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장. 우리도 간다. -03
서조운은 다시 한번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염불을 외웠다.
그래야지만 이 흥분이 가라앉을 것 같아서였다.
동시에 축융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너무 현실적이라 차마 직접 손을 쓰지는 못하고 축융신공으로 날려 버리려는 것이었다.
화르르륵!
서조운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불꽃과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축융신공으로 환상진을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환상진을 파훼하면 눈앞에 있는 여인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기에 서조운은 두 눈을 감고서 극양지기를 사방에 뿌려댔다.
“어머? 오늘도 뜨겁게 불타오르자는 건가요?”
후욱.
그러나 문제는 서조운이 이렇게 나올 걸 사마의성이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축융신공은 분명 대단한 열양공이지만 미리 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기에 환상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사마의성이 만들어 낸 여인은 극양지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이 서조운에게 다가가 거의 안기다시피 하며 귀에다가 속삭였다.
자연스럽게 바람도 불어 넣으면서 말이다.
“으으으!”
난생처음 겪어 보는 감각에 서조운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우면서도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주물럭주물럭.
그런 서조운을 여인은 떡 주무르듯이 몸 곳곳을 만지작거렸다.
은근슬쩍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자 서조운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 항복!”
“아쉽다. 이제 진도 좀 빼나 했는데.”
“으윽!”
진심이 담긴 여인의 중얼거림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서조운의 항복 선언에 사마의성이 환상진을 거둔 것이었다.
그 광경에 서조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패배한 건 분했지만 그래도 유혹에 넘어가서 두고두고 놀림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더 나았다.
“뭐야? 호언장담하더니.”
“환상진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미인계가 진부한데도 계속 사용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지.”
“그걸 이번에 절절하게 느꼈습니다.”
서조운이 침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유구무언이라는 말처럼 서조운은 반호진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는.
“의성아.”
“네.”
“한 번 더 가능해?”
“아직 괜찮아요!”
“이마에 땀이 맺혀 있는데?”
정현과 달리 서조운은 사마의성도 쉽지 않았다.
웬만한 수준으로는 통하지 않기에 사마의성 역시 전력을 다했었다.
그걸 증명하듯 사마의성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제법 맺혀 있었다.
“저는 나중에 도전해도 괜찮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저희만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은근슬쩍 발을 빼는 정이륭의 대답에 서조운은 물론이고 정현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혼자만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두가 겪어 봐야 했다.
스윽.
가능하다면 반호진까지 말이다.
경지가 차원이 다른 만큼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사마의성의 기기묘묘한 환상진이라면 반호진에게 통할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을 서조운과 정현이 주고받았다.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제대로 부탁한다, 의성아.”
“노력해 볼게.”
서조운과 대결하느라 소모된 심력과 공력이 상당했지만 이 또한 수련이었다.
무인들이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단련하는 것처럼 심력도 마찬가지였다.
한계를 넘으면 그만큼 실력이 느는 것이었기에 사마의성은 의욕 넘치는 눈빛으로 서조운의 말에 대답했다.
저벅저벅.
동갑내기들의 대화를 들으며 정이륭은 방금 전까지 서조운이 서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이미 계속 봐 왔던 곳이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은 차이가 좀 있었다.
특히 주변에 빼곡하게 박혀 있는 길쭉한 작대기들을 바라보며 정이륭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준비되셨어요?”
“어째 네가 더 신난 거 같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 여기 있는 누구보다 형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어요.”
“못난 꼴을 기대하는 거겠지.”
정이륭은 피식 웃었다.
말과 표정이 전혀 일치하지 않아서였다.
서조운이 어떤 기대를 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정이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작해도 될까요?”
“응.”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다부진 사마의성의 대답과 함께 주변의 경관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환상진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공터는 사라지고 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계곡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더불어 육감적인 여인이 귀신처럼 나타났다.
“이리 오렴. 아니면, 내가 갈까?”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연상의 여인이 색기 가득한 목소리로 정이륭을 향해 말했다.
무명천으로 몸의 중요 부위를 가리고 있었는데 살짝 젖어 있어서 그런지 얼룩이 슬쩍슬쩍 보였다.
“항복.”
“응?”
농염한 몸매의 여인이 난데없는 항복 선언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환상진 밖에 있는 사마의성의 표정과 똑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건 잔뜩 기대하고서 지켜보던 서조운과 정현도 마찬가지였다.
“항복하겠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기 무섭게 두 눈을 감고 있던 정이륭이 재차 말했다.
혹시라도 못 들었나 싶어서였다.
“머리 잘 썼네.”
“안 돼! 이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맞아요!”
자신을 바라보는 사마의성의 시선에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결도 어떻게 보면 승부의 일종이었다.
패배를 시인한 이를 계속 공격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그만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서조운과 정현은 지금의 상황을 납득할 수 없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항복하겠다는데 어쩔 거야?”
“그, 그래도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요! 이렇게 시작하자마자 포기하는 게 어디 있어요?”
“저기 있잖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서조운이 말했으나 이미 승부는 결정되어졌고, 반호진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걸 서조운도 알았으나 너무 분했다.
“얍삽합니다!”
“원래 승부는 다 그런 거야. 이길 때도 있으면 질 때도 있는 거지. 근데 의성아.”
악을 쓰는 서조운을 향해 얄미운 미소를 날린 정이륭이 사마의성을 바라봤다.
두 눈에 궁금증을 가득 담고서 말이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우리 셋 다 다른 여인이었어?”
“맞아요. 다 달랐어요.”
“이유가 있어?”
“아무래도 취향에 맞추면 효과가 극대화될 테니까요.”
역정을 내던 서조운과 정현이 입을 쩍 벌렸다.
두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한 말이 나와서였다.
반면에 물어보았던 정이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예상한 게 맞아서였다.
“대단하네. 솔직히 제대로 한 방 맞았어.”
“제대로 보지도 않았잖아요.”
“얼굴과 전체적인 윤곽은 봤지. 김이 자욱하게 올라온 덕분에 중요 부위는 보지 않을 수 있었고. 근데 너무 내 취향이더라고. 신기할 정도로. 그래서 의심을 했었는데 역시 맞춤 공략을 한 것이었네.”
“허어.”
“우와.”
정이륭과 사마의성의 대화에 서조운과 정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세밀하게 공략해 올 줄은 몰랐기에 둘 다 놀란 것이었다.
그래서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마의성을 쳐다봤다.
“저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알지. 근데 이번에는 진짜 강력했어. 무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
“방이 형이랑 척이 형도 있었어야 했는데. 그래야 더 재미있었을 텐데.”
진심으로 감탄하는 정이륭과 달리 서조운은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이 환상진에 당하는 모습도 보고 싶어서였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럼요.”
암중모략을 하듯 머리를 맞대고서 작게 소곤거리는 정현과 서조운의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이 차이가 가장 적다지만 그래도 동갑내기인 사마의성과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나서였다.
성숙과 미숙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광경에 반호진은 소리 없이 혀를 끌끌 찼다.
“어쨌든 대련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다들 열심히 궁리해 봐.”
“파훼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방법은 많지. 다만 그걸 찾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이왕이면 자기만의 방법을 찾는 게 가장 확실하지.”
“으음!”
정이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석 같은 대답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또 이런 식의 머리싸움은 정이륭도 싫어하지 않았다.
“저도 지지 않을 거예요.”
“나 역시.”
“우리도 있다고.”
“물론이죠.”
사마의성, 정이륭, 서조운, 정현이 서로를 응시하며 승부욕을 불태웠다.
비록 오늘은 졌지만 내일은 다를 거라고 눈빛과 표정으로 세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세 쌍의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사마의성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내 친구지!”
“꼭 네 친구라서 그런 건 아닌데. 내 목표를 위해서인데.”
“어허! 그럼 더 나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도와주면 목표를 이루는 게 더 빨라지지 않겠어?”
“이왕 시간을 투자할 거면 너보다는 형님께 부탁하는 게 낫지.”
“말은 진짜 잘한다니까.”
서조운이 투덜거렸다.
그도 어디 가서 입심이 꿀리는 편은 아닌데 사마의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너도 네 꿈이 있잖아. 그러니까 넌 네 꿈만 생각해.”
“그래. 우리 서로 열심히 하자.”
결국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말이다.
또르륵.
해질녘 반호진은 방장실을 찾았다.
오랜만에 담현이 직접 그를 호출해서였다.
보통은 반호진이 적당히 알아서 찾아가는데 오늘은 콕 짚어 시간을 정해 주었기에 늦지 않게 방장실을 방문했다.
“감사합니다.”
“요즘 좀 쓸쓸하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허허허.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바로 안다는 말이 있지. 늘 붙어 있다가 없어졌으니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질 게야.”
반호진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으나 담현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더욱이 본가로 돌아간 게 아니라 전장으로 향한 만큼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성장하기도 했고.”
“네가 거의 키우다시피 했지.”
“그 정도는 아니고요.”
“아니긴. 그보다 내가 왜 불렀는지 짐작은 하고 있겠지?”
“어느 정도는요. 혹 목적지가 정해진 겁니까?”
반호진이 느긋하게 차를 들이켰다.
강호에서 태산북두라고 불릴 만큼 소림사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리고 그 말은 사람들이 소림사에 기대하는 것 역시 상당하다는 걸 뜻했다.
괜히 무림맹이 발족하면 소림사의 방장이 맹주가 되는 게 아니었다.
“아직 그런 건 아니고. 말은 조금씩 나오는데 강하게 요구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암월교에서 얻은 무공비급들을 그냥 돌려준 것 때문에 그런 듯싶구나.”
“대가를 받지 않았으니 빚이 되기는 하겠죠. 일단 회수했다는 의의도 있고.”
“그렇지. 근데 이걸 다른 관점에서 보면 구천문과 철혈성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간의 평화로 각 세력이 축적한 힘은 분명히 강력하지만 철혈성과 구천문은 각각 대막과 묘강을 지배하는 패자들이야. 결코 만만한 곳들이 아니지.”
“맞습니다.”
“개방주가 안일한 태도를 꼬집고 있기는 한데, 효과가 별로 없는 모양이더구나.”
담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맹수인 호랑이도 사냥을 할 때는 전력을 다하는데 지금 백도무림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싸우기도 전에 이미 자신들이 이긴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당장 구천문의 경우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부님께서는 어디가 더 걱정되십니까?”
“두 곳 다 걱정되지만 역시 좀 더 신경이 쓰이는 곳은 철혈성이지. 구천문은 독에 대한 경각심이 있지만 철혈성은 그렇지 않으니까. 다들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