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장. 검신강림(劍神降臨). -03
“저, 저런!”
그 광경에 퉁방울만 하던 팽만철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졌다.
밀리고 있다고는 하나 저렇게 팔이 잘릴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팽만철이 대경실색하는 사이에도 투왕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왼팔이 잘려 나가는 순간에도 협공하던 대전사 둘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자, 장문인!”
“장문인을 지켜라!”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끝장을 내겠다는 기세로 달려드는 대전사들을 향해 화산파의 제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자신들을 희생해서라도 투왕을 살리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로 인해 투왕의 앞으로 수십 명의 시체가 순식간에 쌓였다.
“도, 도와주세요!”
그러나 투왕도 어쩌지 못한 대전사들을 일개 제자가 막아 내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하물며 장로들조차도 썰려 나갔는데 일대제자들이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화산파의 제자들은 주변에 도움을 청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비키거라! 내가, 내가 상대할 것이……! 쿨럭!”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제자들의 모습에 투왕이 피를 토하면서도 소리쳤다.
왼팔이 잘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싸우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투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대제자들과 장로들은 그를 만류하며 뒤로 물러났다.
우선은 치료가 먼저라고 생각했기에 화산파의 제자들은 잘린 왼팔과 함께 투왕을 붙잡고서 도망쳤다.
“흐음.”
한데 긴박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호진의 시선은 투왕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몸을 들썩이는 팽만철과 다르게 말이다.
물론 팽만철이 투왕과 긴밀한 관계라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투왕이 죽는다면 겨우 맞춰져 가는 균형이 단숨에 철혈성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걸 걱정하는 것이었다.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종남파 장문인께서 가는 중입니다. 제자들과 함께요.”
“저들로는 무리다.”
천하의 투왕마저도 어쩌지 못한 고수가 대전사들이었다.
종남파 장문인의 실력도 대단하다고 하나 대전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이었기에 버티는 게 고작일 터였다.
“정 걱정되면 가주님께서 가시죠.”
“흠흠! 넌?”
팽만철이 살짝 머뭇거렸다.
대전사들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왕이면 혼자보다는 둘이 나은 법.
더욱이 반호진의 실력을 직접 봤기에 팽만철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척하며 슬쩍 물었다.
“자기들끼리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알아서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궁가주님은 상 문주님께서 가고 싶었기에 가신 거고, 저 역시 팽가주님과의 인연 때문에 온 것뿐입니다.”
“크험! 그렇긴 해.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긴 하지.”
남들과는 다르다는 반호진의 말에 팽만철이 헤벌쭉 웃었다.
그와 남궁호 중에, 정확하게 따지면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중에 하북팽가를 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남궁호의 여식보다 자신의 딸을 우선순위에 두었다는 뜻과도 같았기에 팽만철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 그렇다고 친밀한 사이도 아니지만요.”
“허!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거냐!”
“바꾸는 게 아니라 사실이라는 겁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사실만 정확히 짚어 준 반호진이 팔짱을 끼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종남파 장문인을 넘어 초원과 사막의 경계에 우두커니 있는 거대한 사인교에 향해 있었다.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사인교 위에 앉아 있는 장년인에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철혈성주는 나서지도 않았군.”
반호진의 시선을 따라 사인교 위에 여유롭게 앉아서 전장을 주시하는 철혈성주를 본 팽만철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대전사 열 명에 섬서성에 모인 백도무림의 전력이 고전하고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어서였다.
동시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대전사들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철혈성주가 나선다면 가까스로 맞춘 균형은 한순간에 무너질 게 자명했다.
“가마꾼들의 실력도 보통은 아니네요. 수신호위 겸 가마꾼인 것 같습니다.”
“허어.”
철혈성주에만 온 신경을 빼앗겼던 팽만철이 뒤늦게 네 명의 가마꾼들을 살펴보고는 탄식을 흘렸다.
반호진의 말대로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상당해서였다.
대전사급은 아니지만 그 바로 밑의 수준이었다.
“내심 쉽게 승리하길 바랐는데.”
“자네가?”
“예. 그랬으면 제가 나서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승기를 잡았다면 저는 전장에 참전하지 않고 구경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하지 않겠나. 철혈성주가 나서기 전에 말이야.”
팽만철이 애병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좀 쉬었다고 몸에 기운이 돌았다.
공력은 큰 차이가 없지만 체력은 제법 빠르게 회복이 된 상태였다.
“허세 부리지 않고 이점을 충분히 활용했으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음번에 제대로 준비하면 되지 않나. 일단은 피해 없이 마무리 짓는 게 먼저야. 그러니 지금 당장……. 어?”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반호진을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던 팽만철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대전사 둘에게 쫓기던 화산파의 장로들이 정확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어서였다.
우연히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니라 전부 다 그와 반호진을 정확히 보고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하나뿐인 동아줄을 바라보듯이 말이다.
“흥.”
눈빛만으로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에 반호진은 코웃음 쳤다.
하지만 반호진의 기가 찬 웃음에도 화산파 장로들의 눈빛은 간절했다.
지금 믿을 건 반호진밖에 없었다.
투왕이 과다출혈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에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은 하나같이 간절한 눈빛으로 반호진과 팽만철을 바라봤다.
“도, 도와주게나!”
“반 대협!”
“팽가주님!”
반호진이 광랑을 때려잡은 걸 봤기에 장로들은 절박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광랑을 처치할 실력이면, 거기에 팽만철이라면 지금 추격하는 대전사 둘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화산에서부터 반호진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말이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바, 반 공자는 소림사의 제자이지 않나!”
“저에게 분명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까지 나설 건 없다고요. 그러니 말씀하셨던 대로 알아서 하시죠.”
“반 소협!”
냉랭한 반호진의 대답에 다른 장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나이 지긋한 장로의 간절한 외침에도 반호진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 지금의 상황은 자업자득이었다.
속된 말로 똥은 지들이 싸 놓고 그에게 닦아 달라는 꼴이었기에 반호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팽가주!”
꿈쩍도 하지 않는 반호진의 모습에 장로들은 목표를 바꿨다.
반호진에게는 할 말이 없지만 팽만철은 달라서였다.
함께 전투를 치른 전우나 마찬가지였기에 장로들은 간절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팽만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뿌우우웅!
한데 그때 멀리서 묵직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철혈성의 본진이 있던 곳에서 말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철혈성의 무리들이 썰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했다.
뿔피리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퇴각했던 것이다.
“허억! 헉!”
“사, 살았다!”
그리고 그건 화산파 제자들을 추격하던 대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뒤까지 추격했음에도 대전사 둘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몸을 돌렸다.
둘 다 의미심장한 표정과 눈빛을 남기고서 말이다.
하지만 일대제자들은 이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기뻐했다.
“뭐지? 왜 갑자기?”
죽다 살아난 화산파의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기뻐하는 것과 달리 팽만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더라도 전황은 철혈성 측이 유리했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백도무림에 막심한 피해를 입힐 수 있건만 철혈성은 도리어 물러났다.
그게 팽만철은 의아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죠. 철혈성주가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거나 혹은 따로 노리는 게 있다거나.”
“으음!”
당혹스러워하는 팽만철과 달리 반호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 말에 화산파 장로들이 반호진을 노려봤다.
한숨 돌리고 나니 조금 전의 상황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배신자를 쳐다보듯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화산파 제자들의 모습에 팽만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 역시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자기들이 한 짓은 생각하지 못하고 반호진만 탓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팽만철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화산파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을 스윽 훑어보고는 몸을 돌렸다.
“끄, 끝났다!”
“우리가 이긴 건가?”
“이기긴. 철혈성이 그냥 물러난 거지. 근데 왜 물러나는 거지?”
한순간에 우르르 물러나는 철혈성도들의 모습에 악전고투하던 섬서무림의 무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정이륭과 모용척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지금 물러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어느 곳이든 철혈성이 유리했었는데 먼저 물러나자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셈이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나쁠 거 없잖아? 전장을 수습하고 재정비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더 불안하다는 거예요. 분명 꿍꿍이속이 있는데 그걸 알 수 없으니까.”
“지금부터 그걸 알아내기 위해 수뇌부가 노력하겠지.”
선우방의 말에 모용척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나 눈치가 있고 능력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꼴이 났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사부님!”
그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일기가 다가왔다.
하지만 피에 절은 모습과 달리 정작 그의 피는 얼마 묻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저야 보시다시피.”
선우방의 물음에 상일기가 옅게 웃었다.
힘들긴 하지만 얻은 것 역시 그만큼 있어서였다.
뒤이어 선우청과 모용궁이 다가오자 상일기는 둘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열심히 수련시킨 보람이 있네. 아직 쌩쌩한 걸 보면.”
“형님!”
상일기에 이어 반호진도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전투를 치렀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말끔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런 반호진의 모습에 다들 헛웃음을 흘렸다.
반호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첫 실전은 어땠어?”
“힘들었어요. 그런데, 힘든데도 기뻤어요. 제가 노력했던 시간이, 연구했던 시간이 의미 없지 않다는 걸 알게 되어서요.”
“기뻐만 한 건 아니지? 아직 전쟁 안 끝났어.”
“물론이에요. 오늘의 경험을 밑거름으로 삼아 더 발전시키고, 개량할 거예요. 누구도 죽지 않게요.”
사마의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분명 사마의성의 활약은 대단했다.
처참하게 밀렸던 다른 전선들과 달리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피해는 미미했다.
명확한 지시로 진영을 구축했을뿐더러 주변의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며 싸웠기에 다른 중소세가나 군소방파에 비하면 피해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그렇다고 죽은 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었기에 사마의성은 자책했다.
“충분히 잘했어. 더구나 첫 실전에 이 정도면 엄청나게 잘한 거지. 네 몫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거니까 자책할 필요 없어. 차라리 그 시간에 오늘 실수한 것들을 생각하고 보완할 부분을 고민해.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죽지 않게 만들 수 있잖아?”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