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장. 사냥의 시간. -01
무거운 침묵 속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을 때 반호진이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선우방을 위시로 일행들이 움직였다.
반호진이 청홍쌍흉을 맡았으니 자신들이 삼백 명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쳐라!”
“우리도 간다!”
“공격해!”
네 사람이 뛰쳐나가자 비천대주도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비천대는 물론이고 난희주를 능욕하려고 했던 이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적들이었다.
청홍쌍흉과 함께 난희주를 노렸기에 비천대주는 대성일갈하듯 포효하며 앞장서서 비천대를 이끌었다.
“죽여라!”
“저놈도 지쳤을 것이다! 허장성세다!”
“숫자는 우리가 많다!”
밀물처럼 달려드는 비천대의 모습에 철혈성의 무인들을 이끄는 수뇌부는 잠깐 고민했으나 이내 결정을 내렸다.
숫자가 더 많을뿐더러 질적으로도 그들이 우세했다.
물론 청홍쌍흉을 처치한 반호진이 걸리기는 했으나 숫자 앞에는 장사 없다는 말처럼 수뇌부는 인해전술을 선택했다.
또 앞으로의 전쟁을 생각하면 반호진은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여야 했다.
“신룡부터 잡아라!”
“무조건 신룡부터다!”
“어딜!”
“네놈들은 더 이상 못 간다!”
어눌하거나 이상한 사투리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으나 대충 뜻은 알 수 있었다.
굳이 말이 아니더라도 살의와 기세만 봐도 철혈성의 무인들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에 선우방과 서조운은 공력을 끌어 올리며 소리쳤다.
수적으로는 불리해도 기세로는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나를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형님께 단 한 발자국도 못 간다!”
“차하압!”
거기에 모용척과 정이륭이 합세했다.
특히 정이륭의 기세가 대단했다.
중원무림을 지키는 수호문파가 방천문이었기에 정이륭은 처음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철혈성의 무인들을 도륙했다.
“크아악!”
“왜, 왜 이렇게 강한 거야?!”
단 네 명이 뿌리는 기세에 삼백 명이 움찔거렸다.
그 정도로 네 사람이 흩뿌리는 기세는 강렬하고 대단했다.
“우리도 있다는 걸 알려라!”
“돌격!”
차차차창!
네 사람이 철혈성의 돌진을 막아 내자 비천대가 달려들었다.
비록 개개인의 수준은 철혈성의 무인들에 비해 뒤떨어질지 모르나 비천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부족한 실력을 악과 깡으로 채우겠다는 듯이 비천대원들은 독기를 두 눈에서 줄줄이 내뿜으며 적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곳곳에서 부상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다친 이들은 뒤로 빼!”
“자리 지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형을 유지해!”
“단 한 놈도 소문주께 가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버텨라!”
공격이 가장 집중되는 중앙을 선우방,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이 담당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다른 곳이 편한 건 절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실력이 뒤처지는데 숫자도 부족했다.
그렇다 보니 비천대는 금방이라도 철혈성의 무리들에 뚫릴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그 모습에 난희주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수신호위들을 보내야 하나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반호진이 남아 있기는 하나 그녀로서는 몸 상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기에 섣불리 도와 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제 슬슬 한계네.”
“오빠?”
“왜? 내가 다쳤을까 봐?”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닌데. 애들 실전 경험 좀 쌓게 해 주려고 지켜본 건데. 앞으로는 철혈성과 싸워야 하니까. 이번 전투는 어떻게 보면 예행연습이라 할 수 있지.”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태연한 표정과 목소리에 난희주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게 맞나 싶어서였다.
“예, 예행연습?”
“다행히 아직 죽은 이들은 없잖아? 다치는 것도 경험이야. 중상은 후유증이 남지만 경상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 돼.”
피이이잉!
그때 아주 작은 소성이 들렸다.
동시에 난희주의 눈에 비천대원의 목에 칼을 박으려던 흑의복면인 한 명이 머리를 부여잡고 우스꽝스럽게 뒤로 넘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오빠가 은근슬쩍 도와주고 있었구나?”
“어느 정도는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었으니까.”
꽈아앙! 꽈광!
은밀히 도와주는 이쪽과 달리 철혈성 쪽은 피해가 막심했다.
한 명이라도 더 빨리, 많이 죽여야 비천대의 부담이 줄어든다는 걸 알기에 서조운과 정이륭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애초에 반호진이 다치기는커녕 지치지도 않았다는 걸 알기에 둘을 비롯해서 선우방과 모용척은 모든 걸 쏟아부어 공격했다.
그래서인지 사인방의 주변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오빠에 대해 이제는 꽤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게 많네.”
“자책할 필요는 없어. 원래 남에 대해 전부 다 아는 건 불가능해. 부부도 서로 모르는 게 있는데.”
난희주의 말에 대답하며 반호진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을 뻗기 무섭게 검은 인영이 나타나 잡혔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스스로 달려와 붙잡힌 것처럼 보였기에 난희주는 물론이고 여자 호위무사도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빠각!
물론 반호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니, 시선도 두지 않은 채로 손아귀에 힘을 줘서 머리통을 터트렸다.
굳이 검을 쓸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피피피핑!
대신 왼손의 손가락을 연달아 튕겼다.
은밀히 접근하던 흑의복면인들의 미간에 정확히 지풍을 날린 것이었다.
투두두둑.
백발백중이라는 말처럼 단 한 명도 반호진의 지풍을 피해 내지 못했다.
그나마 한 명이 제법 실력이 뛰어난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마에 맞았지만 그래 봤자 즉사를 피하지는 못했다.
“비천대는 뒤로 물려.”
“알았어.”
원래부터 강했지만 청홍쌍흉을 가볍게 잡아내는 모습에서 난희주는 반호진의 실력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반문하지 않고 곧바로 회군을 지시했다.
“너희도 이제 그만 물러나.”
“알았다!”
“명 받들겠습니다!”
난데없는 회군 지시였으나 난희주의 명령은 지엄했다.
비천대로서는 무조건 따라야 했기에 군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인방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때 반호진이 입을 열면서 앞으로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지금이다! 전부 달려들어……!”
쩌저저적!
도망치듯 한순간에 물러나는 사인방과 비천대의 모습에 철혈성의 간부들이 득의양양해서 소리쳤다.
버티다 못해 물러나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사인방과 비천대는 절대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투둑. 투두둑!
그저 비킨 것뿐이었다.
반호진은 그 사실을 단 한 번의 참격으로 증명했다.
단 일검에 백여 명이 양분되어 고깃덩이가 되는 광경에 후방에서 지시를 내리던 간부들이 얼어붙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스극.
그러나 반호진은 굳어 있다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더 좋다는 듯이 재차 검을 휘둘렀고, 또다시 백여 명 이상이 도륙당하며 시체로 화했다.
“도, 도망쳐!”
“으아아악!”
단 두 번의 칼질에 칠 할 이상이 썰어지는 광경에 흑의복면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러고는 전원 다 몸을 돌려 도주했다.
저런 식의 개죽음은 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멈춰라!”
“뭣들 하는 짓이냐! 돌아와라! 돌아와서 싸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하는 부하들의 모습에 수뇌부가 악을 썼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반호진이 공격할 틈을 주었다.
퍽! 퍽! 퍽! 퍽!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간부들 중 몇 명이 뒤통수에 지풍을 맞고는 기절했다.
반호진이 보기에 가장 많은 걸 알고 있을 법해 보이는 이들만 제압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 버렸다.
“아는 건 청홍쌍흉이 가장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순순히 불겠어? 그리고 하오문이 통제할 수 있을까?”
“으음!”
전장이 얼추 정리되자 반호진의 곁으로 다가왔던 난희주가 침음을 흘렸다.
정보가 새어 나간 걸 꼬집어 말했음을 알아서였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 하오문의 수준으로는 청홍쌍흉을 감당하기가 벅찼다.
“철혈성에 대해서는 철혈성의 무인이 가장 잘 알 거야. 청홍쌍흉은 그냥 도구일 테고.”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해.”
“중요한 건 구천문에 이어 철혈성도 야욕을 드러냈다는 거고. 문제는 청홍쌍흉만 포섭한 건지, 아니면 팔흉 전체를 포섭한 건지 모른다는 건데.”
“그건 내가 알아볼게. 어차피 내부단속도 해야 하고.”
난희주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어떻게든 배신자를 찾아내겠다는 눈빛이었다.
아니, 반드시 찾아내서 죗값을 치르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 주면 고맙고.”
“근데…… 다들 놀라지 않네? 우리만 오빠한테 놀란 거 같아.”
“일행들은 알고 있었거든.”
“나만 몰랐다는 거야?”
난희주가 얼굴 가득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런 난희주의 표정에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는 알았잖아?”
“칫!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내가 내 입으로 나 이 정도라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러네.”
난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납득했다.
만약 그랬다면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 게 뻔했다.
“나도 체통이 있는 사람이야.”
“알지. 근데 괜찮아? 청홍쌍흉은 녹림대군과 달라.”
“괜찮아. 철혈성에 묻힐 테니까.”
“아.”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난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반호진이 청홍쌍흉을 잡은 건 대단한 일이었지만 철혈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번 일은 중원무림 전체를 뒤흔들고도 남을 대사건이었기에 반호진의 말마따나 묻힐 가능성이 컸다.
“일단 정리부터 하자고. 챙길 건 챙기면서. 물론 쓸 만한 건 별로 없겠지만.”
반호진 일행의 노력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사상자는 없었다.
그러나 부상자는 제법 되었기에 정리가 필요했다.
하나의 소식이 무림을 강타했다.
구천문에 이어 철혈성도 중원에서 활보하고 있음이 드러나서였다.
그것도 무림공적 중 하나인 팔흉의 청홍쌍흉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중원 전역이 분노로 들끓었다.
특히 대막과 맞닿아 있는 감숙성, 섬서성, 산서성 등등은 전운이 감돌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는 해. 구천문과의 전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반호진과 나란히 걸어가던 선우방이 걱정 가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단순히 구천문과 철혈성을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가 없어서였다.
두 곳이 동맹을 맺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영악한 거지.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기를 잘 잡은 거니까. 동시에 무림공적인 팔흉도 이용하고.”
“그건 진짜 상상도 못 했어. 적의 적은 동료라지만 팔흉을 품에 안을 줄이야.”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건 없어. 청홍쌍흉만 포섭한 건지, 아니면 팔흉 전체를 끌어안은 건지는.”
“곧 밝혀지지 않겠어? 개방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던데.”
“개방과 하오문이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두 곳 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만큼 대충 끝내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특히 하오문의 경우 소문주인 난희주를 노렸기에 더더욱 이를 갈고 있었다.
“네 소식에 놀라는 이들도 많아.”
“암암리에 다들 알고는 있었잖아.”
“흠흠!”
반호진의 말에 선우방과 모용척이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으로서는 부친에게 말을 안 할 수가 없어서였다.
대신 최대한 비밀을 지켜 달라고 약속했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