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장. 검신강림(劍神降臨). -02
폭발의 중심지에서 들려오는 조소 가득한 목소리에 광랑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광랑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폭발이 가라앉은 곳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다 싶으면 도망가야지. 하긴. 그만한 안목이 있었으면 나를 혼자 상대하려 하지는 않았겠지.”
푹.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광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언제 날아온 것인지 한 자루 검이 정확히 단전을 관통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느 틈에……?”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보며 광랑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아오는 걸 보지도 못했는데 배에 박혀 있자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였다.
보통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징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없었다.
“그게 너와 나의 실력 차이다, 광랑.”
“그럴 리가 없다!”
서서히 가라앉는 먼지구름 사이로 반호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까 전과 달리 빈손으로 말이다.
그 모습에 광랑이 현실을 부정했다.
사실 배에 박힌 검을 보는 순간 광랑은 눈치챘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휘이익!
대신 배에 검을 꽂은 채로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동귀어진 할 작정이었다.
억울해서라도 혼자만 죽을 수는 없기에 광랑은 선천진기도 끌어올렸다.
어차피 죽을 거 이판사판이었다.
“동귀어진인가.”
“나와 같이 가는 거다!”
“미안하지만 난 아직 할 일이 있어서.”
지독한 살심 때문인지 살의가 유형화되어 광랑의 전신을 감쌌다.
동시에 가공할 기운이 응축된 낭아봉이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으나 반호진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광랑을 쳐다보기만 했다.
한데 갑자기 덮쳐 오던 광랑이 움찔거렸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단전에 고이 박혀 있던 반호진의 검이 움직이자 광랑이 당혹성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 황급히 왼손으로 검신을 움켜잡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신에서 검강이 솟구치는 순간 모든 게 끝났다.
쩌어어억!
손가락은 물론이고 광랑의 몸뚱이가 정확히 반으로 양분되었다.
몸에 박힌 상태에서 검강이 뿜어져 나왔기에 막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죽는 순간에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털썩.
대막을 호령하던 대전사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초라하게 광랑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반호진에게는 별 의미 없었기에 양쪽으로 갈라져서 쓰러진 광랑에게 다가가 검을 주워 들었다.
“어, 어떻게……!”
“말도 안 돼!”
“대, 대전사님이!”
그런 반호진의 모습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철혈성도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당연히 광랑이 이길 거라 생각했건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심지어 가까스로 이긴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 쉽게 광랑을 압도해서 쓰러뜨렸기에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쪽은 끝났고.”
광랑을 잡았음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대막에서야 대전사로 불리며 강자 중의 강자로 인정받았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아니었다.
적어도 반호진에게는 별거 아닌 게 맞았다.
콰콰콰쾅!
고개를 돌려보니 팽만철은 아직도 혈백도와 싸우고 있었다.
이미 한 번 승부를 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혈백도가 악착같이 싸우는 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결판을 내지 못했다는 게 반호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어라, 새끼야!”
그런 반호진의 기색을 읽은 건지,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 답답한 건지 팽만철이 거칠게 욕설을 토해 내며 혼원벽력도를 펼쳤다.
그러나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뇌성벽력과 도강의 폭풍에도 혈백도는 어찌어찌 버텨 냈다.
그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반격까지 했다.
지는 순간 목이 달아난다는 걸 알았기에 혈백도도 절박했다.
여기서 죽으려고 중원에 온 게 아니었기에 혈백도는 기를 쓰고 싸웠다.
이미 비참하게 죽은 광랑을 보기도 했고.
“저쪽은 쉽게 안 끝나겠네.”
가볍게 승리한 반호진과 달리 팽만철은 끝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그걸 팽만철도 알고 있어서 더욱 다급한 얼굴이었고.
설마하니 반호진이 이렇게 쉽게 광랑을 죽일 줄은 몰랐기에 팽만철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자신과 비무를 했을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였다.
“끄아악!”
“사, 살려 줘……!”
평온한 반호진과 달리 다른 곳들은 아비규환이었다.
곳곳에서 비명과 단말마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살의와 광기에 취해서 서로에게 칼을 휘두르는 광경을 보며 반호진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는 않았다.
이게 전쟁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오히려 지금의 광경은 약과였다.
“잘 싸우고 있네.”
팽만철이 고전하고 있었지만 반호진은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광랑과 혈백도의 협공을 끊어 준 것만으로도 도움은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해서였다.
또 앞으로 있을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팽만철은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그래서 팽만철을 일별한 반호진은 일행들이 모여서 싸우고 있는 곳을 지켜봤다.
퍼퍼퍼펑!
사마의성의 지휘 아래에서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굳건하게 진영을 유지하는 사이 일당백의 무력을 지닌 선우방, 모용척, 정이륭이 위험에 빠진 백도무림인들을 구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의 위급한 상황에 빠져 있는 무인들 위주로 구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조운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사마의성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문주님도 걱정할 필요 없겠고.”
사마의성이 숭산에서 보여 준 것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선우방과 모용척의 지시 때문인지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군말 없이 지휘를 따르고 있었다.
덕분에 첫 실전임에도, 심지어 대규모 전투임에도 사마의성은 제 역량을 십분 보여 주는 중이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상일기를 찾았다.
귀검과 환편을 상대하느라 내공 소모가 꽤 있었을 텐데도 상일기는 대전사들 중에서도 상위권의 실력자라 할 수 있는 권패(拳覇)와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기꺼워 보였다.
같은 권장지각을 익힌 상대라서 그런지 상일기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커헉!”
“끄으윽!”
반면에 다른 곳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처음의 호기와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후기지수들은 물론이고 나름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던 강호의 명숙들조차 철혈성의 날카로운 이빨에 갈려 나갔다.
그리고 그건 명문대파의 장로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수련을 등한시한 게 훤히 보이는 종남파와 화산파의 장로들은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대전사들의 손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쯧쯧.”
현재 반호진과 상일기의 손에 열 명의 대전사 중 세 명이 죽었다....
거기에 팽만철이 혈백도를, 상일기가 권패를, 남궁호가 청면옥수(靑面玉手)를 상대하고 있으니 남은 대전사는 단 넷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밀리는 건 여전히 백도무림 쪽이었다.
특히 호기롭게 철혈성주를 잡겠다며 나선 투왕은 대전사 둘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장문인!”
그런 투왕의 모습에 보다 못한 화산파의 장로 두 명이 가세했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대전사 한 명이 더 나서자 이내 고깃덩이로 화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화산파의 장로들이니만큼 실력은 뛰어났으나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거기다 각 문파나 세가별로 뭉쳐서 싸우는 백도무림과 달리 철혈성은 하나의 세력이었기에 조직력 자체가 달랐다.
보조해 주고 지원해 주는 수준이 달랐기에 대전사가 셋이나 죽었음에도 전황은 여전히 철혈성이 유리했다.
“커허헉!”
“끄륵!”
“난장판이네.”
그리고 백도무림이 밀리는 데에는 후기지수들의 미비한 활약도 한몫했다.
자신 있게 나섰던 것과 달리 결과가 썩 좋지 않았던 것이다.
수적 우세를 믿고 기세등등하게 뛰쳐나갔지만 그중에 제 몫을 한 이는 남궁광 정도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반호진은 제갈세가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는 비록 기관진식보다는 무공에 주력하는 제갈세가지만 그래도 있던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사마의성과 지략대결을 펼치는 것도 보고 싶었고.
“헉헉! 어딜 그렇게 보고 있어?”
“전황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럴 거면 나 좀 도와주지.”
땀범벅인 모습으로 팽만철이 다가왔다.
그런 그의 왼손에는 방금 전까지 상대했던 혈백도의 수급이 들려 있었다.
고전하기는 했어도 결국에는 그가 이긴 것이었다.
팽만철은 혈백도의 수급을 보여 주며 히죽 웃고는 철혈성의 진영을 향해 힘껏 던졌다.
“히이익!”
“혈백도님!”
난데없이 날아온 혈백도의 수급에 난전 중이던 철혈성도들이 기겁했다.
혈백도가 이렇게 비참한 몰골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놀람은 잠시뿐이었다.
전장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었기에 놀란 걸 추스르고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호진과 팽만철이 있는 곳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팽만철이 지쳐 보인다고 하나 그렇다고 아무나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절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미 도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확하게는 목숨을 구해 드렸죠.”
“구해 주기는 무슨! 내가 잠시 밀렸던 거지 결국에는 이겼을 게다!”
“아, 그런가요?”
반호진의 영혼 없는 대답에 팽만철이 입술을 비틀었다.
반박하는 것보다 더 기분이 나빠서였다.
그러나 그걸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광랑을 잡는 걸 보며 그는 반호진이 실력을 숨겼다는 걸 알게 되어서였다.
“상황이 썩 좋지 않군.”
“자만의 대가를 치르는 겁니다. 얕잡아 보고 방심했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요.”
“자네는 어떻게 알았나?”
“개방에서 누누이 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끄응!”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반호진의 화법에 팽만철이 앓는 소리만 냈다.
그러면서 그는 눈알을 굴려 반호진을 살펴봤다.
체력도, 공력도 거의 바닥인 그와 달리 반호진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상태였다.
광랑을 상대로 시종일관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반드시 잡아야 해.’
그런 반호진의 모습에 팽만철은 더더욱 욕심이 생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가장 쓸 만한 놈이었다면 지금은 달랐다.
무조건 사위로 들여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천하십대고수급이 된 게 반호진이었기에 팽만철은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저 노인도 대단하군.’
너무 반호진만 바라보면 티가 나기에 팽만철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싸우고 있는 상일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하의 염왕과 동수를 이뤘다고 해서 처음에는 놀랐는데 지금 보니 남궁호 이상이었다.
제대로 붙으면 남궁호가 반 수 정도 처질 것 같았기에 팽만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 노인을 속세로 끌어온 것도 이 녀석이라고 했지.’
팽만철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우연의 일치도 이런 일치가 없어서였다.
조금 과장하면 반호진이 지금의 사태에 대비해서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기에 상일기의 제자라던 정이륭도 실력이 뛰어났다.
‘선우세가의 장남이 안 되면 저 아이로 선회해도 되겠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서 거하게 떡을 먹는 얼굴로 팽만철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때 투왕의 신음 소리가 전장을 갈랐다.
“끄윽!”
털썩!
동시에 투왕의 어깻죽지에 피가 솟구치며 왼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전사 둘의 협공에 왼팔이 잘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