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장. 우리도 간다. -01
눈부신 빛이 남궁호의 두 눈을 찌르듯 쇄도했다.
동시에 거대한 기의 폭발이 그를 덮쳤다.
모든 힘을 쏟아부은 만큼 충돌로 인한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온몸이 찢겨 나갈 것 같은 폭발을 버티며 남궁호는 이를 악물었다.
투둑. 툭.
천번지복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가시고 하늘 높이 솟구쳤던 흙덩이들이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짙은 먼지구름으로 인해 시야는 여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으음!”
여전히 검을 앞으로 내지른 자세로 남궁호가 침음을 흘렸다.
혼신의 힘을 다했기에 지금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공력은 물론이고 체력 모두 바닥났기에 기감도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남궁호는 먼지구름이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
휘이이잉.
그런 그의 마음을 자연이 알아준 것일까.
한줄기 시원한 강풍이 불어와 먼지구름을 날려 주었다.
그러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전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허허. 무승부로군요.”
“역시 그렇군요.”
상일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남궁호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오른손 주먹을 내지른 자세로 서 있는 상일기를 보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승부는 무승부라고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걸 쏟아부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일기의 모습에 남궁호는 시원하면서도 씁쓸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남궁가주님.”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상 대협 덕분에 초심도 깨달았고요.”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남궁호는 창천을 납검하며 정주하게 포권을 했다.
한 명의 무인으로서 상일기를 향해 존경을 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상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명이 쟁쟁한 염왕의 검을 볼 수 있었기에 상일기 역사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마주 포권했다.
“허어…….”
“……말도 안 돼.”
그런데 그 모습에 남궁세가의 삼남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하십대고수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남궁호가 무명의 무인과 동수를 이루었다고 하자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결과에 삼남매는 부친과 상일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문주님은 대단하세요.”
“염왕과 무승부라니. 그럼 이제 새로운 무림십대고수가 탄생한 건가?”
“괴왕의 자리가 공석이니 딱 맞기는 하네요.”
“어?”
서조운, 선우방, 모용척의 말에 남궁광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세 사람을 쳐다봤다.
하지만 셋은 남궁광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집중했다.
“당대의 천하십대고수는 달리 무림십왕이라고도 불리니까 왕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게 보기도, 듣기에도 좋겠죠?”
“권왕은 이미 주인이 있고.”
“명왕(冥王)은 어때요? 이륭이와 문주님이 익힌 무공이 명왕권이잖아요.”
모용척의 말에 서조운과 선우방이 눈을 크게 떴다.
듣는 순간 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거 괜찮은데?”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앞으로 이륭이 형이나 문주님께서 할 일과 딱 맞아떨어지기도 하고요.”
“내가 작명을 짓는 데도 감각이 좀 있지.”
민망함에 아무 말도 못 하는 정이륭과 달리 선우방과 서조운의 반응이 열렬하자 모용척이 콧대를 세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호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괜찮네.”
“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응. 문주님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반호진은 나란히 걸어오는 상일기와 남궁호를 주시하면서 대답했다.
전생에서 상일기가 얻었던 신권이라는 별호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별호라는 게 나중에 바뀌기도 했고.
‘나도 바꾸긴 해야 하는데, 귀찮네.’
어떤 이들에게는 꿈에 그리던 별호가 신룡이겠으나 안타깝게도 반호진은 예외였다.
지난 생에서 검신이라 불렸던 반호진이기에 아무래도 신룡이라는 별호는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
이른 아침부터 앞마당이 부산스러웠다.
평소라면 다 같이 사이좋게 체력 단련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얼마 전 떠난 남궁호와 삼남매처럼 오늘도 두 사람이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기분이 묘하네.”
“그러게요. 솔직히 말하면 가고 싶지 않아요. 너무 끌려가는 느낌이기도 하고.”
선우방과 마찬가지로 작은 봇짐을 등에 멘 모용척이 볼멘소리를 냈다.
스스로의 결정으로 떠나는 게 아니라 호출을 당한 것이었기에 모용척은 불만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아버지께서 부르는데. 가주님이시기도 하고. 그게 싫으면 소가주 직위를 내려놓아야지.”
“저는 내려놓고 싶은데요?”
“불가능하단 걸 너도 알잖아.”
“끄응!”
조금의 여지도 없는 선우방의 말에 모용척이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촉촉한 눈으로 앞에 서 있는 반호진을 바라봤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나 쳐다봐도 달라지는 거 없다. 그러니 그냥 가.”
“너무하세요.”
“그런 눈빛은 나중에 좋아하는 여자 생기면 그렇게 보고.”
“으윽!”
이별의 아쉬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반호진의 모습에 모용척이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선우방은 달랐다.
지금의 이별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오히려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아직 결정 안 된 거야?”
“아직은. 사부님과 함께 움직일 수도 있고, 따로 움직일 수도 있고.”
“네가 결정해도 되지 않아? 이제 그 정도는 되잖아?”
선우방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의 무경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동시에 시무룩한 얼굴로 축 늘어져 있던 모용척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 혼자만 가는 거면 그렇지. 근데 소림사 전체가 움직이면 얘기가 달라지지. 난 그냥 속가제자도 아니고 방장의 무기명제자니까.”
“아쉽네. 사실 나도 같이 갔으면 싶었거든.”
“금방 다시 만날 수도 있어.”
“그랬으면 좋겠다.”
“저도요.”
모용척이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반호진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지만 일단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자 옆에 찰싹 붙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반호진은 그런 강자 중의 한 명이었다.
“용의 칭호를 얻었는데 활약 좀 해야지. 너희는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차기 가주들인데. 일부러 전공을 세우려고 가는 후기지수들도 많아.”
“구 할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들일걸. 나머지 일 할이 그나마 기대해 볼 만하고.”
“일단 너희 두 명이 있잖아.”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동안 칭찬을 아낀 건 일행들을 위해서였지 진심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너답지 않게.”
“친구랑 동생이 전쟁터로 가는데 기는 살려 줘야지. 겸사겸사 아꼈던 칭찬도 해 주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불안하다.”
“맞아요. 차라리 따끔하게 지적을 해 주세요. 그럼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아요.”
선우방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모용척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조용히 인사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서조운과 정이륭이 박장대소를 했다.
“이제는 알아서 할 때도 되었잖아?”
“다녀올게.”
“그래. 몸조심하고. 척이도 무리하지 말고.”
“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넉살 좋게 대답하는 모용척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헤어지는 순간이 오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두 분 다 조심하세요. 아, 그리고 망신은 안 됩니다. 형님 얼굴에 먹칠을 해서는 안 돼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무운을 빌겠습니다.”
서조운을 시작으로 정이륭과 사마의성이 두 사람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데 서조운의 한마디가 모두를 폭소하게 만들었다.
상상도 못 한 말에 선우방과 모용척도 헛웃음을 흘렸다.
“곧 보자.”
“다녀오겠습니다!”
이별의 시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기에 선우방은 뭉그적거리는 모용척을 이끌고서 몸을 돌렸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괜찮겠죠?”
방금 전까지 놀리던 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서조운이 걱정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매일 지지고 볶으며 생활해서 그런지 이제는 고운 정 미운 정이 들 대로 든 상태였다.
그건 정이륭도 마찬가지였기에 슬그머니 반호진을 바라봤다.
“잘하겠지. 그동안 해 온 게 있는데.”
“역시 그렇겠죠?”
“방심하면 훅 가는 거고. 전장에서는 눈먼 칼이 제일 무섭거든. 억울하기도 하고.”
“어, 그럼 척이 형이 제일 불안한데.”
서조운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매일같이 티격태격하기는 했어도 모용척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게 모용척이었다.
얄밉기는 해도 싫어할 수가 없는 인물이라고나 할까.
“정 걱정되면 너도 같이 가든지.”
“에이. 그럴 수는 없죠. 저는 형님의 오른팔이지 않습니까!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형님의 옆자리입니다!”
“흠흠! 그럼 저는 왼쪽에 있겠습니다.”
헛기침을 하며 스리슬쩍 반대쪽에 서는 정이륭의 모습에 서조운이 눈이 흘겼다.
언젠가부터 은근슬쩍 그의 자리를 탐내는 것 같아서였다.
유이한 존재보다는 유일한 존재가 훨씬 낫듯이 서조운은 반호진에게 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뭐, 알아서들 해. 그보다 문주님은?”
“지금 방장실에 계실 겁니다.”
“사부님께서 하실 말이 있나 보네.”
“비슷한 연배라서 그런지 요즘에 자주 만나시는 것 같습니다.”
“좋지. 사형제들이 많다고 외로움이 없는 건 아니니까. 여러 가지로 비슷한 처지이기도 하고.”
정이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의 무림을 등지다시피 하며 생활한 게 상일기였다.
그렇다 보니 정이륭은 제자로서 이런 상황이 기꺼웠다.
반호진의 말대로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였다.
“갈 사람은 다 갔으니 우리도 이제 수련 시작해야지?”
“네!”
“빡시게 하고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오랜만에 고기 좀 구워 먹을까?”
“저는 좋습니다!”
한창 먹을 때인 서조운이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다.
반면에 사마의성은 건조한 반응을 보였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반응이라고나 할까.
그걸 본 서조운이 짐짓 조언을 하듯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너도 많이 먹어야 해. 지금은 체중이 너무 가벼워. 키가 있으니 근육이 확 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무공을 익혔다면 일정 수준 이상은 체중이 나가야 해. 그래야 무공도 제 위력을 발휘한다고.”
“나는 딱히 식욕이 없는 편이라.”
“그래도 먹어야 해. 먹는 것도 자기관리야. 형님도 늘 강조하시고. 맞죠?”
서조운이 칭찬해 달라는 듯이 반호진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 모습에 반호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실소를 흘렸다.
요즘 들어 묘하게 칭찬을 갈구하는 것 같아서였다.
질투까지는 아니지만 묘하게 사마의성을 경계하는 느낌이었기에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법가로 가겠다면 모르겠지만 무공도 같이 익힐 생각이라면 근육을 좀 더 붙이는 게 좋아. 무공을 보조적인 수단으로 삼을 생각이라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잖아? 그럼 체중에도 신경 써야 해. 내공은 절대 만능이 아냐.”
“명심할게요.”
조곤조곤 설명하는 반호진의 말에 사마의성은 곧바로 수긍했다.
지금껏 반호진의 말대로 해서 틀린 적이 없어서였다.
더욱이 무공에 한해서는 반호진의 말이 무조건 옳았다.
염왕 남궁호와 동수를 이루었던 상일기가 반호진과 심도 깊게 무론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는 걸 봤기에 사마의성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