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장. 청홍쌍흉(靑紅雙凶). -02
부르르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슴없이 자신을 범하겠다고 천명하는 소흉의 말에 난희주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단순히 선포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서였다.
더욱이 팔흉은 공통적으로 색을 아주 밝혔다.
나이를 막론하고 여자라면, 일단 마음이 동하면 범하고 봤기에 난희주는 소흉의 발언이 허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감히!”
“어디서 그런 망발을!”
잔뜩 겁먹은 난희주를 호위무사들이 가렸다.
청홍쌍흉의 음탕한 시선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비천대원들의 노성이 장내를 갈랐다.
그러나 거친 노성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답네. 원래 개새끼가 할 줄 아는 게 짖는 것밖에 없거든.”
“사냥개도 못 되는 것들이.”
비천대원들이 일제히 살기를 내뿜었으나 흑의복면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름 하오문이 심력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비천대였으나 아직은 모두가 덜 여문 상태였다.
그걸 난희주도 알고, 비천대원들도 알았다.
“미안하지만 네놈들이 바라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이죠. 숫자가 많다고 무조건 이기는 게 아닙니다.”
난희주의 동요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지금 이곳에는 그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비천대는 물론이고 용의 칭호를 받은 이들이 곁에 있었다.
그중에 반호진은 녹림대군을 혼자서 쓰러뜨린 무인이었다.
“애송이들이 겁이 없구나. 본좌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들이로고.”
선우방과 서조운의 패기 가득한 한마디에 청홍쌍흉이 키득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애송이들이 호기를 부리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아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흔 남짓으로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둘 다 쉰이 훌쩍 넘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에게는 반호진 일행이 핏덩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철혈성의 발바닥을 빨면서 으스대는 것보다는 천둥벌거숭이가 낫지 않나?”
“뭐라!”
장대한 체구답게 목청이 쩌렁쩌렁했다.
딱히 목소리에 내공을 실은 것 같지도 않은데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대성일갈에 정이륭과 모용척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음공을 펼친 것처럼 귀가 아파서였다.
“네놈. 어떻게 알았지?”
“철혈성의 무인들과는 인연이 좀 있어서 말이지. 저렇게 꽁꽁 싸매고 있어도 척 보면 알지.”
“신룡이 철혈성도와 마주쳤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흥분한 거흉과 달리 소흉은 미심쩍은 눈으로 반호진을 노려봤다.
그러나 날카롭게 쏘아본다고 해서 그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기껏해야 철혈성이 말해 준 것만 알겠지. 아니면 어디선가 주워들었거나.”
반호진이 면전에서 조소했다.
마치 자신이 대단한 거물인 양 말하는 게 우스워서였다.
무림공적임에도 아직 살아 있다는 건 분명 스스로의 무경이 상당하다는 걸 뜻했지만 그게 절대강자와 같은 뜻은 아니었다.
만약 절대강자였다면 팔흉은 도망치거나 숨지 않고 무림을 지배했을 것이었다.
“네놈, 상당히 거슬리는데.”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아직 현실 파악이 안 된 것 같은데. 여기 있는 아이들이 철혈성의 무인들인 걸 아는데도 말이지.”
차차창!
소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의복면인들이 가지각색의 병장기들을 꺼냈다.
통일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병기류들이었으나 하나만큼은 동일했다.
다들 잡아먹을 기세로 반호진을 노려봤다.
“현실 파악이라. 토끼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호랑이가 겁먹는 거 봤나? 적어도 늑대 정도는 되어야지. 승냥이도 안 되는 것들이.”
“크하하하!”
패기 넘치는 반호진의 모습에 소흉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신룡이 대단하다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는데 과연 그 말대로였다.
여러 의미로 반호진은 대단했다.
또한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반호진이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소흉은 그걸 직접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네깟 놈이 감히……!”
스윽.
열양공 계열을 익혔기에 성격이 폭급한 거흉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얼굴을 붉히며 노성을 터트리자 소흉은 팔을 들어 동생을 막았다.
그러고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으며 반호진에게 말했다.
“너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다른 녀석들에게도 그럴까? 이번에 용의 칭호를 얻은 애송이들. 그래. 후기지수들 중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들이겠지. 그러나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직 기본기도 떼지 못한 비천대는? 말이 비천대지, 실상은 토룡대(土龍隊) 아니더냐?”
푸르르르!
대놓고 지렁이 부대라고 조롱하는 소흉의 말에 비천대주는 물론이고 비천대 전원이 입술을 떨거나 악물었다.
극도로 분노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흉의 멸시는 의외의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비천대의 뇌리에서 두려움을 날려 버렸던 것이다.
“고작 삼백여 명 가지고 유세는. 누가 보면 한 천 명 데려온 줄 알겠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기다려라. 이건 저놈의 격장지계(激將之計)다. 너를 흥분케 해서 달려들도록 만들려는 거야. 우리가 합격술을 펼치지 못하게.”
“아!”
화급한 만큼 단순한 성격의 거흉이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흘러내린 볼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얼굴의 무게만 재도 소흉의 몸무게와 엇비슷할 것 같았다.
“네놈들 따위에게 격장지계는 무슨.”
“역시 아직은 애송이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걸 보면. 헛헛헛!”
반호진의 도발에도 소흉은 넘어가지 않았다.
현재 반호진 일행이 이 위기를 모면할 방법은 그와 동생을 쓰러뜨리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최단 시간에.
그래야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만큼 소흉은 반호진이 어쭙잖은 격장지계를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일대일이라면 확실히 가능성이 있지.’
녹림대군은 알려진 것보다 더한 고수였다.
또한 꾀도 많은 이였다.
그렇기에 총표파자가 되었고, 녹림십팔채의 총채주가 되었음에도 무림공적에서 살짝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소흉도 혼자서는 녹림대군을 잡을 수 있다고 확실하게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나 굳이 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싸워 줄 필요는 없지.’
소흉이 비릿하게 웃었다.
모든 상황이 그에게 유리했다.
수적으로도 우세할뿐더러 질로 따져 봐도 그가 압도적이었다.
유일하게 반호진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일대일 승부였는데 소흉은 거기에 응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따로 상대할 생각도 없었다. 한 놈을 잡는 사이에 다른 놈이 도망치면 번거롭잖아. 한 번에 두 놈 다 처리해야 나도 깔끔하고 좋지. 안 그래?”
“이제는 허장성세까지? 입씨름으로는 천하제일이로구나.”
“그래도 불쌍해서 선공을 양보해 주었는데,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지.”
스슥!
반호진의 신형이 일순 사라졌다.
지켜보던 난희주나 호위무사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적어도 육안으로는 반호진의 모습을 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청홍쌍흉은 다른 모양인지 반호진이 땅을 박차기 무섭게 거흉이 앞으로, 소흉이 뒤로 섰다.
터어어엉!
청홍쌍흉이 자리를 잡기 무섭게 반호진의 발바닥이 거흉의 팔뚝에 닿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동해서 날린 반호진의 발차기를 거흉이 막아 낸 것이었다.
한데 거흉의 표정이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려다보듯 반호진을 경시하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잡고 있어!”
그러나 그 표정이 뒤에 있는 소흉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흉이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하게 막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소흉은 흉흉한 미소와 함께 양손에 소검을 쥐고는 거흉의 옆구리에서 펄쩍 뛰쳐나왔다.
발을 뻗고 있는 반호진의 중심축인 오른쪽 무릎을 노리고서 말이다.
꽈아앙!
하지만 소흉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흉의 팔뚝에 맞닿아 있던 반호진의 왼발이 정확하게 그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려서였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내려찍기에 소흉은 노리던 무릎을 포기하고 소검을 머리 위로 들어 교차해서 막았다.
“컥!”
그런데 가볍게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반호진의 발차기는 강력했다.
두 자루의 소검을 교차해서 막았음에도 그대로 소흉의 정수리를 찍어 버렸다.
순수하게 힘으로 소흉을 압도한 것이었다.
“이 자식!”
그 광경에 거흉이 화들짝 놀라며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내질렀다.
본능적으로 반호진을 밀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한데 워낙에 손바닥이 크고 피부색이 시커메서 그런지 거대한 흑곰이 앞발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쩌어어엉!
반사적으로 일장을 내질렀음에도 거흉의 오른손에는 거력이 담겨 있었다.
평생 동안 수련한 공력이 그의 의지에 따라 오른손에 실린 것이었다.
그러나 웬만한 중견고수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거흉의 일장을 반호진은 어렵지 않게 받아 냈다.
심지어 한쪽 발은 여전히 소흉의 머리를 찍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어, 어떻게?”
교차된 소검에 닿아 있는 반호진의 발뒤꿈치를 보며 소흉이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은 일격이라고 하나 거흉의 힘은 신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했다.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장사로 불렸고, 거구로 유명한 황보세가나 하북팽가의 무인하고 싸울 때도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압도했던 게 바로 거흉이었다.
그런데 그 거흉의 일장을 한 발을 든 채로 받아 내자 소흉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약하니까.”
뻐어어엉!
소흉을 짓누르던 발을 회수하며 반호진이 반대쪽 손으로 일권을 내질렀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펼칠 수 있는 정권 찌르기였는데 반호진이 펼치자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단 일격에 거흉을 날려 버렸다.
“크아악!”
받아치려 했음에도 결과는 거흉의 참패였다.
반호진과 달리 거흉은 볼썽사나운 자세로 뒤로 비참하게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입에서는 피를 토하면서 말이다.
“죽여 버리겠다!”
하나뿐인 동생이 처참하게 당해서 피를 토하자 소흉의 두 눈에서 살광이 폭발했다.
말 그대로 눈이 뒤집힌 것이었다.
하지만 격분한 것과 달리 소흉의 움직임은 간결하고 효율적이었다.
최적의 동선을 그리며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쉬이이익!
동생인 거흉이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신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소흉에게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빨랐고, 거기다 체구 역시 작았기에 몸도 가벼워서 더더욱 빠르게 느껴졌다.
그 장점을 소흉은 무인이 되어서도 십분 활용했다.
작은 체구와 남들보다 빠른 속도를 이용해 수많은 악행을 자행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소검을 들고 쇄도하는 소흉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지금껏 그의 속도를 따라잡은 무인은 없었다.
그보다 강한 고수는 있었을지언정 순수하게 속도로 그를 압도한 이는 없었기에 소흉은 자신했다.
반호진 역시 다를 게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쌔애액!
‘단숨에 죽이지는 않으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통에 겨워하도록 말려 죽여 주지.’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던 반호진이었기에 분노했음에도 소흉은 단번에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수백, 수천 번 뉘우치게 한 다음에 죽음으로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고통 없는 죽음은 축복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소흉은 눈부신 속도로 반호진의 등 뒤로 돌아가 엉덩이 바로 윗부분에 소검을 찔러 넣었다.
잔인하게도 단전을 노린 것이었다.
‘크흐흐흐! 손과 발이 닳도록 빌면서 정인이 짓밟히는 걸 지켜보거라!’
잔상조차 남기지 않는 속도였기에 소흉은 반호진이 피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그의 속도에 반응을 했다면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하는데 반호진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즉 여느 무인과 마찬가지로 소흉의 엄청난 속도에 조금도 반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흉은 곧 반호진이 배에 구멍이 뚫린 채로 주저앉을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터어어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