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장. 알아서 굴러들어온 호박. -02
숨을 고르는 선우방을 향해 상일기는 자신이 느낀 걸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친분을 떠나 한 명의 선배로서 후배에게 진심을 담아 조언해 주는 것이었다.
또 앞으로의 전쟁에 있어 선우방이 큰 역할을 해 주길 바라기에 상일기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예.”
선우방이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용척이 나섰다.
그러고는 초반부터 전력을 다했다.
완급 조절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듯이 모든 공력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모용척의 파상공세에도 상일기의 운신은 여유로웠다.
츠츠츠츠!
검기와 검강이 거미줄처럼 뿌려지며 상일기의 움직임을 제한하려고 했다.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일기는 귀신같이 미세한 틈을 발견해서는 그리로 빠져나갔다.
후우웅!
그러고는 순식간에 모용척과의 간격을 좁힌 후 일권을 내질렀다.
어린아이도 펼칠 줄 안다는 정권 찌르기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단순한 정권 찌르기를 펼치는 이가 상일기라는 점이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강이 서서히 전신을 압박하는 걸 느끼자마자 모용척은 땅을 박찼다.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아냈기에 회피에 집중했다.
하나 그렇다고 도망만 치는 건 아니었다.
콰콰콰쾅!
정면대결을 피했을 뿐 승부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듯 모용척은 쉴 새 없이 견제 공격을 날렸다.
상일기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해서.
동시에 체력을 많이 소모하도록 유도했다.
퍼퍼펑!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용척의 얕은수는 이미 간파된 후였다.
일부러 체력전을 유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상일기는 딱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며 모용척을 몰아붙였다.
오히려 그가 똑같은 수법을 모용척에게 펼친 것이었다.
“이익!”
시간이 갈수록 급속도로 소모되는 내공과 체력에 모용척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법 버티네.”
“그러게요. 어제는 금방 끝나더니.”
“근데 확실히 형님과는 차이가 있는 거 같아.”
사부와 모용척의 대련을 지켜보며 정이륭이 중얼거렸다.
똑같이 최선을 다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가 보기에 마음가짐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아무래도 문주님께 깨지면 심적으로 좀 편한 건 있죠.”
“너도 그래?”
“사실 저는 별 차이 없어요. 형님께 지는 건 당연하니까요. 그리고 저는 목표가 형들이랑은 조금 달라요. 제 목표는 격차를 좁히는 거지 뛰어넘으려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허어. 이렇게 배신하기야?”
정이륭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 말하는 투가 그를 비롯해서 선우방과 모용척을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모는 것 같아서였다.
“배신이라니요. 저는 형들과 다르다는 걸 명확히 한 거죠.”
“우리만 나쁜 놈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그렇지.”
“그럴 리가요. 그리고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어휴.”
정이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얄미운 막냇동생이었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밉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무슨 대화이기에 한숨을 그렇게 푹푹 쉬어?”
“형님!”
앞마당과 연결되어 있는 오솔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서조운과 정이륭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이윽고 두 사람의 눈에 뒷짐을 지고서 느릿하게 산길을 올라오는 반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나 없는 동안에도 다들 열심히 수련한 것 같네.”
“볼일은 잘 보셨어요?”
“응. 다행히 좋게 잘 풀렸어.”
“축하드립니다!”
서조운이 정이륭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반호진의 옆에 서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 모습에 정이륭은 물론이고 반호진의 복귀에 다가온 선우방도 헛웃음을 흘렸다.
“축하할 것까지는 아니고. 근데 이륭이는 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거야?”
“조운이가 저를 배은망덕한 놈으로 몰아가서요.”
“배은망덕?”
“어떻게 된 것이냐면요.”
정이륭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있었던 이야기들만 담백하게 말했다.
잠시 후 설명을 다 들은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딱 내가 원하던 대로 됐네.”
“형님께서 원하던 대로요?”
“응. 나라고 그걸 못 느꼈을 것 같아? 너희들 은근히 얼굴에 티가 나. 특히 너나 척이는.”
“헙!”
정이륭이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어느새 합류한 모용척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있던 선우방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고.
“그, 그렇게나 티가 났어요?”
“근데 그건 나쁜 게 아니야. 좌절을 극복해야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법이니까. 나도 그랬고 말이지.”
남들은 그가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주지만 정작 반호진은 그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세상에 그보다 강한 무인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심지어 반호진은 싸움에서 패배해 죽기까지 했기에 자만심이 싹트려고 해도 틀 수가 없었다.
“형님도요?”
“나도 똑같은 사람이야. 너희들이랑 다르지 않다고.”
반문하는 서조운을 향해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라고 일행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렇게 대단한 무인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이룩한 경지는 과거로 돌아왔기에, 새로운 삶이 주어졌기에 얻은 것뿐이었다.
“형님께서는 늘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사실 와닿지는 않더라고요.”
“그럼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후기지수들을 떠올려 봐. 그들에게는 네가 지금의 나처럼 느껴졌을 거야.”
“흐음.”
모용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듣고 보니 아니라고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평범한 후기지수들에게는 그가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질 터였다.
“모든 건 상대적인 거야. 천하제일인이 되어도 늘 도전자를 상대해야 하는 것처럼 끝이 아니야. 결국 중요한 건 나의 길을 걸어가는 거지. 무의 끝에 도달하면 자연스레 원하는 걸 얻게 될 거야. 근데 남을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조운이 슬그머니 거들었다.
그에게 있어 반호진은 거의 신적인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형들은 광신도 같다고 농담 삼아 말하지만 서조운 본인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모든 이들이 반호진을 떠나더라도 그만은 죽을 때까지 반호진의 옆에 있을 생각이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여기 있는 식구들만 해도 몇 명인데.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건 우리들한테 어울리는 말이지.”
“근데 확실히 형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생각할 게 많아지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을 짚어 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선우방과 정이륭의 말에 모용척과 서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조용히 듣고 있던 상일기도 합류했다.
이번 말에는 그 역시 느끼는 바가 상당해서였다.
오히려 네 사람보다 그가 느끼는 게 더 많았다.
‘역시 이륭이를 맡기길 잘했어.’
상일기가 정이륭을 맡긴 건 단순히 반호진의 무경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무위 이상의 무언가를 반호진이 품고 있어서였다.
동시에 비슷한 또래니 자극도 훨씬 많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륭이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말이지.’
거기다 도움을 받는 건 정이륭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반호진과의 대화와 비무로 얻는 게 상당히 많았다.
늘 혼자서 수련했던 상일기에게 비슷한 경지에 있는 무인과의 대화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다.
하지만 이 또한 반호진의 노림수였다는 걸 그나 정이륭은 전혀 몰랐다.
***
한여름의 산행은, 그것도 땡볕을 맞아 가며 산을 오르는 것은 성인 장정이라고 해도 쉽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소실된 부분이 많은 가전무공을 익혔기에 왜소한 체격의 인영은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잘 찾아온 게 맞겠지?”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앳된 얼굴의 인영이 살짝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등봉현에서 이쪽 큰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소림사가 나온다고 했는데 제법 걸었음에도 일주문은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게다가 인영을 더욱 심란하게 만드는 건 하필 함께 산길을 오르는 이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듣기로는 향화객이 늘 많다고 했는데 다들 중식을 챙겨 먹는 것인지 다른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데.”
어차피 소림사로 향하는 관도는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샛길이 존재하기는 하겠으나 그 길을 인영은 몰랐다.
때문에 향화객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관도를 따라 오르고 있었는데 일주문도 안 보이고 사람도 안 보이자 인영은 불안했다.
“일단 쭉 가 보자.”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인영은 차근차근 산길을 올라갔다.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불안감은 점점 커져 갔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숭산에 온 목적을 떠올리며 쉬지 않고 올라가자 드디어 소림사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일주문이 보였다.
더불어 일주문을 스쳐 지나가는 소림사의 승려들도.
“와!”
그 모습에 인영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에게는 흔한 풍경일지 모르나 인영에게는 아니었다.
난생처음 소림사에, 그것도 혼자서 길을 묻고 물어 찾아온 것이기에 인영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이내 씩씩하게 일주문 옆의 샛길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초행길이지만 인영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일단 소림사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목적의 반은 달성한 것이었기에 인영은 아까 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꿀꺽!
그런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인영의 가슴은 누가 방망이로 때리는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되어서였다.
간택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인영이 만나고자 하는 인물은 상당히 깐깐한 성격이었다.
이제는 구룡(九龍)이라 불리는 아홉 명의 천재들 중에서도 독보적이라 그런지 같은 구룡조차도 성에 차지 않아 했기에 인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준비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그때 인영의 앞으로 작은 그림자가 휙 하고 나타났다.
빡빡 깎은 머리에 이마에는 계인이 찍혀 있었는데 동자승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살짝 좀 많아 보였다.
“아미타불.”
뒤늦게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정현이 황급히 합장을 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갑작스러운 인사에도 인영은 당황해서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아, 네!”
“혹시 길을 잘못 드셨나요? 소림사는 일주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데요.”
가끔 길을 잘못 드는 경우가 있기에 정현이 정중히 물었다.
길치라고 부르는 이들의 길눈이 다른 의미로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물었다.
“아니에요. 저는 반 공자님을 만나 뵈러 왔어요.”
“사백님을요? 혹시 약속이 되어 있으신가요?”
“그, 그건 아니에요. 여기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찾아온 거라서요. 혹시 연락을 먼저 드려야 한다면 말씀 좀 전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니면 따로 절차가 있나요? 제가 소림사에 방문한 건 처음이라 이런 절차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에게 알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