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장.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 -04
팽만철의 목소리가 점차 고조되었다.
그에게 한 사과는 아니었으나 속이 시원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콧대를 완전히 눌러 준 것이었기에 팽만철은 탁자를 부숴 버릴 듯이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저보다 더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흠흠! 사실 나도 마음에 안 들었거든. 견제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팽만철이 다시 한번 찾아온 이들을 차례대로 훑어봤다.
그러자 다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스스로 한 행동이 있기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역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어.’
한편 조용히 좌중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마의성은 눈을 빛냈다.
지금의 상황을 보자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 느낄 수 있어서였다.
처음 화산파에 도착했을 당시 반호진은 유명하기는 했으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반호진을 경시했던 이들이 먼저 찾아와 몸을 낮추며 사과했다.
그리고 천하십대고수인 염왕과 도왕이 반호진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제 나만 잘하면 돼.’
사마의성이 침을 삼켰다.
어제와 달리 많은 이들이 이쪽을 선택한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사마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무림에 알릴 수 있게 되어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빛 한 점 없던 깊고 긴 동굴을 혼자 걷는 심정으로 사마의성은 지금까지 살아왔다.
언젠가는 사마세가를 다시 재건하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품고 말이다.
그 꿈이 지금 막 시작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사마의성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벅저벅.
그때 천막 밖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일부러 기척을 내는 듯한 발소리에 사마의성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다.
들리는 건 발소리일 뿐인데도 다들 누가 찾아왔는지 아는 눈치였다.
“놀랄 것 없어. 적은 아니니까.”
“아, 네.”
“그리고 옆에 내가 있잖아?”
“네!”
크게 놀란 표정이었는지 반호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한데 신기하게도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사마의성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거짓말처럼 말이다.
스윽.
이윽고 천막의 출입구가 걷히며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군데군데 희끗희끗한 장년인이었는데 그를 본 사마의성과 일행들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찾아와서였다.
“여긴 어쩐 일이지?”
“내가 못 올 곳에 온 건 아니지 않소.”
날이 서 있는 팽만철의 한마디에도 방문자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매서운 눈빛으로 팽만철을 시작으로 좌중을 둘러봤다.
한 명 한 명 다 기억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사나운 시선에 대부분의 수장들이 고개를 돌렸다.
“못 올 곳은 아닌데, 그렇다고 편히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아예 저 꼬맹이에게 붙은 것이오?”
“저렇게 무시무시한 꼬맹이도 있나?”
일우의 도발에 팽만철이 콧방귀를 뀌었다.
꼬맹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서워서였다.
일우야 철혈성주를 잡겠다고 홀로 뛰쳐나갔다가 대전사 둘을 상대하느라 보지 못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반호진이 광랑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직접 봤기에 팽만철이 가소롭다는 듯이 일우를 응시했다.
“하! 무시무시하다고?”
“사형제들에게 들은 게 전혀 없나 본데?”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팽만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호진의 실력에 대해 안다면 절대 저런 반응이 나올 수가 없어서였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들었소. 도와 달라는 사제들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딱 지에게 필요한 것만 들었네.”
“지금 뭐라 했소?”
“참 편하게 산다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것 같아서 말이지. 그리고 주둥이는 비틀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도와주러 온 사람을 먼저 개무시한 게 누구인데?”
“무시한 적 없소.”
일우가 딱 잘라 말했다.
자신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말에 여기저기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남궁호는 아예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어쩌면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화산파의 속사정에 대해 내가 훤히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럼 어제 있었던 일을 따지려고 온 건가?”
“그것도 있고, 시킬 것도 있고.”
“시켜?”
스윽.
일우는 팽만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싸늘한 눈으로 반호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의 일은 묻지 않겠다. 대신 내 밑에서 싸워라.”
“푸하하하!”
짐짓 크게 선심을 썼다는 듯이 말하는 일우의 모습에 팽만철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이런 식으로 반호진을 이용하려 할 줄은 몰라서였다.
정말 기가 막힌 방법에 팽만철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싫습니다만.”
“……뭐?”
“싫다고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럼 벌을 받겠다는 것이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벌을 받습니까?”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헛소리도 이런 신박한 헛소리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걸 한 사람이 화산파 장문인이라는 사실에 반호진은 또 한 번 놀랐다.
“잘못한 게 없다고?”
“제가 꼭 도와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목숨을 걸면서까지? 그럼 반대로 묻죠. 만약 제가 전쟁 중에 위험에 빠지면 무조건 살려 주러 올 겁니까?”
“…….”
일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장난 같은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순간 진짜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아서 잘하겠다고 저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이러는 것도 좀 웃기는 것 같습니다만.”
“정녕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이냐?”
“이런 식이냐뇨. 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말한 것뿐입니다만.”
콰우우우!
시키는 대로 해도 모자랄 판에 건방지게 말대꾸를 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일우가 결국 폭발했다.
노기 가득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노려보며 기도를 드러냈다.
오직 반호진에게만 향하게 말이다.
이 자리에는 염왕과 도왕, 그리고 두 사람 못지않은 절대고수인 상일기가 있기에 일우는 셋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해 반호진만 느낄 수 있도록 기도를 개방했다.
“흐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우의 흉계는 통하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의 실력으로는 반호진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어서였다.
그걸 알기에 상일기와 남궁호, 팽만철이 가만히 있는 것이었고.
오히려 반호진은 일우가 힘을 쓰거나 말거나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나.’
자기중심적인 일우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생에서나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 지난 생에서는 몇 번 만났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얼마 안 가 죽어 버렸지만.
웃긴 건 그때 일우를 죽인 게 철혈성주라는 점이었다.
물론 철혈성주와 싸운 건 아니었다.
대전사들과 싸우다 생포되었고, 철혈성주가 목을 날렸었다.
‘이대로 치워 버리기에는 아까운 전력이기는 하지.’
성격파탄자이기는 해도 일우는 엄연히 천하십대고수였다.
포용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실력은 확실했다.
단지 성격이 지나칠 정도로 편협적이어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을 뿐이었다.
하지만 잘만 사용한다면 확실히 좋은 패이긴 했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하나뿐인가.’
왼팔을 잃었다고 하나 투왕은 투왕이었다.
지금의 몸 상태에 적응만 한다면 멀쩡한 시절의 실력을 금세 회복할 터였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결정을 내렸다.
찌이이익!
“헙!”
비단 폭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일우가 화들짝 놀랐다.
그의 기도를 반호진이 너무나 쉽게 갈라 버려서였다.
보통이 아니라는 말을 듣긴 했으나 이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기에 일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문인과는 따로 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역시 들이받는구먼.”
자리에서 일어나는 반호진을 보며 팽만철이 키득거렸다.
역시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아서였다.
일우는 나름 은밀하게 반호진을 압박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를 비롯해서 상일기나 남궁호 모두 느꼈지만 반응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두려우시다면 어쩔 수 없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나오시죠.”
반호진은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러자 일우가 곧바로 뒤따라 움직였다.
“둘만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한 분 정도는 함께 가야 하지 않을까요?”
순식간에 천막을 나간 반호진과 일우의 모습에 몇몇 수장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세 사람이 너무 방관하는 것 같아서였다.
남궁호나 팽만철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일기마저 따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보아하니 칼부림을 한바탕 할 것 같은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호진이가?”
“예.”
“푸하하하!”
팽만철이 배를 잡고 웃었다.
진심으로 웃기다는 듯이 말이다.
근데 그건 남궁호도 마찬가지였다.
연신 피식거리는 모습에 오늘 처음 참석한 수장들이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안 되십니까?”
“걱정?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건 호진이가 아니라 투왕이야. 몸이 멀쩡해도 장담하지 못하는 판에 지금은 왼팔마저 잃었어. 지금 붙으면 백이면 백 투왕이 져. 광랑이 대전사들 중에 약한 축에 들어간다고 하나 그 광랑을 상처 하나 없이 가볍게 처치한 게 호진이야. 나는 물론이고 남궁가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가 호진이라고.”
꿀꺽!
강한 걸 알고 있었으나 팽만철이 이렇게 얘기하자 새삼 반호진의 무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옳고 그름이 누구보다 냉정하다는 남궁호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돼. 최소한 당한 만큼 갚아 줘야 하지 않겠어? 안 그래?”
“맞습니다.”
“투왕은 호진이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던 회의 계속하자고.”
팽만철의 말에 사마의성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의 말대로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에 대해서 회의를 시작했다.
초반과 달리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 모습에 서조운을 비롯한 일행들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쯤에서 하죠.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으니까.”
숙영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조금 내려온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그러자 흉흉한 기세를 숨기지 않고 서 있는 일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지를 두는 건가?”
일우가 비릿하게 웃었다.
숙영지와 가까운 곳을 선택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반호진은 일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전혀요.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저는 오히려 연장자에게 예의를 지키는 편입니다. 더욱이 부상자이지 않습니까? 부상자를 괴롭힐 정도로 저는 몰상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허!”
대놓고 붕대를 칭칭 감아 놓은 왼쪽 어깨를 쳐다보는 모습에 일우가 쌍심지를 켰다.
정말 죽일 듯이 반호진을 노려봤던 것이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것에 응대하는 대신 팔짱을 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직접적으로 검을 휘두를 생각은 없으니.”
“지금 나와 기세검도 대결을 펼치겠다고?”
“예.”
일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내기도 불안정했고.
그러나 그는 투왕이자 화산파의 장문인이었다.
때문에 지금 반호진의 발언은 그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게 일우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오만방자하단 말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장문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노기가 가득하다 못해 목소리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나 반호진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오만하기로 유명한 일우가 자신더러 오만하다고 하자 어이가 없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