에 순수하게 감탄할 수 있었지만 산적들은 아니었다.
적으로서 반호진을 상대해야 했기에 다들 몸을 떨었다.
“벌써부터 그러면 쓰나. 지금부터가 시작인데.”
츠츠츠츠!
바짝 얼어붙은 산적들을 돌아보며 반호진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방금 전과 똑같은 일검이었다.
그 모습에 산적들이 대경하며 사방팔방으로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반호진의 참격을 피하고자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이까짓 거!”
“흥!”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스스로의 무공에 자신이 있는 이들은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맞받아쳤다.
이 정도 공격쯤은 받아 낼 수 있다는 듯이 호기롭게 도강이나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결과는 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쩌적!
반호진의 검에서 뿌려진 가느다란 실선은 검강이건 호신강기건 가리지 않고 베어 버렸다.
앞을 가로막는 건 무엇이든지 다 양분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이번 역시도 비명 소리 없이 수십 명이 고깃덩이로 화했다.
땡그랑. 퉁.
순식간에 반 토막 난 동료들의 모습에 몇몇 산적들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병장기를 떨어뜨렸다.
그 정도로 반호진이 보여 준 무위는 압도적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 숫자라면 제아무리 반호진이라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다들 깨달았다.
“이놈들! 멈추지 못하겠느냐!”
그때 거친 노성이 전장을 갈랐다.
동시에 일단의 무리가 반호진과 산적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스무 명 남짓한 무리였는데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이를 본 반호진의 동공이 순간 커졌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인물의 등장에 놀란 것이었다.
“어, 어라? 분위기가 좀 요상한데요?”
“그, 그러게.”
갑자기 전장에 끼어든 중년인이 아들의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반호진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장주님?”
“반 대협!”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한껏 여유를 부리던 반호진이 부리나케 이동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중년인에게로 움직인 것이었다.
“본장에서 이곳은 바로 옆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조운이도 싸우는데 가만히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왔습니다. 그러다가 산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서 왔는데 아무래도 괜히 온 것 같습니다.”
없는 전력을 이끌고 부랴부랴 섬서성으로 넘어온 서이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암만 봐도 괜히 찾아온 것 같아서였다.
“아닙니다. 와 주신 것만으로도 든든한걸요. 조운이가 정말 좋아할 겁니다. 안 그래도 장주님을 보고 싶어 했거든요.”
“허허허.”
반호진의 입을 통해서 듣는 막내아들의 소식에 서이경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편지야 주기적으로 주고받지만 그래도 직접 보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참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찾아왔는데 잘 온 것 같았다.
“남은 대화는 산적들을 정리한 후에 하죠.”
“저희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서이경의 표정이 일변했다.
언제 인자하게 웃었냐는 듯이 투지가 서린 표정에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떤 마음으로 서이경이 가솔들을 데리고 왔는지 알기에 말리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서조운이 개량한 서가장의 검술이 보고 싶기도 했고.
“저희도 있습니다!”
거기에 개방도들도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만 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그럼 청소를 해 볼까요.”
스윽.
반호진의 시선이 다시 산적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눈빛이 닿은 산적들이 하나같이 몸을 떨었다.
시선이 마주친 것뿐인데도 오금이 저려 와서였다.
특히 아무도 막지 못했던 일검이 선명하게 떠올랐기에 몇몇은 뒷걸음질까지 쳤다.
“겁먹지 마라! 놈들의 숫자는 오십 명도 안 된다!”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아! 총표파자님의 복수를 떠올려!”
“우리의 맹세를 잊었느냐!”
눈빛 한 번에 확 가라앉은 분위기에 몇몇 산적들이 악을 썼다.
이대로는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질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반호진이 강하다는 걸 모르고 온 이들은 없었다.
다 알면서도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기에 산적들은 다시 기세를 끌어올렸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도망치면 내가 더 번거로워지거든. 이왕이면 마지막까지 싸워 주었으면 해. 그래야 이참에 제대로 박멸하지 않겠어?”
“쳐!”
“죽여!”
“공격해!”
대놓고 무시하는 반호진의 말에 산적들이 격분한 얼굴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다들 방향들이 묘했다.
말은 반호진을 오체분시할 것처럼 하면서 정작 달려드는 산적들은 없었다.
거의 대부분이 서가장과 개방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쌔애액!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영이 있었다.
아주 작은 인영이었는데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한줄기 벼락처럼 작은 인영은 서이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딜.”
“칫!”
속셈이 훤히 보이는 움직임에 반호진이 검을 휘둘렀다.
한데 지금껏 누구도 피하지 못했던 참격을 작은 인영이 피해 냈다.
“아흉(兒凶).”
“쓰뻘! 눈치는 빨라 가지고.”
“내가 한 눈치 하거든. 도흉(盜凶)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빌어먹을!”
느긋한 반호진의 음성과 달리 땅속에서 솟구치는 인영에게서는 욕이 흘러나왔다.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도 귀신같이 알아차려서였다.
휘리리릭!
정확히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지풍을 피해 낸 도흉은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다.
아흉이 노렸었던 서이경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차합!”
그와 동시에 아흉이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도흉이 서이경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반호진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구질구질하구나.”
예순 살이 넘었음에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한 아흉을 보며 반호진이 혀를 찼다.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여서였다.
“흥!”
그러나 반호진의 비웃음에도 아흉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이든 이기면 그만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기에 아흉은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반호진을 상대로 시간을 끌 수 있는 방법만.
서걱.
하지만 그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 번쩍인다고 느낀 순간 머릿속에 새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쿵!
“아, 아흉!”
반호진에게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양분되어서 허물어지는 아흉의 모습에 도흉이 대경실색했다.
설마하니 천하의 아흉이 저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라서였다.
심지어 아흉은 팔흉 중에서 경신술이 가장 뛰어난 이였다.
그런 아흉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절명하자 도흉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려 퍼졌다.
‘조, 좆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