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장. 우리도 간다. -04
“확실히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죠.”
우려 섞인 사부의 말을 들으며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담현은 모르지만 철혈성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가 반호진이었다.
주로 상대했던 곳은 북해빙궁이었지만 철혈성과도 꽤 자주 부딪쳤었다.
특히 철혈성에는 성주를 제외하고도 대전사라 불리는 강자들이 존재했다.
“전쟁이 아니라 기회로 보고 있는 이들이 많아. 자신의 무명을 날릴 기회로.”
“평화가 길기는 했으니까요. 오죽했으면 기꺼워하는 이들이 많다고 할까요.”
“그 평화가 선대의 피로 이루어 냈다는 걸 벌써 잊은 게지.”
“하면 화산파를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반호진이 슬쩍 물었다.
말하는 투가 화산파로 갈 것 같아서였다.
철혈성 역시 섬서성으로 이동 중이기도 하고.
“아직은 결정하지 않았다. 근데 꼭 우리가 같이 움직일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그렇긴 합니다. 화산파에는 일단 투왕(鬪王) 대협이 계시고, 이번에 남궁세가주님과 팽가주님이 합류하기도 했으니까요.”
현재 화산파에는 천하십대고수 중 무려 세 명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대막의 대전사들이 천하십대고수와 비슷하거나 살짝 아래의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철혈성주는 괴물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세 명이 협공한다면야 철혈성주를 잡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렇게 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이었다.
백도무림이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고.
세력의 규모로만 따지자면 철혈성을 압도하지만 문제는 결속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방천문주께서도 대막을 생각 중이신 것 같더구나.”
“거기에 대해서는 따로 언질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민 중이라 그런 걸 게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니까.”
“사부님께서는 제가 화산파에 갔으면 싶으신 거군요.”
“명령은 아니고, 생각해 보라는 거지. 너와 방천문주라면 안심이 될 것 같거든. 적어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테니까.”
담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만큼 반호진을 믿기에 하는 소리였다.
누구보다 제자의 실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담현은 넌지시 권유했다.
“구천문처럼 결판이 나지 않으면 여러모로 상황이 안 좋아지기는 하지요.”
“맞아. 다른 곳들이 어부지리를 노릴 수도 있으니.”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알아서 잘 싸워 주었으면 했다.
굳이 그가 나서지 않아도 되게 말이다.
실제로 집결한 전력이 상당하기도 했고.
다만 문제는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라는 점이었다.
지휘관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음에도 대패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저희도 그 부분에 대해서 한 번 의견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의성이는 서장과 북해빙궁을 걱정하더라고요. 신강의 마교 역시 언제라도 진격할 수 있고.”
“그렇지. 근데 거기까지 생각하는 이들이 없어. 그저 자기 자신의 무명과 가문, 사문의 명성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참, 사마세가의 무공을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는 사마의성이 직접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하려 했으나 담현이 워낙에 바빴다.
근래 반호진도 자주 찾아오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반호진은 먼저 자신이 사마의성의 말을 전달했다.
“감사는 무슨. 본래 주인에게 되돌아간 것뿐인데. 오히려 다행이지. 무공이 제 주인을 찾아서.”
“그래도 돌려주는 것과 말하지 않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여기는 소림사다. 그리고 나는 불제자지. 욕심을 버리는 건 인간으로서 불가능하나 그래도 노력은 할 수 있지 않더냐. 또 좋은 일을 하면 선업을 쌓게 되는 것이니 본사로서도 나쁘지 않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니까요. 의성이도 오고 싶어 했는데 사부님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아 오늘은 저만 왔습니다.”
“내일쯤에 같이 오너라. 사마세가의 후인이라고 해서 안 그래도 나도 한 번 만나 보고 싶었어.”
요즘 정신없이 바쁘지만 그렇다고 또 아예 시간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반호진이 받아들였다면 시간을 내서 만나 볼 가치는 충분했다.
지금까지 반호진이 선택한 인물 중에 호걸이 아닌 이가 없었고.
거기다 사마세가가 너무나 덧없이 무너졌었기에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같이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고민도 해 보고. 아이들에게는 좀 위험하겠지만.”
“위험한 만큼 얻는 것 역시 크겠지요. 살아남는다면 말이지요.”
“그건 맞지만 과신은 자만만큼이나 위험해.”
“명심하겠습니다.”
반호진은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도 끝났고, 차도 다 마셨기에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려는 것이었다.
“아, 괴왕의 죽음에 대해서 암암리에 퍼지고 있더구나.”
“슬슬 알려질 때가 되기는 했죠.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까요. 또 자연스럽게 알려지면 저에게는 좋기도 하고요.”
“상관세가는 내가 계속 주시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저도 나름대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담현에게 개방주가 있다면 그에게는 하오문과 금가장이 있었다.
더욱이 하오문의 경우 상관세가와는 악연이 있기에 더욱더 신경 써서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래.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하지만 너무 믿지는 말거라.”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사부님.”
“내일 보자꾸나.”
담현의 인사를 받으며 반호진은 방장실을 나섰다.
철혈성과 구천문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말이다.
연무장으로 사용하는 앞마당의 한쪽 구석의 그늘에서 사마의성이 나무에 기댄 채로 대련을 하고 있는 정이륭과 서조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마의성의 오른손은 쉬지 않고 무언가를 적는 중이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자그마한 탁자 위에 문방사우를 오밀조밀하게 채워 놓고는 쉴 새 없이 붓을 휘갈겼다.
“지금의 모습은 딱 학사로구나.”
“형님!”
“제삼자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지?”
“네.”
기척도 없이 다가온 반호진을 향해 사마의성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공에 한해서는 정말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서였다.
나이를 속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박학다식한 면모에 사마의성은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부담스러우니까 그런 눈빛으로는 보지 말고.”
“근데 사실이잖아요.”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다 할 수 있어. 네가 기문진에 해박한 것처럼 말이지. 지금 적어 놓는 건 두 사람의 습관들이지?”
“예. 둘 다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몇 번이나 같은 습관들이 반복되더라고요. 자기도 모르고, 상대방의 습관에 대해서도 모르고요.”
“관찰 열심히 했네.”
기본적으로 금기서화에 능해서 그런지 사마의성은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급하게 휘갈기듯 그렸음에도 핵심은 확실하게 표현되어 있었고.
거기다 글씨도 명필이었다.
‘무공 빼고는 전부 다 가진 건가.’
반호진은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하늘이 불공평하다지만 진짜 다 준 것 같아서였다.
무공이 다른 분야에 비해 부족하다고 하나 그건 일부분이 소실된 가전무공을 익혀서였다.
가주만이 익히는 무공은 아직 찾지 못했으나 같은 뿌리에서 나온 무공서를 이번에 얻었으니 부족했던 무공도 곧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반호진은 생각했다.
“제가 가장 자신 있는 게 그거니까요.”
“관찰력은 중요한 능력이지. 더욱이 너에게는 통찰력도 있으니까.”
“하하하.”
반호진의 칭찬에 사마의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평소에 칭찬을 잘 하지 않았기에 사마의성은 머쓱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전장에 갈 마음이 있어?”
“전……장요?”
사마의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것이었다.
“응. 전장에.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면 여기 남아 있어도 돼. 강요할 생각은 없어.”
“형님께서는 마음을 결정하셨군요.”
“일단 가는 것까지만. 참전할지 하지 않을지는 아직. 가서 본 다음에 결정하려고. 그렇지만 싸울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네 목숨은 네가 지켜야 해. 그 누구도 대신 지켜 줄 수 없는 곳이 전장이야.”
담담하게 말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한없이 무거웠다.
동생이기에 반호진이 신경 써 주긴 하겠으나 그게 생존을 장담해 주지는 않았다.
전쟁터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기에 각오가 필요했다.
“저는 가겠어요. 예전이었다면 얼씬도 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있어요. 적어도 제 한 몸 지킬 자신이요. 그리고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잖아요. 제가 살아 있음을 이번에 세상에 알리겠어요.”
“그게 네 의지라면, 좋아.”
“저는 형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갑니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언제 대화를 엿들은 것인지 서조운과 정이륭이 다가왔다.
반호진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 이제 문주님의 결정만 남았네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언제 말씀하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왠지 반 공자님도 갈 것 같았거든요.”
어느새 다가온 상일기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이 본 반호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쉽게 읽혔단 말이지요. 쉬운 남자는 매력이 없는데.”
“이미 형님의 매력은 철철 넘치니까 괜찮습니다.”
“우리야 짐이 간단하지만 의성이는 다를 테니 오늘은 각자 준비하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고. 문주님께서도 괜찮으신지요?”
서조운의 말을 자연스럽게 흘려 버리며 반호진이 대화를 정리했다.
준비할 게 별거 없다지만 그래도 막상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짐이 꽤 될 터였다.
더욱이 기문진을 펼쳐야 하는 사마의성은 챙길 물건들이 많기에 반호진은 여유롭게 시간을 정했다.
“저는 좋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걸로 확정하죠.”
“넵!”
“알겠습니다!”
상일기의 대답에 반호진이 시간을 확정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조운과 정이륭이 대답했다.
“의성이는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고. 웬만한 건 다 구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심지어 돈도 많으시지.”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서조운의 말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쓸 데는 없는데 계속 모이다 보니 지금까지 모은 재물이 상당했다.
개인이 가지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많을 정도로 말이다.
“참고로 나도 부자야. 이륭 형도 부자고.”
“나도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이번에 한탕 하면 되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난 형님만 따라다녔는데 부자가 됐어. 염룡도 되고.”
사마의성을 바라보며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마치 너도 똑같이 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 표정에 사마의성이 살짝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조운이 겪어 온 과정과 이번 전쟁은 다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전쟁터에 가는데 헛바람 집어넣지 마. 살아남을 걱정을 해도 모자랄 판에.”
“에이. 저도 있고, 이륭 형도 있고, 문주님도 계시고, 거기다 형님까지 있으신데요. 승리를 장담하지는 못해도, 몸을 내빼는 것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싸우기도 전에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거냐?”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도주부터 생각할 줄은 몰라서였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죠. 반대로 저희가 승패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요.”
철혈성의 세력이 엄청나다고 하나 화산파에 집결한 백도무림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반호진과 상일기, 그와 정이륭, 사마의성이 가세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중원은 수없이 많은 침공을 당했지만 결국 버텨 내고 이겨 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우선은 살아남을 걱정부터 해. 지금까지 겪었던 전투와는 완전히 다를 테니까.”
쓸데없이 자신만만해하는 서조운에게 반호진이 냉정하게 말했다.
분명 서조운은 눈부신 성장세를 보여 주었지만 아직 덜 여물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괴물은 꼭 실력순으로만 잡아먹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