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장. 우리도 간다. -02
“어, 어라?”
오늘도 어김없이 반호진의 거처를 방문한 정현이 기문진 안에 들어가자마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문진이 펼쳐져서였다.
미혼진, 미로진이 아니라 오늘부터는 환상진을 펼친다고 설명을 듣기는 했으나 이런 기문진이라고는 전혀 듣지 못했기에 정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우후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시와요.
“으헥!”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나삼을 입은 여인이 교소를 흘리며 자신에게 손짓하자 정현이 기겁했다.
말이 나삼이지 거의 반라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난생처음 보는 여인의 가슴골과 도드라진 부위에 정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어머? 어딜 보시는 건가요?
“사, 살려 주세요!”
정현의 시선이 젖꼭지에 닿자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두 손으로 느릿하게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얼굴 가득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표정과는 달리 정현을 응시하는 눈빛은 매혹적이었다.
부르르르!
눈을 살짝 아래로 깔고서 지그시 쳐다보는 여인의 눈빛에 정현은 벌게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여인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정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정현이가 왜 저러는 거예요?”
기문진 안에서는 밖이 안 보였으나 밖에서는 안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정현의 행동들이 말이다.
그런데 사마의성이 환상진을 펼치기 무섭게 기겁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떨자 서조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는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였다.
“표정을 보니까 무서운 쪽은 아닌 것 같은데요? 공포심을 느낀 표정은 아니에요.”
“어떤 의미로는 무서운 것이기도 해. 더욱이 정현한테는 말이지. 무지에서 오는 공포라고나 할까?”
“무지에서 오는 공포요?”
정이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서조운도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이었다.
반면에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사마의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슬슬 환상진을 수련할 때가 됐다고 해서 펼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민망한 게 사실이었다.
“응. 강호에는 이런 격언이 있지.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를 조심해라.”
“아!”
“여자군요!”
반호진의 말에 정이륭과 서조운이 동시에 손뼉을 쳤다.
듣는 순간 환상진에 누가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그러면서 둘 다 똑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나신의 여인이 나왔다면 정현으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맞아. 근데 환상진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할 줄이야.”
“처음이라 그렇지 않을까요. 원래 어떤 일이든 처음이 가장 어려우니까요.”
“그래도 소림의 제자라면 이겨 내야지. 몇 년 뒤에는 삼대제자가 들어올 텐데.”
사마의성이 그래도 정현의 편을 들어 주었으나 반호진은 냉정했다.
아무리 사질이라 하더라도 아닌 건 아니었다.
고난과 역경이 오더라도 이겨 내야 하는 게 무인이었다.
“저도 형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왕 하는 거 강하게 키워야지요.”
“네가 키우는 건 아니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죠. 흐흐!”
넉살 좋게 웃었으나 서조운의 안면은 살짝 굳어져 있었다.
정현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여자에게 내성이 없어서였다.
“으아악! 항복! 항복요!”
“허어.”
그때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못 한 채로 쪼그려 앉은 정현이 항복을 외치자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면역이 없는 만큼 힘들어할 거라고 예상을 하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다.
“어떻게 할까요?”
사마의성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환상진이기에 육체적으로 타격을 받는 건 없기에 더 진행해도 상관은 없어서였다.
물론 정신적 충격이 때로는 육체적인 상처보다 크기는 하나 지금의 수준은 그 정도가 아니었기에 그래도 사마의성은 물어봤다.
“해제해 줘.”
“네.”
“허억! 헉! 사, 살았다!”
주변의 풍광이 안개처럼 흩어지자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정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정현의 입에서는 고통이 가득 담긴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따악!
“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정현이 머리를 부여잡고서 앞으로 넘어졌다.
대낮임에도 별이 보이는 듯한 고통에 정현은 온몸을 떨었다.
“엄살은.”
“진짜 아파요!”
“내 마음이 더 아프다. 불공을 어떻게 드렸기에 불심이 이리 약한지. 진짜처럼 보여도 허상임을 아는데도 그래?”
“지, 진짜처럼 보였어요. 전 본 적도 없는데 너무나 생생했다고요!”
“가슴이? 아니면 사타구니가?”
화아악!
정현의 얼굴은 물론이고 정수리까지 능금처럼 붉어졌다.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모습에 반호진이 키득거렸다.
간만에 제대로 건수를 잡은 것 같아서였다.
“사, 사백님!”
“어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의 알몸을 본 느낌이.”
“아, 알몸은 아니었어요! 옷을 입고 있었어요! 사, 살짝 비치기는 했지만요!”
능글맞게 눈썹을 씰룩이는 반호진과 달리 정현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한데 서조운과 정이륭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반호진과 정현의 대화에 둘의 얼굴도 어느새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호오. 그래? 근데 그 말은 보긴 다 봤다는 거 아냐?”
“아니에요! 두 눈을 감았어요!”
“근데 자세는 왜 그래? 왜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어?”
“이, 이건……!”
정현이 얼굴 가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의 남자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정현은 불법을 공부하는 승려였다.
무승이라고 해서 스님이 아닌 건 아니었기에 정현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두 손으로 중심 부위를 가리고서 엉덩이를 뒤로 뺐다.
자세가 조금 민망하기는 해도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역시 너도 남자긴 남자구나. 그래. 그게 자연스러운 거지.”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라고요!”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소리를 질러?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보지?”
“그런 거 아닙니다!”
“후후후.”
반호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 시선에 정현은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덩달아 서조운과 정이륭도 긴장했다.
“의성아.”
“네.”
“아직 더 펼칠 수 있지?”
“네! 괜찮아요.”
미로진이나 미혼진과 비교하면 환상진은 준비하는 데도 오래 걸리고 소모되는 심력과 공력도 상당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사마의성에게는 실전이었다.
구룡급 후기지수에게 환상진을 펼칠 수 있는 기회는 절대 흔하지 않기에 사마의성은 당차게 대답했다.
“좋아. 그럼 다음은…….”
스윽.
사마의성의 대답을 들은 반호진이 드디어 정현을 일별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이륭과 서조운을 번갈아 쳐다봤던 것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둘 다 반호진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평소와 달리 누구도 먼저 나서려 하지 않는 모습에 반호진은 사마의성을 바라봤다.
“제가 선택해요?”
“응. 어떻게 보면 네가 상대해야 하니까.”
“그럼 저는 조운이요.”
“아, 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선택하는 사마의성을 향해 서조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서조운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외침에도 사마의성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얄미운 미소를 머금었다.
“궁금하거든. 넌 어떻게 될지.”
“난 정현이와 다르거든?”
“글쎄. 내가 보기에는 오십보백보인 것 같은데?”
“전혀.”
“그럼 실력으로 깨 봐. 미혼진은 깨고 나왔잖아?”
사마의성이 히죽 웃으며 도발했다.
한데 서조운이 평소와 달리 머뭇거렸다.
정현이 처참하게 당한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에 자신이 없었다.
여인에 약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 들어가.”
“예에.”
더 이상 기다려 줄 수 없다는 듯이 반호진이 독촉하자 서조운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힘없이 기문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정이륭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주시했다.
다음은 그의 차례였기에 서조운을 예의 주시했다.
“그럼 시작할게.”
“……살살 부탁한다, 의성아.”
“수련인데 최선을 다해야지. 난 설렁설렁하는 법 몰라.”
“끄응!”
무슨 소리냐는 듯이 정색하며 말하는 사마의성의 대답에 서조운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서조운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처럼 서조운은 제아무리 환상진이 대단하더라도 절대 현혹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준비됐어?”
“좀 더 시간을 줄 수 있나?”
“그건 안 되고.”
“쳇! 매정한 녀석.”
“수련은 실전처럼.”
반호진이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문장을 꺼내며 사마의성이 씨익 웃었다.
저렇게 약한 소리를 하지만 막상 대결이 시작되면 누구보다 집중하고 열심히 한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그리고 사마의성에게서도 서조운은 아주 훌륭한, 아니 과분한 상대였다.
‘진짜는 지금부터야.’
정현은 사실 살살 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턱에 수염도 거뭇거뭇하게 난다고 하나 그래도 아직은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서조운은 달랐다.
구룡 중 한 명으로 무명을 날리는 염룡이 서조운이었다.
스르르륵.
또한 서조운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마의성은 정현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집중력을 보여 주며 환상진을 펼쳤다.
이윽고 사마의성의 섬섬옥수와도 같은 손가락이 거문고의 현을 연주하듯 부드럽고 경쾌하게 움직이며 서조운의 주변에 작대기를 박았다.
“으음!”
동시에 서조운의 입에서 묘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직경 이 장이 채 안 되는 원의 중심에 들어오기 무섭게 새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더니 반라의 여인이 나타나서였다.
가릴 곳만 겨우 가린 듯한 여자였는데 외모가 삼봉이나 난희주와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들어갈 곳은 쏙 들어가고 나올 곳은 확실하게 나온 절세미녀의 모습에 서조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라버니.”
“……진짜 같네.”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서조운은 이게 사마의성이 펼친 환상진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넘어갈 뻔했다.
외모와 몸매도 훌륭하지만 목소리도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청아했다.
뭇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색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사뿐사뿐.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던 정현 때와 달리 지금 나타난 여인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천천히 서조운에게 다가왔다.
눈부시게 새하얀 어깨를 드러낸 채로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걸어올 때마다 가슴 끝에 걸려 있는 나삼이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처럼 흔들렸다.
더불어 풍만한 가슴도 걸음걸이에 맞춰 부드럽게 출렁거리자 서조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격렬하게 뛰었다.
전라보다 보일 듯 말 듯 한 게 더 치명적이라는 말이 서조운은 문득 떠올랐다.
동시에 얼굴로 피가 쏠렸다.
아까 전 정현처럼 말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들리진 않지만 정현이 박장대소하는 광경에 눈에 훤했다.
좀 전에 그가 정현을 보며 웃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참기에는 여인의 유혹이 지나칠 정도로 강력했다.
툭.
“왜 눈을 감고 있으세요?”
“으헉!”
궂은일이라고는 전혀 안 했을 것 같은 새하얗고 긴 손가락이 가슴에 닿더니 느릿하게 복부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아래로 점점 더 내려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나.”
표정은 청순한데 눈빛은 요염했다.
거기에 만지면 터질 것 같은 폭발적인 몸매에 코앞에 다가와 있자 서조운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거기에 은근히 속이 비치던 나삼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 안이 훤히 보였다.
“나, 나무아미타불 과,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