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장. 사냥의 시간. -02
선우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쁜 의미로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닌데 반호진이 움츠러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럴 성격도 아니었고.
대신 무명을 날리는 만큼 반호진을 탐내는 이들도 많아질 터였다.
‘저 녀석처럼 말이지.’
반호진과 함께 덩달아 명성을 얻고 있음에도 모용척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경쟁자가 점점 더 늘어나니 모용척으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호진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니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었다.
“철혈성에 관한 건 개방과 하오문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자고.”
“잔당이 더 남아 있을까?”
“있어도 쉽게 움직이기는 힘들걸. 청홍쌍흉 때야 알려진 게 전혀 없었으니까 암중에서 움직이는 게 편했지만 지금은 다르지.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개방과 하오문이 뒷조사를 해 오는데. 설사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 많지는 않겠지.”
“그렇긴 한데.”
“왜? 겁나?”
느릿하게 걸어가던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놀리는 기색이 완연한 표정에 선우방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겁나기는. 이미 한 번 붙기도 했는데. 어차피 철혈성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고. 다만 변수가 걱정되는 거지.”
“올.”
반호진이 대견하다는 듯이 특이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선우방은 놀리는 듯한 반호진의 반응에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야 자신 있지만 아이들은 다르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도 자신 있습니다.”
생각이 많은 모용척만 빼고 서조운과 정이륭이 반박했다.
특히 서조운의 반발이 거셌다.
선우방이 알을 깨고 많이 강해지기는 했으나 그 역시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순수하게 공력만 따지면 반호진을 제외하면 그가 가장 많기도 했고.
“청홍쌍흉 때 누가 가장 많이 상처를 입었더라?”
“그걸로 기준을 정하면 안 되죠. 적을 얼마나 쓰러뜨렸는지로 잡아야죠. 괜히 전공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상처 입은 걸로 기준을 정하면 자신이 불리했기에 서조운은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대신 자신에게 유리한 걸 기준으로 삼았다.
“숫자를 센 사람이 있으려나?”
“저는 셌어요. 나중에 이런 말이 나올까 싶어서.”
“난 안 셌는데.”
“나는 셌어.”
어깨를 으쓱거리는 선우방과 달리 모용척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특유의 허세 넘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별걸 다 가지고 싸운다. 중요한 건 승리했느냐지 얼마나 죽였느냐가 아닌데.”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일행들의 모습에 반호진이 혀를 찼다.
덩치는 산만 한데 정신은 꼬마아이인 것 같아서였다.
“방이 형이 먼저 시작했어요.”
“그건 맞지.”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서조운의 말에 선우방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이륭이 서조운에게 동조하자 선우방은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내가 나쁜 놈이다.”
“에이.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단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는 거였지.”
“나한테는 그게 그거야.”
“아닌데.”
서조운은 절대 아니라는 듯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머리가 복잡했다.
구천문에 이어 철혈성까지 중원을 향해 야심을 드러내자 서조운은 자연스럽게 북해빙궁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때부터 형님께서는 알고 계셨는지도 몰라. 그래서 차근차근 준비해 온 거고.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돼.’
다른 일행들이 없었을 때 서조운은 반호진과 함께 직접 북해에 갔었다.
그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해에 간다고 설레어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반호진은 다 생각이 있어서 간 것이었다.
그래서 서조운은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형님께서는 대체 어떻게 아신 거지? 분명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하는 건 아닌데. 본가 이후부터는 늘 함께했고.’
서조운의 시선이 반호진에게로 향했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묻는다고 반호진이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럼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반호진이 말해 주지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서조운은 생각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말해 줄 거라고 말이다.
그를 비롯해서 일행들을 살뜰히 아끼고 챙기는 게 반호진인 만큼 말할 수 없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서조운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것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다들 너무 긴장 안 하는 거 같은데. 지금 우리가 어디에 가는지 기억은 하고 있지?”
“물론이지. 불귀곡(不歸谷) 아냐. 충흉(蟲凶)의 은거지라는.”
“저는 독충들이 득시글거린다기에 묘강이나 운남성에 있을 줄 알았어요.”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아서 다들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었지.”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우방, 서조운, 정이륭이 줄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셋 다 크게 긴장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야.”
“근데 독충 같은 벌레들은 키우는 데 환경이 중요하지 않나? 묘강은 새외니까 별개로 치더라도 운남성이나 광서성, 하다못해 사천성이 적합하지 않나?”
“사천성은 힘들지. 사천당가의 눈과 귀가 곳곳에 퍼져 있는데. 독초와 독충에 대해서는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고. 충흉에게는 오히려 최악이라 할 수 있지.”
“듣고 보니 그러네.”
“다들 작전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
서서히 불귀곡에 가까워지자 반호진이 슬쩍 물었다.
과한 긴장은 본 실력을 발휘하는 데 방해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 않는 것도 좋지 않았다.
모든 사건사고는 방심에서 비롯되기에 반호진은 분위기를 확 잡았다.
넷 다 고르고 고른 인재들인 만큼 고작 팔흉 따위에게 헛되이 잃을 수는 없었다.
“물론이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곱씹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하지 않으면 저도 실수하지 않습니다.”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답들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부분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네 사람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실수가 나오는 건 당연하고, 실패해도 되었다.
성공에서 얻는 경험보다 실패에서 얻는 경험이 더욱 컸으니까.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수습할 수 있으니까.
휘이이잉!
불귀곡이라는 이름답게 주변 경관이 한순간에 변했다.
푸르고 청량했던 숲속의 풍경이 몇 걸음 떼기 무섭게 을씨년스럽게 바뀌었다.
동시에 곳곳에서 귀곡성과 닮은 소리가 들려왔다.
“기문진법인가?”
“그건 아니고. 독충들 때문에 환경이 조금 바뀐 것 같은데.”
확연히 달라진 풍경에 반호진이 흙을 만지작거렸다.
묘하게 생기를 잃은 듯한 흙을 조금 집어 반호진은 냄새를 맡았다.
시큼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살짝 메마른 느낌이 들었다.
“독이 확실히 대단하기는 해. 일반 사람이 무인을 죽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독이기도 하니까.”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어요.”
서조운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청홍쌍흉 때의 예가 있기에 이번에도 정보가 새어 나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난희주가 두 눈에 불을 켜고 배신자들을 찾고 있다고 하나 워낙에 인원이 많았기에 단기간에 전부 다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일말의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고 서조운은 생각했다.
“그랬을 수도 있지. 근데 보통 무인이라면 모를까 독인이나 도둑들은 은신처를 쉽게 버리지 못해. 그동안 숨겨 놓은 게 많거든. 특히 독공을 익힌 이들의 경우 연구와 실험을 빼놓을 수가 없기에 설비 때문이라도 쉽게 은신처를 바꿀 수 없어. 시간이 충분하지 않는 한.”
“맞아.”
불귀곡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불길하고 깊은 골짜기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귀곡성 같은 바람 소리와 함께 통통한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풍채 좋은 체격에 비해 얼굴은 홀쭉하게 말라 있어 기괴하게 보였다.
“역시 알고 있었나?”
“네 녀석이 청홍쌍흉을 잡은 것도 알고 있지.”
“흐음. 정보력도 어느 정도 갖춰 있다는 뜻이렸다?”
“글쎄?”
장년인, 강호에서는 충흉이라 불리는 그가 음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소와 조롱과 뒤섞인 듯한 재수 없는 표정에 반호진이 히죽 웃었다.
저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뭐, 상관없지. 조금 뒤면 알아서 불게 될 테니까.”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 근데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이야. 이곳이 어디고, 여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지. 설마 그것도 모르고 찾아왔을까.”
너무나 태연한 반호진의 태도에 충흉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예상한 모습과는 전혀 달라서였다.
게다가 더 기분이 나쁜 건 나머지 네 명도 그를 앞에 두고서 크게 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꼴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게냐? 그래. 어디 한번 해 보거라. 하지만 아무리 발악해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반호진 일행을 한 명 한 명씩 노려보며 충흉이 호언장담했다.
사실 청홍쌍흉을 단독으로 처치했다면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일대일로는 반호진을 쓰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건 무인으로서 싸울 때였다.
충흉은 독충을 주로 다루는 독인이었고, 독인에게는 독인만의 싸우는 방식이 있었다.
스르르르!
거기다 이곳은 그의 은신처이자 영역이었다.
단순히 보이는 곳만이, 골짜기만이 그의 영역은 아니었다.
“거미다!”
“전부 다 독이 있을 거야!”
충흉의 손짓에 바닥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손가락만 한 시커먼 거미들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사방을 뒤덮은 것이었다.
“어디 한 번, 보여 보거라. 얼마나 준비했는지.”
순식간에 천지사방을 뒤덮은 독거미들을 조종하며 충흉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반호진 일행의 대비책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말이다.
스스슥!
“정면은 제가 맡겠습니다!”
물리지 않아도 보는 순간 서조운은 알 수 있었다.
거미들이 맹독을 품고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독거미들이 작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숫자가 워낙에 많았기에 잠깐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물릴 터였다.
화르르륵!
그래서 서조운이 나섰다.
독거미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건 비효율적이기도 하지만 체액도 문제였다.
죽인다고 해서 끝이 아니기에 서조운은 차라리 불태워 버리는 쪽을 택했다.
“열양공?”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기운은 순식간에 서조운의 장심에 집중되었다.
그러고는 그 극양지기를 전방을 향해 내뿜었다.
검보다는 장풍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하고 공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조운의 손에 수백, 수천 마리의 독거미들이 불타고 있음에도 충흉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다.
스윽.
그걸 증명하듯 충흉은 재차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형형색색의 거미들과 전갈, 지네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땅속에 있던 독충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한데 이번에 등장한 독충들은 독거미들과 달리 크기가 가지각색이었다.
“염룡이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 근데 그런 식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분명 서조운의 활약은 대단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상황임에도 되레 추풍낙엽처럼 독거미들을 불태웠다.
그러나 문제는 충흉에게 있어 독거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지금 꺼내 보인 건 조족지혈일 뿐이었다.
‘오만함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야.’
충흉의 두 눈이 흉흉하게 번쩍였다.
반호진 일행이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하나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이곳은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충흉은 자신이 있었다.
전부 다 독수로 녹여 버릴 자신이 말이다.
“차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