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장.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 -01
반호진의 말에 사마의성이 퍼뜩 정신 차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맞는 말이었다.
후회하고 자책하는 건 분명 필요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시기였다.
무릇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었고, 지금 해야 할 건 실수를 파악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자책하고 명복을 비는 건 나중에 해도 되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네.”
“감사합니다, 형님!”
“자, 우리도 이만 정리하고 숙영지로 가자고. 휴식도 전쟁의 일부분이야.”
사마의성을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후 반호진은 장내를 정리했다.
지금이야 전쟁이 막 끝났기에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조금 뒤에 긴장이 풀리면 다들 곡소리를 낼 터였다.
그걸 경험으로 잘 알았기에 반호진은 일행들을 인솔해서 숙영지로 돌아갔다.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첫 번째 전투에서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숙영지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섬서무림 쪽과 달리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아서였다.
반면에 살짝 떨어져 있는 섬서무림 쪽 숙영지는 분위기가 심각했다.
대패에 가까운 피해에 다들 침중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가 상반되기는 하네. 근데 우리 탓이 아냐.”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자업자득이라는 사실을요. 그런데 솔직히 평제자나 일반 문도들은 시키는 대로 따른 것뿐이잖아요. 정작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은 살아 있고, 지시에 따른 이들만 죽은 걸 보니 마음이 좀 그러네요.”
“나도 그래.”
선우방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서조운과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안쓰럽다고 해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고.
“이번에 제대로 정신 차려서 두 번째 전투 때는 잘했으면 좋겠네요. 어떻게 보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셈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왜 다 이긴 전투를 마무리 짓지 않고 물러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싸웠다간 자신들의 피해도 클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밀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패색이 짙은 건 아니었으니까요. 형님께서도 제대로 나서지 않았고.”
“그건 철혈성주도 마찬가지잖아.”
“해가 지기 전에 결판을 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걸 수도 있죠.”
서조운의 시선이 서쪽 하늘로 향했다.
어느새 노을이 져서 구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도 가능성이 있는 이유이기는 하지. 일단 들어가자. 다들 와 있는 거 같은데.”
“예.”
회의실로 사용하려고 세운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선우방의 말대로 올 사람은 다 와 있었다.
선우청과 모용궁을 제외한 모두가 말이다.
“앉아.”
“우리가 늦은 건가?”
“아니야. 딱 맞춰 왔어.”
“의성이는 좀 괜찮아 보이네.”
자리에 앉으며 선우방이 사마의성의 얼굴을 살폈다.
전투 때 제 몫 이상을 해 주었음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기에 신경이 쓰였었는데 다행히 지금은 괜찮아 보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네 덕분에 본가의 피해가 적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맞아. 왜 군사나 책사가 필요한지 나도 이번에 느꼈어.”
동갑내기인 정이륭과 나란히 앉아 있던 모용척이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사마의성을 쳐다봤다.
오늘 전투로 책사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직접 느껴서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용척처럼 부담스럽게 쳐다보지는 않았으나 다들 놀라움과 감탄이 서린 눈빛으로 사마의성을 바라봤다.
“조운이는 어때? 답은 찾았어?”
“정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결론을 내기는 했습니다.”
“말해 봐.”
전투가 시작되기 전 반호진은 서조운을 콕 짚어 지시를 내렸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사마의성의 곁에 있으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문제를 냈다.
자신이 왜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 알아내라고 말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간단하게 의성이를 호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를 보는 눈을 키워 주려고 하신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흐음.”
“어, 틀렸어요?”
미묘한 반호진의 반응에 서조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 표정을 보니 정답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한데 그런 두 사람의 대화가 재미있는지 모두가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비슷하긴 한데, 정답은 아냐. 그래도 방향은 잘 잡았어.”
“어…….”
서조운이 옆에 앉아 있는 사마의성을 힐끔거렸다.
똑똑한 사마의성이라면 왠지 정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따로 반호진의 언질을 받은 게 있었기에 사마의성은 서조운을 외면했다.
“의성이 보지 말고. 너한테 답을 찾으라고 했으니 네 스스로 찾아야지.”
“으음!”
서조운이 침음을 흘렸다.
분명 그에게 필요하기에, 도움이 되기에 이런 질문을 한 걸 텐데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그래도 거의 근접하기는 했어. 내가 너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건 네가 지키는 법도 알았으면 해서야. 네 재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 그런데 넌 너무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네가 단순히 무인으로서 살 거라면 이건 문제가 되지 않아. 혼자서만 살 거라면. 그러나 네가 나중에 너의 가문을 세울 거라면 이걸 반드시 알았으면 해서 너보고 답을 구하라고 한 거야.”
“아!”
“지금까지 누군가를 지켜 가며 싸운 적이 없기도 하고.”
“그렇긴 하죠.”
서조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어서였다.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또 의성이가 위험한 것도 사실이고. 오늘은 외곽에서 싸우기도 했고, 의성이에 대해 잘 모르기에 노리는 이들이 없었지만 다음번에는 다를 거야.”
“각오하고 있어요.”
“각오한다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지. 중요한 건 어떻게든 계획한 바를 이루어 내는 거지. 형들이 지켜 주겠지만, 그래도 결국 자기는 자기가 지켜야 해.”
“명심할게요.”
전쟁은 대련이나 비무와 완전히 달랐다.
생사가 오고 가는 아수라장이 전쟁터였다.
그렇기에 사마의성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크흠! 큼!”
“험험!”
그런데 그때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일부러 인기척을 내는 듯한 헛기침 소리에 천막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출입구로 향했다.
“들어오시죠.”
“눈치챘어?”
“그렇게 대놓고 기척을 드러내고 걸어오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흠흠!”
천막을 걷어 내며 안으로 들어온 팽만철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굴에 철판을 깔겠다는 듯이 알아서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근데 팽만철은 혼자 오지 않았다.
“두 분이서 같이 오실 줄은 몰랐네요.”
“오다가 우연히 만났네.”
“우연히라.”
반호진의 시선이 남궁호를 넘어 팽추영, 팽주영 형제와 남궁광에게 향했다.
우연히 만났다고 하기에는 너무 각 잡고 온 것 같아서였다.
“우리 사이에 못 올 곳을 온 건 아니지 않더냐.”
“우리 사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함께 싸웠으면 전우 아니더냐. 그럼 충분히 우리 사이라고 할 수 있지.”
팽만철이 옆에 앉은 남궁호를 의식하며 유독 네 글자를 강조했다.
누가 보더라도 티를 확 내면서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남궁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주님이 생각하는 것과 제가 생각하는 것에는 꽤 큰 간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간극은 무슨.”
“그보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지금쯤 수뇌부 회의가 한창일 텐데요.”
“지금 상황에서 회의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팽만철이 콧김을 내뿜었다.
이곳과는 달리 분위기가 가관이어서였다.
자기 잘못은 없고 오로지 남 탓만 하는 말을 지금까지 계속 들었기에 팽만철은 짜증 섞인 한마디를 내뱉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산파 장문인은 어떻습니까?”
“정신은 차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왼팔을 봉합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나 마찬가지인 게 투왕이었기에 상일기의 어조는 싸늘했다.
그래도 상태가 어떤지는 궁금했기에 남궁호에게 물었는데 보아하니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듯했다.
“현재 화산파는 초상집 분위기입니다. 정신을 차리기는 했으나 왼팔을 잃었으니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태고. 아마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오늘 전투로 상일기의 무위를 직접 보았기에 팽만철도 말을 조심했다.
연배도 연배지만 무림은 실력이 가장 중요했다.
도왕이라 불리는 그보다 상일기의 무경이 더 높았기에 팽만철은 깍듯하게 대했다.
“장문인은 전력 외로 구분하는 게 낫겠군요.”
“본인이 그걸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싸우겠다고, 싸울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겠지. 화산파의 장로들은 안 된다고 말릴 테고. 지금 싸워 봤자 도움이 안 되기도 하고. 또 투왕을 잃을 수는 없을 테니.”
팽만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쯤 다른 회의실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가고 있을지 능히 짐작이 가서였다.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쳐 오신 겁니까?”
“도망이라니! 적어도 이곳은 쓸데없이 시간낭비하지 않고 대책을 강구할 것 같아서 온 것뿐이다.”
“팽가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대책이 나올 것 같습니까?”
“내가 아는 너라면 방법이 없어도 어떻게든 찾아낼 것 같은데. 똑똑한 인물도 있고.”
팽만철은 물론이고 남궁호의 시선이 사마의성에게 향했다.
대전사들과 싸우면서도 두 사람은 보았다.
모용세가와 선우세가가 어떻게 싸웠는지 말이다.
“의성이의 나이 이제 열여덟입니다. 한참이나 어린 후배에게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어쩌겠나.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여기 있는 이들뿐인데. 저쪽은 침몰하는 배고.”
사마의성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하나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반호진은 그 부분을 짚었는데 남궁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그 정도로 안 좋습니까?”
“심각하네.”
“그럴 시간도 없을 텐데.”
“모든 사람이 다 이성적인 건 아닐세. 오히려 감정적인 사람들이 더 많지.”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대책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보았느냐?”
“막 하려는 차에 두 분께서 오신 겁니다.”
“흠흠! 못 볼 꼴을 오래 보기 싫어서 말이야.”
“이해합니다.”
“그럼 우리도 회의를 시작하자고.”
조금 민망했던 모양인지 팽만철의 얼굴이 살짝 벌게져 있었다.
하지만 그걸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대신 모두의 시선이 반호진과 사마의성에게로 향했다.
“각자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해 보죠. 그러다가 좋은 방안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제 생각부터 말씀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사마의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의 시선이 사마의성에게로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이다.
“우리 측이 입은 피해는 상당해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어요. 철혈성이 입은 피해 역시 적지 않다는 점이에요. 일단 열 명의 대전사 중 네 명이 죽었어요. 살아남은 여섯 명의 몸 상태도 정상은 아닐 테고요. 그리고 일반 철혈성도들의 숫자도 꽤 많이 줄었어요.”
“짧은 사이에 꽤 많이 파악했군.”
“아군의 전력과 적군의 전력을 파악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