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장. 청홍쌍흉(靑紅雙凶). -01
호위무사 중 한 명이자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장년인이 심각한 얼굴로 난희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난희주가 지시를 내리기 전에 그가 먼저 움직이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즉시 장년인은 뒤로 물러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향한 것이었다.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겁난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근데 오빠는 걱정 안 돼? 만약 청홍쌍흉 말고 또 다른 팔흉이 나타날 수도 있잖아.”
“그럼 더 좋지.”
“응?”
난희주가 두 눈이 토끼 눈이 되었다.
상상도 못 한 말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런데 반호진은 난희주가 놀라거나 말거나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귀찮은 게 줄어드니까.”
“우와. 엄청난 자신감.”
“그 정도 실력이 있으니까.”
자신감이 넘치는 반호진의 발언에 난희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허세를 부리는 모습은 처음이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이게 허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빠가 거들먹거리는 건 처음 보네. 근데 다 생각이 있는 거지? 아니면 일행들과 비천대라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
“너 편한 대로 생각해.”
반호진은 굳이 설명해 주려 하지 않았다.
설사 있는 그대로 말한다고 한들 믿을 것 같지도 않았고.
사실 그게 현실적이기는 했다.
당장 반호진이 염왕을 상대로 이겼다고 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참, 구천문 소식 들었어?”
“어떤 소식?”
“구천문주가 운남성의 사도문파들과 마도문파들을 규합했어. 사천당가가 백도문파들을 끌어들인 것처럼.”
“그렇군.”
“안 놀라네?”
난희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 무림인들과는 반응이 달라서였다.
대개는 마도인들과 사파인들이 구천문에게 붙었다는 소식에 대노했다.
아무리 사상과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다고 하나 사파인들과 마도인들 역시 중원인이었다.
그런데 이민족이라 할 수 있는 묘강인들의 휘하로 들어가자 대부분의 무인들은 경악하고 분노했다.
한데 반호진의 반응은 그들과 달랐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 막말로 사천당가나 백도문파의 아래로 들어갈 수도 없잖아?”
“어, 그건 그렇지.”
봉문하거나 죽으면 죽었지 굴복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사도문파나 마도문파로서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반호진은 전생에서 천하사패가 중원무림을 분열시키는 걸 직접 본 이였기에 당황하기보다는 올 게 왔다는 쪽이었다.
“정세가 복잡해졌네.”
“예상과는 다르게 전쟁이 길어질 거 같아. 규모만 따지면 사천당가 연합에 크게 밀리지 않는 수준이야. 일단 묘강은 구천문의 영역이니까.”
“그럴 거야.”
중원무림을 정복했던 네 개의 문파 중 한 곳이 구천문이었다.
사천당가와 연맹을 이루는 문파들과 무가들이 많다고 하나 순수한 전력만 따지면 구천문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천당가 역시 저력이 있는 곳이었기에 반호진은 믿었다.
지금으로서는 사천당가의 암제와 독왕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이왕이면 구천문의 전력을 팍 깎아 줬으면 좋겠는데.’
만약에 사천당가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묘강까지 갈 가능성은 희박했다.
일단 거리상 멀기도 하거니와 묘강은 구천문의 영역이었다.
중원에서 싸우는 것과 원정을 가는 건 완전히 다른 만큼 제아무리 사천당가라고 할지라도 구천문을 멸하겠다고 묘강에 갈 리는 없었다.
그래도 멸문에 가깝게 피해를 입히는 건 가능했다.
‘힘을 회복하는 데 한 삼십 년은 걸리게.’
구 년 후의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서 앞으로 천하사패의 침략이 없을 리는 없었다.
언제가 됐든 힘을 회복하면 다시 야욕을 가질 터였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시간을 최대한 늦춰 놓아야 했다.
일단 그가 편안하게 천수를 누릴 때까지는 더 이상의 침공이 없었으면 싶었다.
“오빠는 어느 쪽이 이길 거 같아?”
“흐음. 글쎄?”
“뭐야? 이런 것도 안 알려 줄 거야?”
“내 생각이 중요하나. 결국 이길 곳이 이길 텐데. 워낙에 변수가 많기도 하고.”
“변수? 변수라고 할 게 있나?”
난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예상하기에는 구천문이 대단하다고 해도 결국 사천당가 연합이 이길 거라 생각했다.
고래로 수많은 곳들이 중원정복을 외치며 침공해 왔지만 결국 그걸 이룬 곳은 역사상 몇 군데 없었다.
심지어 그리 긴 시간을 통치하지 못하고 결국 쫓겨났고.
“왜 없어? 운남성과 사천성에 맞닿아 있는 서장이 있잖아.”
“어?”
난희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서장무림은 정말 생각지도 못해서였다.
묘강의 지배자인 구천문, 서장의 패자인 포달랍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힘을 합친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못 잡을 것도 없었다.
당장 운남성의 사파인과 마인들만 하더라도 구천문의 그늘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희박하기는 해도 말이다.
꿀꺽!
그걸 생각하자 난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에 구천문과 포달랍궁이 힘을 합친다면 지금의 사천당가 연합만으로는 상대하기 힘들었다.
적어도 사천성, 감숙성, 섬서성의 모든 백도문파들이 힘을 합쳐야 엇비슷할 터였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
“맞아. 근데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새외무림이 힘을 합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 혼자서 안 되면 둘이 함께하면 되잖아?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잖아.”
“그렇긴 해. 근데 왜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익숙하고 당연했던 것만 보니까.”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반응이었다.
아마 생각이 깨어 있지 않은 이라면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며 반호진에게 딴죽을 걸었을 터였다.
동시에 일부러 흘린 것이기도 했다.
“대단하네. 역시 오빠 정도의 고수가 되려면 남들과는 다른 생각과 관점을 가져야 하나 봐. 나 진짜 충격받았어. 예전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봐. 만약 구천문이 밀린다면, 명운이 위태위태하다면 포달랍궁에 손을 내밀 것 같기도 해.”
난희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찌 보면 말 그대로 하나의 추측일 뿐이었다.
과대망상일 수도 있었고.
그런데 만약 두 문파 간에 이미 오고 간 말이 있다면?
밀약을 맺었는데 아무도 모른다면?
그렇다면 전황은 한순간에 바뀔 수 있었다.
“내 말은 서장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거지. 벌써부터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고. 일단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그래야지. 일단 내가 파악한 장소는 저곳이야. 저기 언덕 너머에 집을 직접 지어서 생활한다고 들었어.”
“꽤나 외진 곳에서 생활하네.”
“무림공적이니까 아무래도 조심할 수밖에 없지.”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외딴 산속 한복판에 자리 잡은 청홍쌍흉의 은신처를 향해 걸어가며 난희주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백도무림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사실 그녀도 이곳을 알아내는 데 정말 애를 먹었었다.
만약 청홍쌍흉과 은밀히 거래하던 하오문도가 아니었다면, 그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없네.”
“응?”
“기척이 없어.”
“정말?”
난희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반문했다.
그러나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반호진이 은신한 암월교주를 찾아내서 때려잡았다는 걸 들었기에 그녀는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끼이익!
대답 대신 반호진은 가볍게 땅을 박찼다.
어느새 육안으로도 보이는 청홍쌍흉의 은신처를 향해 날 듯이 이동했다.
그러고는 꽤나 전문적으로 만든 모옥의 문을 열었다.
“떠난 지는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완전 떠난 게 아니라 잠시 어딜 간 것 같습니다.”
반호진에 이어 모옥에 도착한 서조운과 정이륭, 모용척이 날카로운 눈으로 곳곳을 살폈다.
특히 불을 지핀 흔적을 유심히 살펴봤다.
“반나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중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비천대주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런 쪽의 일은 그들이 전문가이지만 그래도 반호진이 기분 나쁘게 들을 수도 있기에 비천대주는 눈치를 살피며 의견을 꺼냈다.
“반나절이면 얼마 안 됐잖아?”
“물건들이나 가구들을 보면 떠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비천대주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일행들 중 누구도 기분 나빠 하지 않는 듯해서였다.
“재미있는 짓을 벌이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반호진을 향해 선우방이 물었다.
뜬금없이 재미있다고 하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아무래도 정보가 샌 것 같아. 더해서 우리가 모르는 일도 벌어지고 있고.”
스스스슥!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수십 개의 기척이 솟아났다.
순식간에 수백 명이 몰려와 물샐틈없이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 광경에 난희주는 물론이고 비천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팔흉은, 보통 혼자서 움직이지 않나? 청홍쌍흉을 제외하면.”
“맞아.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
얼추 보더라도 삼백 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 인원에 선우방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자신들은 함정에 빠졌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세력과 손을 잡은 걸까요?”
선우방과 달리 서조운은 침착했다.
그러면서 빠르게 난희주와 비천대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나 하오문이 배신했나 싶어서였다.
한데 얼굴을 보아하니 하오문이 배신한 건 아닌 듯했다.
“손을 잡았을 수도 있고, 포섭이 됐을 수도 있고.”
모두가 긴장한 것과 달리 반호진의 표정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갑작스럽게 포위를 당했음에도 담담했다.
“포섭요?”
“어디에?”
“무림공적이니 중원은 아니겠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서조운과 선우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백 명이 살기를 숨기지 않고 있는데도 너무 태연한 것 같아서였다.
저벅저벅.
그사이 정면의 흑의복면인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청홍쌍흉이 나올 공간을 만든 것이었다.
별호답게 각자의 상징과도 같은 청색과 홍색의 무복을 입은 청홍쌍흉이 비릿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런데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임에도 생김새는 극명하게 달랐다.
한 명이 키도 크고 뚱뚱한 데 반해 다른 한 명은 꼬마아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고 말랐다.
단순히 체형만 보면 비대한 이가 세 배는 더 컸다.
“하오문의 소문주 미모가 보통이 아니라던데. 확실히 소문이 그리 날 정도구나. 아주 그냥 눈빛으로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겠어.”
“흐흐흐흐!”
형인 소흉(小凶)의 말에 거흉(巨凶)이 음흉하게 웃었다.
난희주의 미색이 가히 천하절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였다.
그냥 본 것뿐인데도 하물에 피가 쏠리는 느낌에 거흉은 왼손으로 사타구니를 벅벅 긁었다.
“목표가 희주였나?”
“호오.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가? 혹시 정인 관계?”
소흉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난희주를 훑어보던 것과는 완전 다른 눈빛으로 소흉이 반호진을 쏘아봤다.
눈빛으로 갈아 먹을 듯이 말이다.
하지만 소흉의 살광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재미있겠는데. 네 앞에서 우리가 소문주를 범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