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장. 새로운 십왕(十王). -02
“아, 잘 따라오고 있나 해서.”
“당연히 잘 따라가지. 우리가 숭산을 처음 오르는 것도 아니고.”
“맞아. 아빠가 마음먹고 이동하면 모를까 이 정도 속도는 우리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어.”
똑같이 생겼지만 성격은 확연히 다른 두 여동생의 대답을 들으며 남궁광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히 마음이 크게 상하지는 않은 듯했다.
남궁광은 그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빠,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야?”
“그럴 리가. 난 혹시나 걱정이 돼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 같은데?”
퉁명스러운 남궁소연과 달리 남궁수연은 마치 남궁광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내가 앓느니 죽지. 어휴.”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괜찮으니까.”
“자존심이 조금 상하는 걸 빼면.”
한탄을 하는 남궁광의 어깨에 쌍둥이 자매가 각자 한 손을 올렸다.
다독여 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남궁광에게는 더 안쓰럽게 다가왔다.
“미안하다. 내가 도움이 되질 못해서. 못난 오빠야, 나는.”
“왜 그래, 갑자기? 결혼하더니 철든 거야? 아니면 전쟁을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싱숭생숭하나?”
남궁소연이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궁광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너희들 때문이잖아.”
어느새 훌쩍 멀어진 남궁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궁광이 작게 말했다.
혹시나 들릴까 싶어서였다.
“나는 괜찮은데?”
“나도. 우리는 괜찮은 척하는 거 아냐. 진짜 괜찮은 거지.”
“맞아.”
괜히 쌍둥이가 아니라는 듯이 자매는 죽이 척척 맞았다.
남궁광이 한마디도 못 하게 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우리는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그래서 걱정하는 거야, 내가.”
“흥! 언제부터 우릴 챙겼다고? 결혼했다고 어른인 척하지 마.”
퉁명스럽다 못해 아주 톡톡 쏘아 대는 남궁소연의 대답에 남궁광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쓰럽게 느껴지다가도 이런 식으로 쏘아붙이면 그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렇지만 미우나 고우나 여동생이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챙겨야 했다.
“알았다, 알았어.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으마.”
“오빠. 오빠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글쎄다. 이미 두 번이나 까였지만 세 번째에는 성사될 수도 있지.”
두 번이라는 단어에 남궁소연이 쌍심지를 켰다.
하지만 남궁광을 노려보기는 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기분은 나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간다는 말도 있기는 한데. 그런데 오빠는 궁금하지 않아?”
“뭐가?”
“아빠가 저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데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게.”
“강제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잖아. 소림사랑 척지을 생각이면 모를까. 강요도 사람 봐 가면서 하는 거지. 나는 아버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나도 그걸 알지. 그렇지만 아빠는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분이잖아.”
남궁수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게 대놓고 탐을 내면서도 실질적으로 남궁호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 부친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리 반호진이 소림사 방장의 제자라지만 좀 소극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흐음. 그래서 직접 찾아가는 게 아닐까? 방법을 찾아서.”
“그런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아버지께서 가자니까 가는 거지.”
“어?”
소곤소곤 대화하던 삼남매의 시선이 앞으로 쏠렸다.
무엇을 봤는지 화들짝 놀란 부친의 목소리가 들려서였다.
“왜 저러시지?”
“새로운 사람들이 있네?”
“그러게.”
삼남매의 시선이 부친을 지나 새로운 얼굴들로 향했다.
일노일남이었는데 남궁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낡은 회의무복을 입고 있는 노인이었다.
한데 무슨 이유인지 남궁호는 경악한 기색이었다.
뒷모습만 보이는데도 삼남매는 그걸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주님.”
“이분은 누구신가?”
“허허허. 처음 뵙겠습니다. 상일기라고 합니다.”
반호진의 인사에도 남궁호의 시선은 상일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도를 갈무리한 상태임에도 상일기의 수준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남궁호는 반호진을 찾아왔음에도 정작 상일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죄송합니다. 남궁세가의 남궁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뒤늦게 상일기와 인사를 주고받은 남궁호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의 기억에 상일기라는 이름은 없어서였다.
그렇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하나뿐이었다.
‘은거고수.’
남궁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상일기 정도의 고수가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었다.
“따로 자리를 마련해 드릴까요?”
“아닐세. 내가 이곳까지 온 건 자네 때문이니.”
“흐음. 그렇습니까.”
“너무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거 아닌가?”
“좋아하기 힘들다는 걸 가주님께서도 알지 않습니까?”
여전히 철벽을 세우는 반호진의 화법에 남궁호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그래도 예의상 반겨 줄 법도 한데 그런 게 전혀 없어서였다.
“오랜만입니다, 반 소협.”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당황한 남궁호를 대신해 시기적절하게 남궁광, 남궁수연, 남궁소연이 인사를 해 왔다.
그러고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상일기를 쳐다봤다.
남궁호가 관심을 보이자 그들도 궁금했던 것이다.
“모두 오랜만입니다.”
“이곳은 인원이 더 늘었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저도 가정만 아니라면 이곳에 오고 싶었는데 말이죠.”
남궁광이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호승심이 짙게 서려 있었다.
반호진은 이제 격이 다른 존재가 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새로이 용의 칭호를 얻은 이들과는 할 만하다고 생각하기에 진심으로 겨루어 보고 싶었다.
“앞으로 기회가 많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반 소협이 일행들과 함께 본가를 찾아와 주신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남궁광이 많은 의미가 함축된 한마디를 건넸다.
평소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다.
그게 반호진에게는 조금 의외로 다가왔다.
결혼을 해서 그런지 성격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듯해서였다.
-언니. 저 사람은 누구일까?
-글쎄. 나도 처음 보는데? 근데 반 공자님의 선택을 받을 정도면 뭔가 있다는 뜻이겠지?
-무공 수준은 고만고만한 거 같은데. 일단 오빠보다는 확실히 떨어지잖아.
-나도 그게 의문이야.
남궁광이 반호진과 힘겹게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을 때 쌍둥이 자매의 시선은 사마의성에게 향했다.
부친의 반응 때문에 노인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역시 시선은 또래의 새로운 후기지수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반호진은 일행으로 받아들이는 명확한 기준이 있기에 쌍둥이 자매는 더더욱 사마의성이 궁금했다.
나름 이름을 날린 후기지수들조차 반호진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는데 딱 봐도 무공이 부족해 보이는 사마의성이 무리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자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그걸 모르겠어.
-지켜보면 알겠지? 근데 진짜 잘생기긴 했다. 서 공자랑 모용 공자와는 또 다른 느낌이네.
-으이그. 너 그게 가장 먼저 들어왔지?
남궁수연이 여동생을 타박했다.
하지만 남궁소연은 당당했다.
-외모가 남자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데! 다다익선이라는 말 몰라? 능력 좋고 못생긴 남자보다는 능력 좋고 얼굴도 잘생긴 남자가 백배, 천배 낫지!
-그건 인정.
남궁수연은 동의했다.
이건 굳이 그녀뿐만 아니라 남녀를 불문하고 같을 터였다.
“기회가 있다면 또 찾아가겠습니다. 우선 들어가시죠. 멀리서 오셨는데 차라도 한 잔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복잡한 눈빛으로 상일기를 바라보던 남궁호가 아들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상일기의 잔상이 깊게 남아 있었다.
그 정도로 상일기와의 만남은 인상 깊었으나 지금은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또르륵.
이제는 방인지 응접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반호진의 방에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쪼르르 앉았다.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 착석하는 네 명을 보며 반호진은 차호에 담겨 있는 차를 적당히 데웠다.
“고맙네.”
“별말씀을.”
“누구냐고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겠지?”
“제가 남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라. 인사도 나누셨는데 직접 물어보시죠.”
“허참.”
단칼에 거절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남궁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남궁호는 그저 고개만 두어 번 절레절레 저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나름 편안한 얼굴의 남궁호와 달리 자식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래서인지 셋 다 표정이 살짝 어색했다.
“자네도 알고 있으면 좀 도와주지 그러나?”
“제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네만.”
“각자의 생각은 충분히 다를 수 있지요.”
남궁호가 넌지시 떠봤으나 어림도 없었다.
능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반호진은 유려하게 그의 공격을 피해 갔다.
그런 반호진의 모습에 긴장이 좀 풀렸는지 남궁소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한마디도 지지 않아.”
“타고난 성격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진심이 눈곱만큼도 담겨 있지 않는 사과는 처음 보는군.”
“그럴 리가요.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화산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맞네. 가는 길에 잠깐 들렀네. 얼굴 안 본 지가 꽤 된 것 같아서 말일세. 놀러 오라고 아무리 서신을 보내도 답장이 없고.”
에둘러 말해서는 그대로 애매하게 대답했기에 남궁호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고.
또 서로 속마음을 다 아는 사이인데 돌려 말하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답장은 보냈습니다만?”
“세 번 보내면 한 번 올까 말까 하면서.”
“원하는 내용이 없어서 답장이 안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그렇게 답신을 보내나?”
정곡이 찔렸으나 남궁호는 되레 당당하게 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건 삼남매도 마찬가지인 듯 동시에 얼빠진 표정으로 남궁호를 바라봤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하나뿐입니다.”
“아네. 그래도 혹시 몰라 물어본 것뿐이야. 사람 마음이라는 게 늘 변화하지 않나. 일례로 뒷간에 들어가기 전과 후가 다른 것처럼 말이지.”
“흠흠!”
한참 예민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쌍둥이 여동생들 앞에서 뒷간 얘기를 하자 남궁광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정작 쌍둥이 자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대답은 제대로 해 드렸네요.”
“자네는 안 가나?”
“아직 따로 예정된 건 없습니다. 사부님께서도 별말씀 없으시고요.”
“운남성으로 갈 수도 있겠군.”
“가능성은 있지요.”
반호진의 대답에 남궁호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운남성으로 간다면 사천당가주인 당우혁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우혁은 반호진이 온 기회를 절대 놓치려 하지 않을 터였다.
‘그것만은 막아야 하는데.’
남궁호가 괜히 두 딸을 데리고 온 게 아니었다.
사람이라는 게 자주 보고,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가장 좋은 건 이번에 같이 가는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