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장. 명왕현신(冥王現身). -02
폭발 속에서도 전혀 힘을 잃지 않으며 쇄도하는 수십 개의 편영을 남궁호도 느끼고 있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기운이 전신을 찢어 놓을 기세로 덮쳐 오고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는 검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본래 계획은 귀검의 검강을 밀어 버리고 그대로 환편을 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귀검은 마치 그 속셈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남궁호의 검을 붙잡고서 놓아주지 않았기에 남궁호는 결정해야 했다.
창천을 놓고 환편의 공격을 막을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온몸으로 받아 낼 것인지를.
“차합!”
찰나의 순간 남궁호는 결정했다.
아니,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검객으로서 싸움 중에 검을 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남궁호는 자존심을 택하며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일으켰다.
터터터텅!
우윳빛 호신강기가 남궁호의 전신을 감싼 순간 환편이 일으킨 편강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두들기자 호신강기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미 귀검을 상대하면서 내공이 적지 않게 소모된 상태에다가 귀검이 여전히 검을 맞댄 상태에서 놓아주지 않기에 남궁호로서는 가만히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쩌저적!
결국 남궁호의 호신강기에 균열이 일어났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하자 호신강기가 버티지 못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궁호에 비해 조금 부족할 뿐이지 환편 역시 대막을 호령하는 강자였다.
귀검과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강자가 환편이었기에 남궁호는 이를 악물고서 왼손을 휘둘렀다.
“흥!”
하지만 이 역시 귀검이 예상했던 바였다.
현재 남궁호가 할 수 있는 반격이라고는 이 정도가 고작이었기에 귀검은 여전히 착검(着劍)의 수법으로 창천검을 붙잡고는 마찬가지로 좌장을 내질러 천뢰장(天雷掌)을 막았다.
퍼퍼퍼펑!
그러는 사이 환편의 파상공세는 더욱 맹렬해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정말 사정없이 두들겼고, 그 결과 남궁호의 전신이 귀검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으드득!
그럼에도 남궁호는 검을 놓지 않았다.
검객이 검을 놓는 건 죽는 순간일 뿐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집만 부리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귀검의 검을 떨쳐 내려 했는데 얄밉게도 귀검은 거머리처럼 끝까지 그를 따라붙었다.
“그래, 그렇게 죽는 거다!”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남궁호의 모습에 귀검이 희희낙락했다.
비록 일대일 대결에서는 졌지만 중요한 건 살아남느냐, 살아남지 못하느냐였다.
승부에서 이기더라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귀검이 환희에 찬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한데 그때 은밀한 경력이 귀검의 손목을 스쳐 지나갔다.
스극.
검병(劍柄)을 쥐고 있던 손목이 갑자기 갈라지며 피가 솟구쳤다.
동시에 지독한 고통이 잘린 손목에서 느껴졌다.
“끄아아악!”
순식간에 잘린 손목에 귀검이 왼손으로 절단된 부위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의 비명 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귀검의 등 뒤에 검은 인영이 귀신처럼 나타나서는 그대로 뒷덜미를 움켜잡고는 분질러 버렸다.
“귀검!”
직각으로 꺾인 귀검의 목에 남궁호를 몰아붙이던 환편이 대경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불러도 이미 늦은 후였다.
목이 꺾인 이상 대라신선이 와도 귀검을 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상 대협!”
“우선 환편부터 처리하지요.”
귀검의 목을 꺾은 이가 상일기임을 알아본 남궁호가 반가운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상일기는 남궁호와 달리 무표정한 얼굴로 주먹을 내질렀다.
성명절기이자 방천문의 비전절학인 명왕권이었다.
뻐어엉! 뻐엉!
묵빛의 권강이 뻗어 나갈 때마다 환편의 구절편이 출렁거렸다.
강맹한 일격에 버티질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쌍권을 번갈아 내지르며 나아가던 상일기는 이내 힘없이 밀려나던 구절편을 붙잡았다.
“어어?!”
동시에 그대로 끌어당겼다.
굳이 다가갈 필요 없이 아예 환편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그로 인해 환편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환편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촤르르륵!
상일기에게 붙잡히는 순간 귀검과 같은 꼴이 될 거라는 걸 알았기에 환편은 지금의 상황을 역이용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구절편 역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그렇기에 환편은 구절편을 움직여 상일기를 감쌌다.
뱀이 똬리를 트는 것처럼 구절편으로 꽁꽁 묶어 버렸던 것이다.
‘죽어라!’
순식간에 상일기를 포박한 환편은 그대로 구절편을 잡아당겼다.
온몸을 옥죄어서 그대로 터트릴 생각이었다.
뚜둑! 뚜두둑!
그러나 안타깝게도 환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일기가 우악스럽게 양팔을 좌우로 벌리자 꽁꽁 감싸고 있던 구절편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다가 끊어졌다.
놀랍게도 힘으로 끊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상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쑤아아앙!
여전히 날아오고 있는 환편을 직시하며 오른손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흔하디흔한 정권 찌르기의 기본자세였다.
하지만 주먹에 담긴 기운은 심상치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걸 느낀 환편은 다급히 양팔을 교차하며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펼쳤다.
그뿐만 아니라 경신술도 전력으로 펼쳐 어떻게든 방향을 틀려고 했다.
막는 것보다는 회피하는 게 무조건 나았기에 두 다리를 정신없이 놀렸으나 상일기의 일권이 먼저 호신강기를 때렸다.
뻐어엉!
담겨 있는 거력과 달리 상일기의 일권은 평범했다.
그저 묵빛의 권강이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간 것뿐이었다.
하나 위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환편이 극성으로 펼친 호신강기를 단숨에 꿰뚫은 건 물론이고 교차해 있는 두 팔과 가슴도 관통했다.
“쿨럭!”
단 일격에 모든 걸 꿰뚫고 지나간 권강에 환편이 종이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입에서는 끊임없이 새빨간 피를 토하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일기를 쳐다봤다.
이 정도 실력을 지닌 신비고수가 갑자기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환편은 이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퍼석!
그러나 상일기는 그 눈빛을 받고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적과 굳이 대화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림의 젊은 영령들이 죽고 있었기에 상일기는 무형강기로 머리를 뭉개 버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명한 환편이 허물어지며 옆으로 쓰러지자 한쪽에서 내상을 추스르고 있던 남궁호가 다가왔다.
여전히 반가운 기색을 띤 채로 말이다.
하지만 남궁호 정도 되는 무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해 왔음에도 상일기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남궁가주님.”
“예, 문주님.”
“이곳은 전장입니다.”
“…….”
남궁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짧은 한마디지만 안에 담긴 의미를 알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남궁호는 부끄러웠다.
한 가문의 수장임에도 수하들을 챙기기는커녕 자기 자신만 생각했음을 깨달아서였다.
“나머지 대화는 전투를 끝내고 하지요.”
“예.”
상일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깨달은 듯해서였다.
조언이라는 게 딱 할 말만 해야지 그 이상으로 가면 잔소리와 훈계밖에 되지 않았다.
뻐어엉! 뻐어어엉!
할 말을 마친 상일기는 승냥이 떼에 뛰어든 호랑이처럼 전장을 무자비하게 휩쓸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철혈성의 전사들을 쓸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좀 전과 완전히 다른 표정의 남궁호가 있었다.
무너진 남궁세가의 진영을 다시 구축하며 적들을 밀어붙였다.
스윽.
그 모습에 상일기는 고개를 틀었다.
전장에 합류한 건 그만이 아니어서였다.
그러나 걱정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지금 그가 찾으려는 인물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다.
“멈춰라!”
“노괴가 날뛰는 것도 여기까지다!”
그런 그를 향해 철혈성에서 제법 신분이 높은 이들이 덤벼들었으나 결과는 환편과 다르지 않았다.
호기롭게 달려든 것과 달리 상일기의 일권을 받아 내는 이들이 없었다.
가끔 한 방을 막아 내기는 했어도 두 번째, 세 번째까지 받아 내는 이는 없었다.
쿠아아앙!
거기에 남궁호가 본격적으로 힘을 드러내니 주변에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었다.
귀검과 환편이 사라지자 누구도 둘을 감당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곳의 상황은 달랐다.
‘우선은 균형부터 맞춰야 해.’
상일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이곳의 상황은 그의 참전으로 나아졌으나 다른 곳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곳만 나아진 상태였기에 상일기는 일단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지? 당신 정도의 고수가 중원에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알려진 게 전부는 아니지.”
“하긴. 은거고수가 모래알처럼 많다는 말이 있는 곳이 중원이니까. 근데 그거 아나? 이 말은 대막에도 통용된다는 사실을.”
철혈성의 무리들이 좌우로 쫙 갈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나방처럼 달려들던 이들이 한 남자의 등장에 차분해지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세상은 넓으니까.”
“후후. 환편과 귀검을 잡았다고 내가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야?”
광기 가득한 사막의 전사들이 일제히 존경을 표했다.
새로이 나타난 인물을 향해서 말이다.
그러나 상일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대막에서야 대전사들이 대단한 신분이지 중원에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는 않고.”
“뭐, 좋아. 나도 당신의 실력이 마음에 들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러니 날 실망시키지 말아야 할 거야. 난 귀검이나 환편과는 다르거든.”
“실망시킬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상일기는 짧게 대답하며 주변을 살폈다.
무서운 기세로 철혈성의 무리들을 학살하던 남궁호의 질주도 지금은 멈춘 상태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대전사가 나타나서였다.
한데 눈앞에 있는 이처럼 남궁호를 가로막은 인물 역시 환편이나 귀검보다 한 수 위였다.
‘진짜 천하십대고수급이군.’
다시 시선을 전방으로 되돌린 상일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무림십왕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실력이 아닌 것처럼 대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좀 전에 상대했던 귀검과 환편과는 급이 다른 실력자임을 알 수 있었기에 상일기는 주먹을 천천히 그러쥐었다.
앞서 환편과 귀검을 상대하느라 내공 소모가 상당했으나 그건 눈앞의 장년인도 마찬가지였기에 상일기는 눈을 빛내며 땅을 박찼다.
“선수필승이라. 좋은 말이지. 근데 나도 선수를 빼앗길 생각은 없어서 말이지.”
장년인이 짐짓 여유롭게 말했다.
하지만 말투와 달리 그의 몸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궁신탄영을 펼치며 마찬가지로 상일기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쩌어어엉!
이윽고 허공에서 상일기의 주먹과 장년인의 주먹이 충돌하며 무시무시한 굉음을 토해 냈다.
동시에 무지막지한 후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근처에서는 남궁호 역시 새로운 상대와 용호상박의 대결을 벌이는 중이었다.
‘제기랄!’
호기롭게 나섰던 처음과 달리 팽만철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한 명은 상대할 만했는데 두 명이 협공하자 천하의 그도 별수 없었다.
그 정도로 대전사 두 명의 힘은 강력했다.
도왕이라 불리는 그조차도 속수무책으로 밀릴 정도로 말이다.
‘대전사라는 놈들이 이렇게나 강할 줄이야.’
팽만철이 이를 악물며 두 다리를 놀렸다.
벼락같이 쇄도하는 낭아봉과 참마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둘 다 중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크고 무거운 병장기였는데 대전사들은 그걸 마치 솜방망이처럼 휘둘렀다.
특히 참마도를 휘두르는 혈백도(血魄刀)는 일대일로 싸울 때 밀렸던 걸 복수하려는 듯이 정말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스극!
그로 인해 무복은 누더기가 된 상태였다.
게다가 얕긴 하지만 상처도 하나둘 늘고 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으나 문제는 출혈이었다.
“고전하시네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