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장. 이제는 선택해야 할 때. -02
총관의 대답과 함께 문이 열리며 깔끔한 흑의무복을 입은 반호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번에 헤어졌을 때와 조금도 바뀌지 않은 모습이었다.
똑같은 무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라진 게 전혀 없는 반호진을 바라보며 금하륜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반 대협.”
“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텐데,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반 대협께서 저를 찾아 주신 게 말이지요. 반 대협의 소식은 지금도 틈틈이 듣고 있습니다. 특히 팔흉은 저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팔흉과는 저도 악연이 좀 있거든요.”
“여기저기 안 끼는 곳이 없는 이들이기는 하지요. 워낙에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들이기도 하고.”
“일단 앉으시죠. 안 그래도 반 대협께서 오신다고 해서 귀한 용정차를 준비했습니다.”
나이는 한참이나 어렸으나 반호진은 이제 무림의 거물이었다.
일개 후기지수로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었기에 금하륜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수장들을 대하듯 정중하게 자리를 권했다.
“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굳이 귀한 차를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차입니다. 하하하.”
“그럼 어쩔 수 없죠.”
금하륜의 너스레에 반호진은 옅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마치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문이 열리며 시비가 막 데운 용정차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사람도 그렇지만 차도 다양하게 마셔 봐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많으면 좋죠. 여러 면에서요.”
“맞습니다. 경험만큼 소중한 자산도 없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호연이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혼담이 오고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근데 마음이 가는 처자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아니면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 건지.”
금하륜은 여느 부모가 그렇듯 자식에 대해 하소연했다.
중원제일의 거부라 불리는 그이지만 역시 금하륜 또한 한 명의 부모였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제삼자가 뭐라 하기에 민감한 부분이었기에 반호진은 깊은 내용은 피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 반 대협께서는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같은 또래니 아무래도 이런 쪽의 대화를 좀 나누었을 것 같습니다만. 남궁세가에서도 함께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건 제가 말할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따로 들은 게 없기도 하고요.”
“역시 그렇군요.”
반호진이 완곡히 거절했으나 금하륜은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 대답에서 반호진이 금호연을 어찌 생각하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어서였다.
“장주님께서 직접 물어보시는 게 가장 빠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장주도 그로 인해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을 테고요. 사실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게 사람이지 않습니까.”
“허어. 맞습니다. 그걸 알고 계시는군요?”
“저도 반은 스님이지 않습니까. 속가제자이지만 어릴 때부터 불경을 매일 외우고 읊었습니다.”
금하륜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생과 인간에 대해 꽤나 깊고 밀도 있게 아는 듯해서였다.
단순히 불경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인생사인데 반호진은 그 부분에 의외로 해박한 듯했다.
“불경에 세상만사가 담겨 있다고 하더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닌 듯합니다.”
“그런 것도 있고, 또 스스로를 관조하다 보니 느끼는 게 꽤 많습니다. 명상도 자주 하고요.”
“명상이 참 좋지요. 자신의 내면을 보게 해 주니까요. 저도 매일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하고 있습니다. 반 대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공심법도 수련하고요. 하하하.”
무명으로 천하를 진동시키는 반호진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머쓱한 모양인지 금하륜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답지 않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이다.
한데 그 모습이 금호연과 상당히 닮았다.
웃는 모습이 말이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매일 꾸준히 하시면 좋습니다. 이왕이면 증손주까지 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음은 그러고 싶은데, 증손주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장 저만 하더라도 그러지 못했거든요. 지금 호연이가 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힘들 듯합니다.”
“미래는 모릅니다. 당장 내일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올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문제일 것 같습니다.”
금하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소장주가 되었으니 빨리 혼인하길 바라는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맺어지길 바라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의 기준에 맞는, 금호연의 짝으로 어울릴 자격은 있어야 했다.
개인의 능력이든, 아니면 집안이든 말이다.
“역시 결혼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괜히 인륜지대사라 부르는 게 아니겠지요.”
“가족이 되는 것이니까요. 특히나 차기 금가장주의 정실이 될 여자인데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죠.”
“반 대협은 어떠십니까? 저에게도 혼담이 물밀 듯이 쏟아진다는 말이 들립니다만.”
금하륜이 눈을 반짝거렸다.
요즘 금호연의 인기도 상당하지만 반호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금호연도 어디 가서 꿀리는 신분은 아닌데 앞에 있는 반호진과 함께라면 빛이 바랬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과분하게도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시긴 했는데,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하긴. 말을 냇가에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다른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로 보여도 본인이 싫으면 어쩔 수 없는 법이니.”
“그렇습니다. 지금은 혼자가 좋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어서요.”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것 말이지요?”
“맞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기는 합니다만.”
“한 가지 더요?”
“예. 누구나 꿈꾸는 겁니다만.”
“아.”
금하륜이 빙긋 웃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려서였다.
그러면서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고로 사내대장부라면 웅대한 목표가 있어야 했다.
“눈치채셨다시피 천하제일인이라는 꿈도 있습니다. 근데 그건 최종 목표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과정입니다.”
“허어.”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금하륜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하는 게 보통 사람들하고는 다르다는 걸 이번에 새삼 알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건 평화입니다. 평화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똑같은 일상이 지루하다고 하지만, 달리 말하면 큰 사건사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삶이 엄청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사실 행복이라는 건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나 찾을 수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금하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고 보니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맞는 말이었다.
전쟁 속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미치광이나 살인마가 아닌 한.
“그래서 장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바라는 평화가 장주님의 선택에 따라 달라져서요.”
“저의 선택에 따라서요?”
금하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금하륜의 안면이 굳어졌다.
“예. 철혈성, 구천문, 북해빙궁. 이 중에 장주님을 찾아온 곳이 있지 않습니까?”
“……!”
금하륜의 동공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반호진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시 왔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또 제가 소장주와 친분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쭈어보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하오문이나 개방도 알고 있습니까?”
금하륜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새외의 세력과 손을 잡은 건 아니지만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의심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림인들은 그 의심만으로 금가장을 공격하고도 남았다.
“개방과 하오문에서 들은 게 아닙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금가장과 그런 사이도 아니고요.”
“으음!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다만 출처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저도 확신을 가진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혹시나 해서 물어보려고 장주님을 찾아온 겁니다.”
“후우.”
침음에 이어 금하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근래에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금가장은 무림의 세력이 아닌 중원상계에 속한 곳이었다.
그런데 자꾸 새외무림의 세력들이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저는 장주님께 선택을 강요하려 온 게 아닙니다. 그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을 뿐입니다.”
“제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말이군요.”
“예. 어떤 선택을 하든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니까요.”
“만약 제가 철혈성의 손을 잡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는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독대하지는 못하겠지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반호진은 대답했다.
분노도, 배신감도 서려 있지 않았다.
한데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게 금하륜에게는 더없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역시 그런가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장이 바뀌어 장주님께서 저였어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것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장주님께 한 가지 바라는 게 있습니다.”
복잡한 표정으로 찻잔만 바라보던 금하륜이 고개를 들었다.
강요하는 것도, 요구도 아닌 단순히 바라는 게 있다고 말하자 가슴속에서 묘한 감정이 일었다.
“저에게 바라는 것이라. 궁금하네요. 그게 어떤 것인지.”
“중용을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흐음!”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일까.
금하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마음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협박과 설득을 교묘히 병행한 철혈성과 달리 반호진은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원래 있던 곳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
금호연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둘째를 소장주로 만든 걸 이용하면 충분히 백도무림을 지원하도록 꼬드길 수 있었음에도 반호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 점이 금하륜은 크게 다가왔다.
“장주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저 역시 바라지 않습니다. 백도무림은 중원을 지킬 힘이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것이고요. 그러니까 장주님께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자리를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자신 있으십니까?”
금하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도무림은 철혈성과 구천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묘강과 서장, 대막에도 상단을 보내는 만큼 새외의 정세에 밝았다.
“이런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자신이 없기에 장주님께 연락한 건 아닐까 하는.”
“어?”
“정말 자신이 있었다면 굳이 다른 패를 쥐려고 할까요? 저는 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냥 이길 수 있는데 왜 번거롭게 일을 벌여야 하죠?”
금하륜이 멍한 표정을 들었다.
곰곰이 곱씹어 보니 틀린 말이 아니어서였다.
정말 중원을 정복할 자신이 있었다면 굳이 금가장까지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자신들만의 힘으로도 가능한데 굳이 심력을 다른 곳에 분산시킬 이유는 없었다.
“……제가 이 점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믿어 주십시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저희가 이길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