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장. 지원군은 우리도 있네? -03
고목나무같이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언뜻 보면 시체처럼 보이는 잔흉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난희주에게는 너무나 섬뜩하게 다가왔다.
잔흉은 팔흉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이였고, 사람을 죽일 때 늘 미소를 짓는다고 했기에 난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근데 고것 참 맛있게 생겼구나. 내 하물이 아주 날뛰고 있어. 그 말은 네가 아주 미녀라는 뜻이지.”
난희주가 몸을 떨었다.
추악한 외모 때문에 여자를 극심하게 밝히는 이가 추흉이었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추흉은 송곳을 무기로 삼았는데 여자의 몸에 구멍을 뚫어 가며 강간을 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잔흉과 추흉이라.”
“이번에는 세 명이네요.”
“한 명 정도는 우리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갑자기 팔흉 중 두 명이 나타났으나 사인방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호승심을 불태웠다.
요흉의 경우 섭혼술 때문에 제대로 접근하기가 어려웠으나 추흉과 잔흉은 달랐다.
그녀와 달리 순수한 무인 쪽에 가까웠기에 넷은 둘 중 한 명 정도는 충분히 붙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형님?”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패배하더라도 도전하는 쪽이 훨씬 낫지. 다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위험하겠지.”
“강호를 위해서라면 전 언제라도 걸 수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물어 왔던 정이륭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중원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방천문이었다.
그런 방천문의 후계자가 그였기에 정이륭은 중원무림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마음가짐은 좋은데, 아직은 때가 아냐.”
“뭘 그렇게 쑥덕거리는 게야? 설마하니 세의 불리함을 느끼고 도망칠 궁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잔흉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저 미소의 의미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살의가 깊어질수록 잔흉의 미소 역시 덩달아 짙어졌기에 반호진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 고작 잔흉과 추흉 정도에 도망치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지.”
“크하하하!”
“청홍쌍흉을 잡았다고 아주 기세등등하구나. 그래. 사내대장부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긴장하기는커녕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반호진의 모습에 잔흉과 추흉이 각자의 방식으로 대소했다.
한데 가소롭다는 듯이 파안대소하는 둘과 달리 요흉은 묘한 눈으로 반호진을 주시했다.
저 말이 그녀는 이상하게도 허세로 들리지 않아서였다.
‘왜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숨겨 놓은 패가 있나?’
누가 봐도 불리한 건 반호진 일행 쪽이었다.
숫자가 좀 더 많다고 하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팔흉 중 무려 세 명이었다.
이 정도 전력이면 천하십대고수 중 하위권에 속해 있는 이들과도 자웅을 겨뤄 볼 만했다.
그런데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반호진은 너무나 여유로웠다.
“팔흉을 다 잡을 생각으로 왔는데, 고작 세 명에 기가 죽을 수는 없잖아?”
“뭐라?”
“미친놈이었구먼, 저거?”
웃음을 뚝 그친 두 노인이 살벌한 눈으로 반호진을 노려봤다.
좋게 대해 주었더니 정말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둘은 갈무리해 두었던 기도를 동시에 발산했다.
후우우웅!
천하십대고수보다 못하다지만 그래도 일평생을 무림에서 자기 마음대로 주유했던 이들이 팔흉이었다.
악명도 어떻게 보면 명성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두 노인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렸다.
“미치광이들에게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 정상 아닌가?”
“허!”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중얼거리는 반호진의 모습에 추흉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잔흉은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로 반호진을 향해 돌진했다.
“일단 그 몹쓸 주둥아리부터 찢어 놓아야겠어.”
“할 수 있다면야.”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잔흉이 삐쩍 마른 팔을 쭉 뻗었다.
뼈에 살가죽만 붙어 있는 듯한 팔이었으나 그의 손에 서린 기운은 가공했다.
집채만 한 바위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거력이 그의 오른손에 실려 있었다.
한데 어마어마한 거력이 실린 잔흉의 우수는 반호진의 면전에서 우뚝 멈췄다.
“어?”
반호진의 코앞에서 멈춘 자신의 손에 잔흉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쉽게 자신의 손이 붙잡히자 순간적으로 멍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놀람은 짧았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잔흉은 재차 왼손을 찔러 넣었다.
웅웅웅!
창졸간에 거력이 집중된 좌수가 반호진의 단전을 노리고서 파고들었다.
심장을 터트리면 즉사하기에 일부러 단전을 노린 것이었다.
꽈득!
잔흉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졌다.
생각지도 못한 고통이 왼손에서 엄습해 와서였다.
굳이 제대로 보지 않아도 감각이 말해 주었다.
왼손의 뼈가 모조리 으스러졌다는 걸 말이다.
“내 주둥아리를 찢어 놓겠다고 했으니, 나도 똑같이 해 주는 게 강호의 도리겠지?”
우드드득!
잔흉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먼저 붙잡혔던 오른손 역시 왼손과 마찬가지로 산산조각 나서였다.
게다가 반호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방금 전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실제로 입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자, 잠깐만!”
느릿하게 다가오기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반호진의 굳은살 가득한 오른손에 잔흉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동시에 추흉이 달려들었다.
잔흉이 당하면 그와 요흉만으로는 반호진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어서였다.
두 손이 박살 나기는 했으나 그래도 잔흉은 잔흉이었다.
양손을 직접적으로 휘두르지 않아도 잔흉은 싸울 수 있었다.
장강을 쏘아 내거나 아니면 두 다리로 반호진의 움직임을 방해해도 그나 요흉에게는 이득이었다.
그렇기에 추흉은 다급히 애병인 길쭉한 송곳을 꺼내고서 반호진의 옆구리를 노리고 쇄도했다.
“협공이라. 근데 이거 어쩌나. 지원군은 나도 있는데.”
“역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부님!”
허공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이륭이 반색했다.
하산하면서 헤어졌던 상일기의 목소리에 정이륭은 반가워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이곳에서 상일기와 재회할 줄은 정말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커헉!”
하지만 반가워하는 이가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세상의 이치였다.
그걸 증명하듯 추흉은 반호진에게 달려들다 말고 보이지 않은 암격(暗擊)에 당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상일기가 무형권강으로 추흉을 날려 버린 것이었다.
까드드득!
추흉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구는 사이 반호진은 말했던 대로 잔흉의 턱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으스러뜨렸다.
“우어어억!”
두부 뭉개듯이 너무나 쉽게 으스러지는 턱뼈에 잔흉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비명조차 마음대로 내지르지 못했다.
턱뼈가 박살 나며 신음 소리가 제대로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해서였다.
그렇지만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는 충분히 지켜보는 이에게 전달되었다.
슈우욱!
한데 양손에 이어 턱뼈까지 박살 난 상태인데도 잔흉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몸의 세 군데가 망가졌지만 그렇다고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잔흉은 한 줄기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단전의 모든 공력을 무릎에 담아 그대로 반호진의 복부를 향해 찍었다.
반호진의 손이 그의 몸에 닿는다는 뜻은 달리 말하면 잔흉의 무릎 역시 반호진에게 닿을 정도로 가깝다는 뜻이었다.
터어어엉!
하지만 잔흉이 모든 진기를 쏟아부어서 날린 회심의 일격은 너무나 허무하게 막혔다.
마치 이렇게 나올 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반호진은 왼손의 손바닥으로 잔흉의 슬격을 받아 내고는 그대로 잡아서 바닥에 내려찍었다.
짐짝 다루듯 거칠게 내려찍고 들어 올리고, 다시 내려찍는 걸 반복했다.
“으어어어…….”
등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은 뒤통수까지 이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척추를 타고 엉덩이로 내려간 고통은 발가락 끝까지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된 잔흉은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단순한 고통에 의외로 오래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케에엑!”
그런 점에서는 잔흉이 확실히 추흉보다 나았다.
추흉은 본인의 추악한 외모만큼이나 추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상일기가 복날에 개 패듯이 추흉을 두들겨 패고 있어서였다.
퍼엉! 퍼퍼퍼펑!
추흉을 상징하던 애병인 송곳은 어디론가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두 팔을 교차해서 상일기의 명왕권을 막았다.
물론 호신강기도 극성으로 일으키고서.
하지만 상일기의 명왕권은 그 모든 것을 우그러뜨렸다.
가로막는 모든 걸 분쇄시키며 추흉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먹였던 것이다.
쿵! 쿵! 쿵! 쿵!
결국 버티지 못한 추흉은 묵직한 발소리를 남기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충격을 다 해소시키지 못했음을 발소리로 알려 준 것이었다.
그러나 거리가 벌어졌음에도 추흉은 감히 도망칠 궁리를 하지 못했다.
그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멍하니 상일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 어디서 당신 같은 무인이……!”
그리고 그건 제법 멀리 떨어져 있던 요흉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지 요흉은 평소와 달리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상일기의 등장이 곤혹스러웠다.
무림십왕에 비견될 만한 무인이 하필이면 지금 나타났다는 게 요흉은 너무나 끔찍했다.
“하나뿐인 제자가 팔흉을 찾아다닌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그런데 어찌 사부 된 이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수 있을까. 물론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네. 굳이 내가 없어도 된다는 걸 잘 알거든. 근데 보고 싶어서 말일세. 못 본 사이에 얼마나 발전했는지 말이야.”
“……걱정하지 않았다고요?”
요흉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지금 한 말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의미를 그녀는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래서 요흉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보고 있잖은가.”
“당신이 없어도 신룡이 해결했을 거라고요?”
“알면서 왜 다시 묻는 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요흉에게 상일기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굳이 자신에게 확인을 받으려고 하냐면서 말이다.
“말도 안 돼!”
“믿기 싫으면 믿지 않으면 되네. 하나 그렇다고 한들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지.”
상일기의 시선이 진짜 시체처럼 누워 있는 잔흉에게로 향했다.
원래부터 볼품없는 외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했다.
오히려 반호진을 상대로 저 정도면 크게 선방한 것이었다.
스으윽.
상일기가 잔흉을 지켜볼 때 요흉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추흉과 잔흉 함께 셋이서 달려들어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 한 상대가 상일기였다.
아무리 그녀가 섭혼술의 대가라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비벼 볼 정도의 수준일 때나 통했다.
상일기는 말 그대로 격이 다른 존재였기에 요흉은 유혹은커녕 달려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조건 이 자리를 피해야 해.’
셋이서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데 지금은 잔흉과 추흉 모두 제압된 상태였다.
혼자서 달려들어 봤자 필패였기에 요흉은 도주만 생각했다.
두 노괴와 의기투합했던 건 까맣게 잊고서 요흉은 퇴로를 수십 번 고민했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도주로를 말이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오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