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장. 사냥의 시간. -04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검환이 땅에 닿자마자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땅거죽이 뒤집혀지며 지진이 일어났다.
그 광경에 충흉은 잠깐 해쓱해졌지만 이내 히죽 웃었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걸 새삼 느껴서였다.
“아직 좋아하기는 이른데.”
쑤아아앙!
막 반호진을 비웃으려 하던 충흉이 재차 몸을 날렸다.
여전히 검극은 그에게 향해 있었고, 또다시 검환이 날아왔다.
예의 소름 끼치는 파공음을 토해 내면서 말이다.
꽈아앙!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종이 한 장 차이로 검환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
또 한 번 충흉은 반호진의 공격을 피해 냈던 것이다.
“멍청한 놈! 백날 날려 봐라! 이 몸이 적중되나!”
“여전히 둔하네. 일부러 맞히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걸 보면.”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뭐, 일단 장단은 맞춰 주도록 하지. 나에게도 필요한 일이니까.”
쑤아앙! 쑤아아앙!
충흉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하나만 해도 섬뜩하기 짝이 없는 검환이 마치 궁수가 속사를 날리는 것처럼 연달아 쏘아져서였다.
심지어 그 모든 게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져 있었다.
“젠장!”
한 번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인생을 하직하게 된다는 걸 알았기에 충흉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맞는 즉시 즉사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기에 충흉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정신없이 이동했다.
그러면서도 충흉은 빠르게 눈알을 굴렀다.
처음 봤을 때는 건방지기 짝이 없어서 인생의 쓴맛을 죽음과 함께 알려 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바뀌었다.
‘튀어야 해!’
강환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건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섰음을 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수준이 막 초절정에 닿은 게 아니었다.
초엽도 아닌 최소 중엽에 다다른 수준에 충흉은 생각을 달리 먹었다.
인생의 쓴맛을 알려 주려다가 되레 자신이 당할 수도 있었기에 충흉은 망설이지 않고 도주를 택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오늘은 살려 두지만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도주를 선택했으나 충흉은 자신이 약해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상황이 자신에게 좋지 않을 뿐이라고 합리화했다.
일단 일대일의 정정당당한 승부가 아니었으니까.
수적으로도 불리하고 차륜전으로 달려드니 그로서는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었다.
“슬슬 끝내 볼까.”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는 충흉을 보며 반호진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충흉은 자신이 뛰어난 경신술로 검환을 피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못 맞힌 게 아니라 반호진이 일부러 맞히지 않은 것이었다.
충흉이 떠나면 이곳의 독충들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질 것이기에 그걸 방지하고자 반호진은 주변을 청소한 것이었다.
쑤우우웅!
그 사실을 증명하듯 단순히 일직선으로만 날아가던 검환이 처음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망칠 궁리를 하는 충흉의 다리로 말이다.
“어?! 어어?!”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환의 모습에 충흉이 식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에 화들짝 놀란 것이었다.
그런데도 충흉의 반응은 기민했다.
놀라면서도 그의 두 다리는 쉴 새 없이 움직였던 것이다.
쌔애액!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두 다리보다 검환이 더 빨랐다.
가공할 속도로 거리를 좁혀 왔던 것이다.
“니, 니미럴!”
그 모습에 충흉은 도망치는 걸 멈추고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펼쳤다.
주력이 독공이라고 하나 충흉의 무경 역시 낮은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독공이 워낙 뛰어나기에 무공이 가려진 것뿐이었다.
그리고 충흉의 호신강기는 일반적인 호신강기와는 궤가 많이 달랐다.
파다다다!
충흉의 앞으로 수천, 수만 마리의 독충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호신강기의 앞에 모여 벽을 만들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충흉을 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퍼퍼퍼펑!
“컥!”
다행스럽게도 독충들의 노력은 통했다.
비록 입에서 시뻘건 선혈을 토해 내기는 했어도 검환을 어찌어찌 막아 내기는 했던 것이다.
쑤아아앙!
다만 문제는 이제 겨우 첫 번째 검환을 막은 것뿐이라는 점이었다.
하나가 막히기 무섭게 반호진은 무심히 두 번째 검환을 쏘아 보냈다.
“우와.”
“그냥 단순무식하게 힘으로 찍어 누르네.”
“근데 중요한 건 통한다는 거죠.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랄까요.”
자신들은 그렇게 고전했던 충흉을 말 그대로 가지고 노는 반호진의 모습에 서조운과 선우방, 모용척은 감탄을 내뱉었다.
동시에 속이 시원했다.
얄밉게 뒤에서 독충들을 조종하고 암기만 던져 대던 충흉이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기만 하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만약 형님이 저희와 같은 수준이었다면 충흉을 어떻게 상대했을까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호진이라면.”
서조운의 중얼거림에 선우방이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이었어도 왠지 모르게 반호진은 충흉을 몰아붙였을 것 같았다.
나름의 방법으로 말이다.
꽈아앙! 꽈앙!
네 사람이 한가롭게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충흉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가까스로 검환을 막아 내고 있기는 하나 충흉 본인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자신이 패배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패배는 곧 죽는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무림공적이 되어 수많은 무인들의 표적이 되었음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게 그였다.
그런 자신이 고작 후기지수들에게 잡혀 죽는다면 그것보다 더한 치욕은 없었다.
그렇기에 충흉은 남은 공력을 빠르게 계산한 후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가지고 있던 암기들을 아끼지 않고 반호진에게 던졌다.
쌔애애액!
수십 년 동안 모으고 모은 귀한 암기들과 독이었으나 목숨보다 귀중하지는 않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날리더라도 살아남는다면 다시 만들고 채우면 되었다.
그래서 충흉은 아낌없이 모조리 쏟아부었다.
티티티팅!
하지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쏟아부은 암기들 중 반호진의 몸에 닿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특유의 재수 없는 얼굴로 반호진이 쇄도하는 모든 암기들을 튕겨 냈던 것이다.
시큰둥한 표정과 달리 반호진의 검술은 완벽했다.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충흉이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암기들을 전부 다 튕겨 냈다.
씨이이잉!
그럼에도 반호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암기들을 튕겨 내는 사이에도 그를 향해 검환을 날렸다.
‘기다렸다!’
한데 살벌한 파공음과 함께 쇄도하는 검환을 보는 충흉의 눈빛이 달랐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질린 기색이 완연했던 눈빛과 표정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꽈아앙!
이윽고 독충들로 이루어진 두꺼운 벽과 호신강기가 충돌하며 폭발이 일어났다.
한데 그다음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폭발과 함께 충흉의 신형이 튕겨져 날아갔다.
지금껏 버티던 모습과는 달리 오히려 폭발을 이용해 추진력을 얻어서는 그대로 몸을 내뺐다.
“크하하하! 다음에 보자꾸나, 재수 없는 놈아!”
삽시간에 엄청난 거리를 벌린 충흉이 득의양양한 광소를 흘리며 그대로 전력질주 했다.
그러나 큰소리와 달리 그의 두 다리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래서 충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서 달렸다.
“미안하지만 그렇겐 못 해.”
순식간에 점이 되었으나 반호진은 당황하지도, 분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늘 그랬듯이 느릿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툭 던진 검이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충흉의 단전을 꿰뚫었다.
“컥!”
그와 동시에 충흉이 신음과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배를 꿰뚫고 나온 낡은 검을 내려다보면서 말이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다시 도주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충흉은 그러지 못했다.
검에서부터 흘러나온 사나운 기운이 그의 내부를 헤집어 놓았기에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내가 이렇게……!’
아득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충흉이 울부짖었으나 애석하게도 그 소리는 입 밖에 나오지 못했다.
잠시 후 꿈틀거리던 충흉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악명으로 무림을 뒤흔들던 팔흉 중 한 명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마지막이었다.
***
산골 벽촌에서 볼 수 있는 외모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상당한 미모를 갖춘 여인이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미녀였는데 순진한 얼굴과 달리 몸매는 정반대였다.
헐렁하게 옷을 입었음에도 육감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쌍흉에 이어 충흉까지 당했다라. 이건 좀 놀라운데.”
중년미부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농염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홍쌍흉은 사실 합격술이 대단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적이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팔흉이 아니라 천하십대고수의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충흉은 달랐다.
혼자서 마을은 물론이고 성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는 인물이 충흉이었다.
“알려 준 바에 의하면 소수 인원으로 죽였다는데. 흐으음.”
여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긴장하거나 두려운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비음을 흘리는 그녀의 표정에는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젊고 강한 무인들이라. 아주 맛있겠는데.”
여인이 색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혀로 윗입술을 핥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취향이 바로 젊고 공력이 많은 남자였다.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는 없는 싱싱함과 탱글탱글함을 이십 대 청년들은 가지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게 늘 공력이었는데 충흉을 잡을 정도라면 기대해도 될 듯싶었다.
“전화위복이라. 화(禍)도 화 나름이지. 독도 잘 이용하면 약이 되듯이 말이야.”
철혈성에서 경고를 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라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남자는 언제나 먹이였고, 남녀 관계에서 그녀는 늘 암사마귀였다.
“안 그래도 신룡이 나타났다고 해서 한 번쯤은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저벅저벅.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의 눈에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인영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철혈성에서 말해 준 것과 달리 계집이 무리에 포함되어 있어서였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남자들보다 더 많았다.
“어쭈.”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늘 좋고, 아름답고, 예쁜 것만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잘생긴 남자들이 있는 건 좋았으나 그 옆에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미모를 가진 여인이 나란히 걷고 있는 건 싫었다.
이 세상에 예쁜 여자는 자신 한 명으로 족했다.
“그나저나 누구지? 저 정도 미모라면 세상에 알려져도 진즉에 알려졌을 텐데?”
심기 불편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여인이 중얼거렸다.
면사를 쓰고 있어 보이는 것이라고는 두 눈과 오똑한 콧대, 그리고 가늘고 긴 눈썹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외모의 수준을 알아보는 데는 충분했다.
딱 봐도 상당한 미녀임을 알 수 있었기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남자를 밝히는 요녀라서 그런가. 남자와 여자를 보는 눈빛이 극명하게 다르네요.”
“생긴 것대로 싸가지가 없구나?”
면사여인, 난희주의 말에 중년여인의 눈꼬리가 더 이상 올라가기 힘들 정도로 치솟았다.
매서운 눈빛으로 난희주를 쏘아봤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끼리의 기 싸움에는 난희주도 일가견이 있었다.
“아무리 할망구라지만 초면에 반말을 찍찍 해 대는 건 너무 싸가지 없는 거 아닌가요?”
“허!”
여인의 두 눈에 쌍심지가 확 켜졌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난희주의 입에서 흘러나와서였다.
동시에 한기가 내려앉았다.
여인에게서 흘러나오는 한기가 주변을 잠식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