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장. 명왕현신(冥王現身). -01
콰과과광!
거대한 전마(戰馬)에 타고 있는 창군의 길쭉한 창이 번뜩일 때마다 주변이 초토화가 되었다.
그 누구도 그의 창강을 막아 내지 못했던 것이다.
열댓 명이 강기를 일으키고서 달려들었음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종남파의 장로들도 있었다.
‘……무리야.’
선우청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아무리 주관적으로 판단해도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니, 이길 가능성이 아니라 십 초를 버틸 수 있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들에게 못난 아비가 되고 싶지 않아 죽도록 노력했지만 창군을 보는 순간 그 노력이 무의미해짐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이동할까요?”
창군의 무위에 모두가 입을 다물 때 사마의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행들은 대전사의 무경에 경악했지만 사마의성은 달랐다.
반호진과 따로 회의를 했었기에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사실 그게 지금도 믿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직 아냐. 좀 더 지켜본 후에. 길은 다 숙지하고 있잖아?”
“네.”
밤을 새워 가며 이동 경로를 짰었기에 목적지만 정하면 최단 경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미리 확인 작업까지 마친 상태였기에 결정만 내리면 되었다.
“지켜보자고. 저쪽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괜찮겠지?”
“두고 봐야지. 근데 궁금하지 않아? 천하십대고수와 대전사들의 대결이.”
“……넌 놀랍지도 않아?”
“다들 예상은 했잖아? 철혈성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고. 오 대협이 직접 알려 주기도 했고.”
평소와 다름없이 무덤덤한 어조로 대답하는 반호진을 선우방은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상일기조차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데 정작 반호진은 너무 여유로운 것 같아서였다.
물론 반호진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여유로운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잘 봐 둬. 천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광경이니까.”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건 아는데, 상황이 안 좋으니까 그렇지.”
선우방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이곳과 달리 전장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명을 달리했다.
적아를 막론하고 수십 명이 죽어 나갔던 것이다.
그중에는 약관도 채 안 되는 이들이 있었기에 선우방은 마음이 불편했다.
“죽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잘 지켜봐야지. 그래서 강해져야 복수도 할 수 있지 않겠어?”
“넌 가끔 보면 생각하는 게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찾을 뿐이야. 그렇다고 죽은 이들을 살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으음.”
반박할 수 없는 반호진의 말에 선우방은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지금의 전쟁은 말리고 싶다고 해서 말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희생된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노력해야 했다.
스윽.
모두가 같은 답에 도달했는지 시선이 다시 창군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일행에게 익숙한 얼굴이 창군에게 쇄도했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자 도왕이라 불리는 팽만철이 창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꽈아아앙!
화산파와 종남파의 장로들도 단숨에 꿰뚫어 버렸던 창군의 창이 처음으로 막혔다.
그뿐만 아니라 보통의 말보다 두 배는 족히 큰 전마가 뒷걸음질 쳤다.
팽만철의 참격에 밀린 것이었다.
뻐어어엉!
한데 그런 전투는 한 곳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더 이상 밀리면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인지 남궁호와 투왕도 전장에 참전했다.
각자 다른 방향에서 철혈성주가 있는 곳으로 말이다.
쩌저저적!
남궁호의 일검에 지면이 거칠게 갈라졌다.
단순한 찌르기에 땅바닥에 깊은 균열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겨냥했던 중년인의 몸에는 닿지 못했다.
그게 남궁호의 심기를 건드렸다.
“역시 검왕이라는 칭호를 놓친 게 이해가 되네. 넌 딱 염왕 정도가 어울려.”
“주둥이가 가벼운 놈이로구나.”
“입은 가볍지만 검은 다르지.”
쌔애액!
남궁호를 도발한 중년인이 검을 뿌렸다.
그러자 눈부신 섬광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육안으로는 도저히 쫓을 수 없는 쾌검이 남궁호에게 쇄도했다.
까아아앙!
심장을 향해 벼락같이 쇄도하는 일격이었으나 남궁호는 어렵지 않게 막았다.
눈으로 보지 못한다고 해서 꼭 막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둥아리만큼 검도 가벼운데?”
“그 정도도 못 막으면 무림십왕이라 불리면 안 되지.”
남궁호의 비릿한 도발에도 중년인은 웃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정확히 맞았다.
두 번째로 펼치는 일검은 첫 번째보다 훨씬 빠르고 강맹했다.
까아아앙!
단순히 빠른 걸 넘어 묵직한 힘이 서려 있는 일격에 남궁호의 안면이 살짝 굳어졌다.
대막에서 귀검(鬼劍)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의 상대는 아니었다.
웅웅웅!
두 번의 격돌로 그걸 확실히 느낀 남궁호는 천뢰제왕신공(天雷帝王神功)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의 애검인 창천이 우윳빛 검강에 휩싸였다.
꽈아아앙!
눈부시게 빛나는 검강이 솟구친 것과 동시에 남궁호는 귀검을 향해 단순하게 휘둘렀다.
세 살배기 아이도 펼칠 수 있다는 일도양단의 초식을 펼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일검에 귀검의 표정이 일변했다.
“큭!”
“왜 그러지? 아까 전의 자신감은 어디 갔나?”
“닥쳐라!”
귀검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방금 전과 달리 여유가 사라졌던 것이다.
동시에 귀검의 전신에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남궁호에게 순간적으로 압도당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본 실력을 드러낸 것이었다.
키이잉! 키이이잉!
귀검의 전신에서 발산된 기운이 남궁호의 기운을 밀어냈다.
보이지 않는 무형지기 간의 영역싸움이 벌어진 것이었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무인들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거리가 제법 되었음에도 두 사람이 흩뿌리는 기운에 진기가 역류해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커헉!”
털썩! 철퍼덕!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기세는 점점 더 영역을 넓혀 나갔다.
무지막지한 중압감으로 공간을 짓누르자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발 빠르게 물러났다.
자칫 잘못해서 휩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는 걸 직접 봤기에 알아서 피했다.
“뒈져라!”
하지만 정작 귀검과 남궁호는 주변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서로가 오직 상대방에게만 집중하고 있어서였다.
특히 귀검은 남궁호에게 잠시나마 밀렸다는 게 기분 나빴기에 두 눈에서 살기를 줄기줄기 흘려 내며 검을 휘둘렀다.
따아아앙!
가공할 진기를 머금은 귀검의 검이 남궁호의 검을 때렸다.
검과 함께 남궁호를 절단 내 버리겠다는 일격이었다.
그러나 살의가 가득 담긴 일검에도 남궁호는 오히려 웃었다.
귀검의 일격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무형지기가 야금야금 공간을 넓혀 가고 있어서였다.
“이번 판은 내가 이긴 것 같군.”
“뭔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히죽 웃으며 말하는 남궁호에게 일갈하던 귀검이 순간 움찔거렸다.
뒤늦게 남궁호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려서였다.
격렬하게 치고받는 듯했으나 어느새 그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은 처음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나머지를 남궁호에게 빼앗겼다는 뜻이었다.
“감각이 생각보다 무딘데. 오랑캐 출신이라서 피부가 두껍나?”
“닥쳐라! 이깟 싸움보다는 목을 베는 게 더 중요한 법!”
쌔애애액!
확연하게 줄어든 영역에 귀검은 아예 무형지기 싸움을 포기했다.
대신 초식에 집중했다.
내공의 양과 다루는 섬세함이 부족할지는 모르나 검술만큼은 남궁호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늘 골방에 처박혀 있는 남궁호와 달리 그는 매일 전장을 넘나들었던 만큼 실전 감각은 자신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이야.”
악귀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귀검이 파상공세를 펼쳐왔으나 남궁호는 여유로웠다.
영역싸움에서 이긴 이상 승기는 그가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귀검은 이 싸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건 크나큰 오판이었다.
무릇 싸움이라는 건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결정되는 법이었다.
콰앙! 쾅! 꽈아앙!
연거푸 살벌한 검격이 쏟아졌으나 남궁호는 여유롭게 받아 냈다.
이 파상공세가 얼마 가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날카롭다 못해 매서운 일격들이었으나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고 있었다.
“응?”
그 사실을 귀검도 느낀 듯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검속도 느려지고 정교함도 점점 더 떨어지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걸 느꼈을 때는 너무 늦은 후였다.
쩌어어엉!
귀검이 자각한 순간 이번에는 남궁호가 파상공세를 펼쳤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무자비하게 제왕검형을 펼쳤고, 그로 인해 귀검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여유롭게 막아 내던 남궁호와 달리 귀검은 겨우겨우 제왕검형을 받아 냈다.
“이제 그만 죽어라.”
검강끼리의 충돌로 인한 여파로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귀검을 내려다보며 남궁호가 말했다.
외상도 외상이지만 누적된 충격으로 내상 역시 적지 않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말 그대로 완벽한 그의 승리였기에 남궁호는 염라대왕처럼 판결을 내리듯 한마디를 하며 검을 내리그었다.
이대로 정수리부터 귀검을 양분할 작정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꽈아아앙!
그런데 그 순간 낯선 목소리와 함께 남궁호의 검이 막혔다.
어디선가 날아온 구절편이 한 자루 철봉처럼 변해 남궁호의 창천을 막은 것이었다.
“……너는.”
“내 소개는 안 해도 되겠지? 구절편을 다루는 나 정도의 고수가 대막에 흔하지는 않잖아?”
“환편(幻鞭).”
“맞아.”
“귀검이 안 되니까 두 명이 덤비는 건가?”
검을 회수하며 남궁호가 귀검과 환편을 번갈아 쳐다봤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그러자 귀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어쩔 수 없지. 귀검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둘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
“역시 염왕다운 자신감이야. 근데 왜 검왕이라는 칭호를 갖지 못했을까?”
도발에는 도발로 응수한다는 듯이 환편이 히죽 웃었다.
검왕이 그의 역린임을 잘 알아서였다.
“곧 되찾아올 것이니 너희들은 저승에서 지켜보면 된다.”
“글쎄.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염라대왕을 보는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 될 것 같거든.”
“흥!”
환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검이 달려들었다.
거친 콧김을 내뿜으면서 말이다.
동시에 환편의 구절편이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전방은 귀검에게 맡기고 환편은 후방에서 남궁호의 빈틈을 노렸다.
“이까짓 것쯤!”
둘 다 대막을 대표하는 대전사이기에 협공 같은 건 안 해 봤을 것 같은데 의외로 합이 잘 맞았다.
절묘하게 시간차를 두고 쇄도하는 공격에 남궁호는 짐짓 호기롭게 소리쳤다.
두 명이 대전사라고 하나 그는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었다.
검왕과 함께 중원을 대표하는 검호이기에 남궁호는 피하기보다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꽈아아앙!
이윽고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남궁호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이었다.
츠츠츠츠!
그러나 남궁호가 놀라거나 말거나 환편의 구절편은 맹렬한 기세로 수십 개의 편영(鞭影)을 그리며 쇄도했다.
전신을 난자해 버릴 기세로 말이다.
“흐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