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장. 반격의 시작. -03
“투왕은 역시 빠진 건가?”
오늘은 말을 타지 않은 창군이 애병을 늘어뜨리며 히죽 웃었다.
호리호리한 대막인들과는 다르게 팽만철과 비슷한 거한이라서 그런지 말만 하는데도 위압감이 상당했다.
“팔이 잘렸으니 안 나올 만하지. 나와 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그럼 동귀어진이라도 해야지.”
상일기와 겨루었던 권패의 말에 창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일문의 수장인데 이렇게 내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걱정하지 마. 나중에 팔이나 목을 자를 땐 나올 테니까.”
대전사들의 이죽거림에 팽만철이 지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입심이라면 그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았다.
“우리의 목을 자르겠다고? 셋이서?”
“왜 셋이라고 생각하지?”
스스슥!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창군을 보며 남궁호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 순간 그의 뒤로 열댓 개의 그림자가 솟구쳤다.
바로 종남파의 장문인을 비롯한 장로들이었다.
거기에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의 장로들 역시 있었다.
“호오. 숫자로 밀어붙이겠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늘어나는 인영들을 보며 권패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무인도 아니고 천하십대고수였다.
상일기는 아직 천하십대고수에 들지 못했다고 하나 실력만 따지면 이미 천하십대고수급이었다.
한데 그런 이들이 협공을 하겠다고 하자 권패는 물론이고 창군과 대전사들이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쟁이니까. 이기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놀랍군. 염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도왕은 진짜 예상 밖이고.”
권패의 시선이 남궁호를 지나 팽만철에게로 향했다.
남궁호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팽만철은 진심으로 의외였다.
“일대일로도 자신 있지만,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다.”
“뭐, 좋아. 전략적인 선택은 필요한 법이니까.”
“암습에 기습까지 한 놈들이 그런 말을 하니까 웃기는데.”
“우리는 좀 달라. 성주님께서 너희들을 괴롭히길 원하셨거든. 우리는 그저 그 지시에 따른 것뿐이고.”
팽만철의 도발에도 권패는 넘어가지 않았다.
여러 세력이 연합한 백도무림과 달리 철혈성은 한 명의 절대자가 통치하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철혈성주의 말이 곧 법이었다.
“괴롭히고 싶었다라.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남궁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고작 이런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일었다.
동시에 철혈성주가 자신들을 어찌 생각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근데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러니까.”
스스스슥!
창군의 맞장구가 끝나기 무섭게 대전사들의 뒤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세 사람의 뒤로 장로들이 가세하자 철혈성 쪽에서도 그에 비견되는 무인들이 합류한 것이었다.
하나같이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는데 얼굴과 달리 몸은 젊은이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인지 보면 알 수 있겠지.”
“장담컨대 우리일 거다.”
“흥!”
남궁호와 권패의 대답에 팽만철이 콧방귀를 뀌었다.
동시에 그의 거패도가 허공을 절단 낼 기세로 휘둘러졌다.
초반부터 강하게 나갔던 것이다.
이미 어제 한 번 붙어 봤기에 전초전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팽만철은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갔다.
“죽어라!”
“오늘은 우리가 이긴다!”
“오랑캐 따위들이 어디서 감히!”
시작을 끊은 팽만철의 뒤를 하북팽가의 장로들이 뒤따랐다.
하나같이 어제와는 다르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종남파와 남궁세가의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제와 다른 결과를 만들겠다는 듯이 다들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콰콰콰쾅!
이윽고 그들의 주변이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일반 무인들과는 격이 다른 수준의 무인들이었기에 여파 역시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대전사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싸우는 것과 달리 백도무림 쪽은 어느 정도 진영을 구축하고서 싸웠다.
합격진까지는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도와줄 정도의 간격은 유지했다.
“큭!”
“흐읍!”
그리고 그 차이는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초반의 기세등등하던 대전사들의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우세할 줄 알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결과는 달랐다.
의외로 상대 쪽의 손발이 잘 맞는 모습에 대전사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미 늦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백도무림 쪽이 한발 더 빨랐다.
대전사들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과 동시에 팽만철을 위시로 남궁호, 상일기에게서 가공할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세 사람의 참격이 대전사들이 아닌 노인들에게로 뿜어졌다.
상대적으로 약한 이들을 세 명이 노린 것이었다.
촤아아악!
부지불식간에 뿌려진 강력한 참격에 장로나 호법급이라고 할 수 있는 노인들이 쓸려 나갔다.
철혈성에서는 나름 방귀깨나 뀌는 고수들이었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또 전조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공격했기에 죽은 이는 없었으나 대부분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노인들의 모습에 창군이 살기를 번뜩였다.
당한 만큼 갚아 줘야 하는 성미이기에 그 역시 성중경과 장로들을 향해 일격을 날렸다.
진기를 가득 실어 무지막지한 찌르기를 펼쳤던 것이다.
그 뒤로 다른 대전사들이 합세하자 남궁세가, 하북팽가, 종남파의 장로들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물러나지 마!”
“버텨!”
다만 철혈성과 다른 점이 있다면 힘을 합쳐서 막아 내려 한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흥!”
그러나 대전사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숫자는 비슷할지 모르나 고수의 질은 자신들이 우위에 있었다.
그 점을 대전사들은 십분 활용했다.
게다가 진영을 구축하고 있는 백도무림과 달리 철혈성은 사방에서 날뛰고 있었기에 병력 수급도 용이했다.
콰아아앙!
“흘흘흘! 이거 오래 살고 볼 일이구려. 두 사람이 협공을 하다니.”
그때 철혈성 진영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동시에 노쇠한 목소리가 전장을 갈랐다.
격렬한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목소리가 말이다.
그런데 그 음성에 남궁호와 팽만철의 얼굴이 밝아졌다.
“방주님!”
“대화는 일단 싸움을 끝내고 합시다.”
반색하며 외치는 남궁호에게 노인이 주름 가득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동시에 그의 양손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궁호와 팽만철, 상일기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는 강맹한 강기가 삽시간에 전장을 휩쓸었다.
“호오. 개왕(丐王)께서 와 주실 줄이야.”
“저분이 개방주님이신가요?”
노인의 등장은 반호진도 알아차렸다.
거리가 상당했음에도 워낙에 풍기는 기운이 강렬했기에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기꺼웠다.
안 그래도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개왕이 가세한다면 균형을 맞추는 걸 넘어 우위를 점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콰콰콰쾅!
그 사실을 증명하듯 개왕이 가세하기 무섭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단 한 명이 합류했을 뿐인데 대전사들은 좀처럼 나오질 못했다.
막대한 공력으로 쏟아붓는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에 대전사들이 속절없이 밀려났다.
하나하나가 강환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보니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맞아. 지금 펼치는 건 강룡십팔장이고.”
“우와…….”
살벌한 기세로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강기에 사마의성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강룡십팔장이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저렇게 극성에 이른 강룡십팔장을 보는 건 처음이어서였다.
심지어 개방의 최고수가 펼치는 강룡십팔장이었다.
그렇다 보니 사마의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쪽은 이제 안심해도 되겠다.”
“기세를 탄 것 같아요.”
“맞아. 경험과 공력만 따지자면 방주님께 비할 무인이 드물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체력이지만 경험이 많으시니 방주님께서 알아서 잘하실 거야.”
개왕의 나이는 여든이 넘었다.
육체적인 전성기는 진즉에 지났고, 이미 노쇠할 대로 노쇠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개왕도 알고 있는 만큼 전투를 길게 끌고 가지는 않을 터였다.
“다른 곳의 상황도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아요. 우세한 건 아니지만 일단 계획대로 잘 막고 있어요.”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 하나뿐이네.”
“네. 철혈성주요.”
반호진과 사마의성의 시선이 똑같은 곳으로 향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인교에 앉아 있는 장년인에게로 말이다.
대전사 넷을 잃었기에 직접 나서지 않을까 싶었는데 철혈성주는 여전히 후미에서 전장을 지켜보기만 했다.
“식량에 문제가 생겼는데도 움직이지 않는단 말이지.”
“무언가 믿고 있는 게 있을까요?”
“우선적으로 자기 실력을 믿고 있겠지. 대막을 일통한 지배자니까.”
“그렇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어요. 식량을 전부 훼손시켰으니까요. 말도 마찬가지고.”
괜히 사마의성이 목창으로 말을 노린 게 아니었다.
철혈성에게 있어 최후의 식량이 말이었기에 일부러 사전에 숫자를 줄여 버렸다.
물론 대막에서 어느 정도 보급을 받기는 하겠으나 백도무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더 의문이지. 장기전으로 가서 좋을 게 없는데. 따로 보급로가 있다면 모를까.”
“철혈성에 붙은 곳이 있을 수도 있어요. 구천문의 경우처럼요.”
“그럴 수도 있지.”
이미 하오문과 금가장에서도 손을 뻗은 전적이 있는 게 철혈성이었다.
그런 만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반호진도 그쪽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있었고.
“우아아아!”
“복수의 시간이다!”
그때 후방에서 고함 소리와 수백 개의 기척들이 느껴졌다.
남쪽에서 상당한 숫자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 소리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사마의성과 주변에 있던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산적?”
“믿고 있던 게 팔흉의 나머지와 산적들이었나.”
생각지도 못한 변수의 등장에 놀라는 사마의성과 달리 반호진의 신색은 담담했다.
예상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기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주어서 마음이 편했다.
만약 산적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의심으로 인해 신경이 많이 쓰였을 텐데 이렇게 나타나 주자 반호진은 오히려 웃었다.
“숫자가 꽤 많아요. 최소 천 명 이상이에요.”
무표정한 반호진과 달리 사마의성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 짧은 사이에 대략적으로나마 숫자를 파악했던 것이다.
산적들인 만큼 고수라고 할 만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문제는 숫자였다.
적어도 천 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 인원에 사마의성은 물론이고 지치거나 다쳐서 숨을 고르고 있던 예비 병력들도 긴장했다.
“형님!”
그리고 정이륭이 달려왔다.
근처에 있었는지 산적들의 등장에 헐레벌떡 뛰어왔다.
“뭘 그렇게 급하게 뛰어와?”
“저도 같이 싸우겠습니다!”
“너는 의성이 곁에 있어 줘.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정이륭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어째 말하는 투가 혼자 가려는 듯해서였다.
그 기미를 사마의성도 느낀 모양인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사마의성이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예전에 청홍쌍흉을 혼자서 처치했다고 하나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청홍쌍흉만 상대하면 됐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진격해 오는 산적들의 숫자가 천 명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사마의성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 숫자는 의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