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장. 알아서 굴러들어온 호박. -03
이마에 땀방울이 가득 맺힌 모습으로 인영이 정중히 부탁해 왔다.
누가 봐도 진심으로 보이는 모습에 정현이 오히려 당황했다.
이렇게 극진하게 부탁해 오는 건 처음이어서였다.
“아, 따로 절차가 있지는 않아요. 다만 워낙에 사백님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서 대부분은 미리 전서구나 인편으로 연락을 하고 방문하거든요. 그래도 거의 대부분이 까이지만요. 근데 혼자 오신 건가요?”
“네에.”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방문 목적을 여쭈어도 될까요?”
상대가 정중해서 그런지 정현도 자연스럽게 공손히 대하게 되었다.
승려도 사람인 만큼 예의를 차리면 그에 맞게 태도가 변하기 마련이었다.
“제 능력을 반호진 공자님께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애매모호한 답변이었으나 정현은 더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
나쁜 의도를 가지고 찾아온 것 같지도 않았고, 일단 무위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독공을 익힌 흔적도 없었고 나이도 약관이 안 되어 보였기에 정현은 안내해 주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했거든요. 가시죠.”
“네!”
안 그래도 샛길이기에 한줄기 불안감이 있었는데 소림사의 이대제자로 보이는 정현이 안내해 준다고 하자 인영은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좀 전과는 다르게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가서 그런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암자(庵子)로 보이는 두 채의 작은 목조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는데 앞마당에서는 대련이 한창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대단한 기도를 풍겼기에 인영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응? 손님이 오신 것 같은데?”
“어?”
동생들의 대련을 지켜보던 반호진이 선우방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정현의 옆에 서 있어서였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저 아이가 어떻게?”
“응? 아는 사람이야?”
“그런 건 아니고.”
반호진의 시선이 앳된 인상의 손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선우방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반호진이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자 호기심이 일은 것이었다.
“사백님! 손님을 모시고 왔어요.”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사마의성이라고 합니다!”
정현과 함께 걸어온 사마의성이 씩씩하게 인사해 왔다.
소림사가 있는 숭산에 와서 그런지 합장으로 인사해 오는 모습에 반호진도 반사적으로 읍을 하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러나 두 눈에는 여전히 놀란 기색이 서려 있었다.
“반갑습니다. 소림사의 반호진이라고 합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를 할까요?”
“저, 정말요?”
사마의성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렇게 단숨에 마주 앉는 자리가 만들어질 줄은 몰라서였다.
최악의 경우 문전박대까지 생각했었는데 흔쾌히 거처 안으로 들여보내 주자 사마의성은 놀랐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죠?
-응. 근데도 저렇게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건 저 사람에게 뭔가가 있다는 뜻인데.
지금까지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하지만 인사까지는 받아 줬어도 안으로 들인 적은 없었다.
초면에 한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선례가 지금 깨졌다.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글쎄.
서조운의 전음에 선우방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성별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단순히 옷차림과 체형만 보면 청년일 것 같기는 한데 또 놀라는 표정이나 목소리를 들으면 여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변성기가 올 나이는 지났을 것 같은데.
-목소리가 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너나 척이도 여장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잖아.
-여장이라니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서조운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잘생긴 건 알았지만 그래도 여장은 너무 갔다고 생각했다.
이건 모용척도 같은 생각일 터였다.
-행동거지를 보면 남자인 것 같은데. 걸음걸이도 그렇고.
-뭐, 여자보다 예쁜 남자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서조운은 이내 성별에 대한 관심을 껐다.
대신 무슨 이유로 반호진을 찾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사마의성이라. 사마세가의 후인인가?”
“응? 그러고 보니 성이 사마였었지?”
“저는 듣자마자 사마세가부터 떠올랐는데.”
모용척이 왜 이제야 알았냐는 눈빛으로 선우방을 쳐다봤다.
그러나 선우방도 할 말은 있었다.
“멸문한 지 오래되었잖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얼추 사십 년은 되지 않았나?”
“그쯤 되었을 겁니다. 이런 걸 보면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 같지는 않네요. 한때는 제갈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명문세가였는데.”
“위세가 대단하던 시절이 있었지. 제갈세가를 넘어서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몰락했죠. 여전히 오대세가에 속해 있는 제갈세가와는 다르게.”
“냉정하게 말하면 선택에 따른 결과지. 결과론적으로 보면.”
선우방이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람 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보기 힘들다지만 그래도 사마세가는 너무 급격하게 무너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마세가의 후인이 아닐 수도 있는데 너무 단정 짓는 거 아니에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사마라는 성이 희귀하기는 해도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아주 먼 방계일 수도 있고. 사실 후인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크고.”
너무 단정 짓고 말하는 것 같아 서조운은 반론을 제시했다.
당사자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도 좀 그랬고.
“난 그것보다 형님께서 처음에 왜 그렇게 놀랐는지가 궁금한데. 뭔가 아시는 게 있으니까 놀라지 않았을까?”
“저도 그게 궁금하기는 해요.”
시기적절하게 정이륭이 화제를 돌렸다.
사실 사마세가에 대한 것보다는 이게 더 궁금했다.
또 반호진이 처음 보는 사람을 처소 안으로 들인 것도 처음이었기에 다들 궁금한 눈으로 건물을 바라봤다.
또르륵.
처소로 들어온 반호진은 바짝 얼어 있는 사마의성의 모습에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차를 따라 주었다.
날씨가 날씨인 만큼 반호진은 미지근한 온도로 맞춰 주었다.
여름에는 차갑게 마시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미지근한 차를 선호했기에 반호진은 거기에 맞췄다.
‘사마의성이라니.’
처음 보자마자 반호진은 사마의성을 알아봤다.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습보다 훨씬 어리고 어수룩해 보였으나 사마의성을 알아보는 데 무리는 없었다.
워낙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인물이었기에 보는 순간 알았다.
그래서 정말 크게 놀랐다.
‘운명이라는 게 참 신기해.’
반호진이 포섭하려는 인재들 중에는 사마의성도 있었다.
그것도 서조운보다 위에 있던 게 사마의성이었다.
하지만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던 사마의성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자신을 찾아오자 반호진은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운명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난 생에서는 참 많이도 싸웠는데.’
반호진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몰락한 사마세가 출신인 사마의성은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러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사마세가를 다시 일으킬 수 없었다.
또한 기존에 있던 명문세가들은 경쟁자가 늘어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알게 모르게 사마의성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사마의성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끊임없는 견제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마의성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선택을 했다.
‘북해빙궁에 몸을 의탁했지.’
무인으로서의 사마의성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으나 군사, 책사로서의 사마의성은 천하를 쥐락펴락할 정도였다.
기기묘묘한 책략으로 백도무림을 수도 없이 난도질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과거 경쟁하던 제갈세가도 있었다.
‘중원무림을 희롱하던 사마의성이 나를 찾아올 줄이야.’
전생을 회상하던 반호진은 정신을 차렸다.
감회에 빠지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부터는 현재에 집중할 때였다.
스윽.
정신을 차리고서 사마의성을 바라보자 눈치껏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차를 홀짝이는 게 말이다.
“죄송합니다. 손님을 앞에 모셔 두고 딴 생각을 했네요.”
“아니에요. 오히려 무작정 찾아왔음에도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셔서 저는 감사한걸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하고요. 그런데 저를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반 공자님께 제 능력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사마의성은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차근히 꺼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으나 그 안에는 당찬 기운이 서려 있었다.
“능력을 보여 주고 싶다라. 조금 뜬구름 잡는 말 같은데요.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반 공자님께 저를 의탁하고 싶습니다.”
“저에게요? 저는 소림사의 일개 속가제자일 뿐입니다만.”
반호진이 짐짓 당혹스러운 척을 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달랐다.
예상하기는 했으나 진짜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기에 반호진은 내심 놀랐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충분히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서요. 이미 반 공자님께서는 많은 걸 이루고, 바꿔 놓으시기도 했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전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구천문과 철혈성은 각 지역의 패자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이에요. 철혈성은 역사가 짧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력이 약한 건 절대 아니에요. 대막에서도 절대고수는 늘 나왔어요. 단지 철혈성의 역사가 짧은 건 늘 새로운 절대고수가 나왔기 때문이에요. 구천문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묘강의 명문대파고요. 한 곳만 하더라도 쉽지 않은데 지금은 양쪽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에요. 중원무림의 전력이 나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요. 철혈성, 구천문과 싸우는 동안 어부지리를 노리는 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이 사마의성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반호진은 지난 생의 사마의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적으로서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상대였으나 같은 편이라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직은 많은 부분에서 경험이 부족했지만 그걸 빨리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마군사(魔軍師)가 이번에는 천하사패가 아닌 백도무림을 위해 싸워 줄 것이었다.
“사마 공자께서는 어디를 예상하십니까?”
“서장과 북해가 침공해 올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장이야 다른 곳들에 비해 살 만하다고 하나 그렇다고 야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북해빙궁은 대놓고 야욕을 드러냈었고요. 거기에 신강의 마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직 덜 여물었어도 마군사라 불리던 식견은 여전했다.
그걸 반호진은 이번 대화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도 사마 공자와 비슷한 생각입니다. 건재할 때의 중원과 달리 힘이 빠진 상태라면 당연히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미 전례가 있기도 하고요.”
“아.”
사마의성이 살짝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말해 달라기에 말하기는 했으나 그는 살짝 걱정했었다.
너무 허황되다고 화를 내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반호진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의견에 동조해 주었다.
“저를 찾아오신 건 아마도 사마세가를 재건하기 위해서겠지요?”
“어, 어떻게 그걸?”
“사마라는 성이 흔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정도의 혜안을 가졌다면 당연히 사마세가를 떠올리지 않겠습니까. 또 저를 찾아왔다는 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마, 맞아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저와 함께 세상을 바꿔 보시죠. 그리고 사마세가를 재건하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