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장. 반격의 시작. -01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남자라면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파아아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우의 전신에서 자색 빛이 솟구쳤다.
화산파의 최강절학이자 장문인만이 익힐 수 있다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을 극성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동시에 반호진을 향해 무자비한 무형검강이 쏟아졌다.
무형강기로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펼친 것이었다.
콰콰콰쾅!
보이지 않는 매화들이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며 쉴 새 없이 반호진에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단 하나도 반호진의 몸에 적중하지 못했다.
팔짱을 끼고 있는 반호진을 감싸고 있는 호신강기가 견고하게 일우의 무형검강을 받아 내고 있어서였다.
웅웅웅!
그리고 반호진도 가만히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봤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반호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기류가 일어나 일우의 무형검강들을 밀어냈다.
단순히 기파만으로 무형강기를 밀어 버렸던 것이다.
“흥!”
그 모습에 일우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진기를 가일층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키이잉! 키이이잉!
이윽고 허공에서 본격적으로 영역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우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자색의 기류와 반호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금광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무형검강들도 끊임없이 상대방을 노렸다.
꽝! 꽈앙! 꽈광!
치열하게 뺏고 뺏기는 공방은 박빙이었으나 표정은 사뭇 달랐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얼굴이 일그러지는 일우와 달리 반호진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이 정도인가.’
무형검강들을 조종하고 있었으나 반호진은 여유로웠다.
일우는 이번 대결이 자신에게 무조건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내공적인 부분에서는 분명 일우가 앞서 있었으나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와 반호진 역시 내공수련에 공을 들였고, 영약도 먹으면서 전생 때 수준에 가깝게 회복했다.
그리고 기세검도 대결은 축적한 공력의 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얼마나 세밀하고 정교하게 진기를 통제하고 다룰 수 있느냐였다.
힘만 세다고 해서 능사가 아닌 것처럼 가지고 있는 힘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위력은 천차만별이었다.
꽝! 꽝! 꽝! 꽝!
그걸 반호진은 직접 보여 주고 있었다.
공력은 부족할지 모르나 다루는 기술만큼은 자신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자하신공과 이십사수매화검법은 분명 대단한 무공이지만 반호진이 익힌 무상대능력과 달마삼검 역시 꿀리지 않는 무공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건 무공을 얼마나 심도 깊게 익히고 이해했느냐였다.
“이익!”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었다.
일우 역시 최선을 다해 무공을 수련했겠지만 반호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존재였다.
더욱이 죽기 전에 이미 일우를 능가했던 무인이기도 했고.
일우가 자기만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완성한 절대고수라고 하나 반호진 역시 천하를 호령했던 무인이었다.
퍼퍼퍼펑!
그 사실을 증명하듯 일우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고 있었다.
반호진의 무형강기가 야금야금 그의 영역을 빼앗아 가고 있어서였다.
그게 일우는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고작 스물한 살의 핏덩이가 이만한 검예를 보여 준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큭!”
그러나 일우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그의 몸에 상처가 늘어나고 있어서였다.
반면에 반호진의 주위는 평온했다.
무형검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의 주위와는 달리 반호진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마치 하수를 내려다보는 듯한 반호진의 시선에 일우가 결국 이성을 잃었다.
어제는 왼팔을 잃었고, 밤에는 암살 시도까지 있었다.
거기에 한참이나 어린 반호진에게 농락까지 당하고 있자 일우는 눈이 뒤집혔다.
하지만 평정심을 잃은 검객의 검은 잠시 강력해질 수는 있어도 날카롭지는 않았다.
뻐어어엉!
더욱이 장기전이라면 모를까 단기전이라면 내공적인 부분에서 크게 밀릴 것도 없기에 반호진은 일우의 파상공세를 모조리 튕겨 냈다.
일우가 순간적인 힘에 집중했다면 반호진은 오로지 기술과 기교로 맞받아쳤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일우를 제대로 써먹으려면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반호진은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여 주었다.
푸스스스…….
무형검강은 물론이고 일우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자줏빛 기운이 빠르게 흩어져 갔다.
대신 반호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광은 점점 더 세력을 확장해 갔다.
저벅저벅.
반호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천천히 일우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무상대능력으로 발산되는 금광은 더욱 강렬해졌고, 일우가 받는 압박감의 강도 역시 높아졌다.
“끄으으읍!”
하지만 그럼에도 일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승부라는 건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막판에 결과가 뒤집어지는 게 승부였기에 일우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는 마지막 한 수를 준비했다.
반호진이 방심한 순간을 노리며 회심의 일격을 은밀히 남겨 두었던 것이다.
‘지금이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반호진이 코앞에 도달했을 때 일우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반호진의 발밑에서 한줄기 검강이 솟구쳤다.
땅 밑에 숨겨 두었던 무형검강이 반호진의 사타구니를 향해 솟구쳤던 것이다.
쩌어억!
그 결과 반호진이 갈라졌다.
정확히 반으로 양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우의 표정은 어두웠다.
두 동강 난 반호진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져서였다.
웅웅웅!
반면에 반호진이 제어하는 무형검강들은 하나같이 그의 사혈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더불어 반호진 역시 어느새 그의 면전에 도달해 있었다.
“승부가 난 것 같은데요. 더 하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더 응해 드리지요.”
반호진은 말만 하라는 듯이 말했다.
불복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언뜻 들으면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릴 텐데도 일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내가 졌다.”
“응?”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는 일우의 말에 반호진이 살짝 놀랐다.
당연히 노발대발하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서였다.
싱거울 정도로 순순히 패배를 시인하는 모습에 반호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네가 승리했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정말입니까?”
“내 비록 오만할지언정 한 입으로 두말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다.”
노기와 분함이 서려 있던 두 눈에는 허탈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따질 거리도 없는 완벽한 패배였기에 일우는 할 말이 없었다.
더욱이 이번 승부가 그에게 유리한 대결이었다는 걸 알기에 일우는 두 눈을 감았다.
어떤 결정을 하든 자신은 따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의외네요. 저는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안 되는 걸 가지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는다.”
“좋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회의를 할 수 있겠네요.”
“대책은 있느냐?”
“다 함께 찾아봐야죠. 전쟁을 혼자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은근슬쩍 뼈를 때리는 말에 일우는 입을 다물었다.
저런 식으로 나오면 할 말이 없어서였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묘한 안도감도 들었다.
반호진 정도 되는 고수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해진 것이었다.
“우선 돌아가죠.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가 처참한 몰골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겠지.”
“그걸 알고 계시네요?”
“흥.”
패배를 승복하긴 했어도 일우의 성격이 어디로 간 건 아니었다.
그저 잠시 수그러진 것뿐이었다.
일우는 그걸 증명하듯 콧방귀를 끼고는 창백한 안색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응? 뭐야? 왜 그렇게 멀쩡해?”
다시 천막으로 되돌아오자 못 보던 얼굴들이 늘어 있었다.
반호진이 일우와 함께 나간 사이 또 다른 이들이 천막을 찾은 것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일우를 보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으나 그렇지 않은 인물도 있었다.
바로 팽만철이었다.
“멀쩡한 게 이상합니까?”
“당연히 이상하지. 두 사람 성격을 내가 뻔히 아는데. 분명 개 패듯이 팼어야 정상인데…….”
팽만철이 말끝을 흐리며 일우를 바라봤다.
그가 말한 이는 당연히 일우였다.
몸이 멀쩡해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데 지금은 왼팔도 잃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일우가 자존심을 굽힐 성격도 아니니 당연히 두들겨 맞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무복이 누더기가 된 것 말고는 딱히 맞은 기미가 보이지 않자 팽만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두들겨 맞길 바란 모양이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결과를 예상한 거지.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으니까. 그렇다고 두 사람 중 한 명의 성격이 유순한 것도 아니고.”
팽만철의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다 한 성깔 했었기에 좋게 끝날 거라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행히 좋게 잘 풀렸습니다.”
“그런 모양이야. 뭐, 우리로서야 잘 마무리되면 좋지.”
“맞습니다.”
사마의성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어째서 반호진이 크게 상처 입히지 않았는지 사마의성은 알아차려서였다.
팽만철의 말대로 반호진의 실력이라면 진짜 두들겨 팰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전쟁 중이기에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왼팔을 잃었다고 하나 투왕은 중요한 전력이기에 반호진은 가급적 상처를 입히지 않은 것이었다.
꿀꺽!
반면에 어제까지만 해도 일우를 열렬히 지지했던 수장들은 장내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반호진이 이길 걸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가 이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만약 일우가 이겼다면 반호진은 결코 지금처럼 멀쩡히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을 테니까.
“회의는 어디까지 진행됐어?”
“일단 화산파는 제외하고 앞으로의 대응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화산파도 추가해.”
일우로부터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들었기에 반호진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런데 모두가 일우의 눈치를 살폈다.
전후사정을 몰랐기에 자연스레 일우의 눈치를 본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걱정에도 일우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마의성이나 일행들은 달랐다.
반호진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자초지종은 모르지만 눈치껏 상황을 파악한 사마의성은 지금까지 해 왔던 내용을 간략하게 다시 한번 설명했다.
다른 이들은 들었지만 일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르릅.
그 배려를 모르지 않았기에 일우 역시 조용히 차를 들이켜며 경청했다.
반쯤은 얼마나 대단한 대응책을 준비했는지 들어 보겠다는 심보로 말이다.
한데 의외로 사마의성이 준비한 게 탄탄했다.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분명한 건 효율적이라는 점이었다.
‘쓸 만하긴 하네.’
막힘없이 이어지는 내용을 들으며 일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새 자신이 사마의성의 말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두두두두!
오후가 되자 철혈성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말과 함께 지축을 울리며 진군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백도무림의 대응은 어제와 완전히 달랐다.
진격해 오는 걸 보자마자 달려들었던 어제와는 다르게 백도무림은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진영을 구축했다.
“크하하하! 겁쟁이 새끼들!”
“드디어 제 주제를 알았구나!”
“새벽의 암습이 맵긴 매웠나 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