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124화 (124/468)

제 42장. 안 받아요. -01

또르륵.

오늘은 야심한 시각이 아닌, 아직 해가 떠 있는 시각에 반호진은 남궁호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물론 반호진이 원해서 만들어진 자리는 아니었다.

“표정이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음흉한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허참.”

다른 후기지수였다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태도였으나 남궁호는 헛웃음만 흘릴 뿐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서로가 원해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더욱이 칼자루는 반호진이 쥐고 있기에 남궁호로서는 저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백호은침이로군요.”

“내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차일세.”

“저는 숭산에서 자란 차를 좋아합니다.”

“나에게도 좀 보내 주게나.”

“자급자족하기에도 벅찹니다.”

단칼에 거절하는 반호진의 말에 남궁호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렇게 당하면서도 남궁호의 얼굴에는 기분 나쁜 기색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내일 아침에 떠난다고?”

“예. 혼례도 끝났으니 객은 일찍 떠나는 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귀찮아서 도망치려는 건 아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도망칩니까?”

“요즘 소림사에서는 제자들에게 입심도 가르치나?”

남궁호가 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째 한마디도 지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자네 성격이라는 거군. 근데 예전과는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는 말이 있던데?”

“누구에게나 질풍노도의 시기는 있기 마련이지요.”

언뜻 듣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았으니 저변에 깔린 의미는 달랐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걸 알면서도 굳이 짚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것에 흥분할 정도로 그는 수양이 얕지 않아서였다.

후르릅.

대신 여유롭게 차를 들이켰다.

비싼 차이니만큼 굳이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반호진은 느긋하게 차의 향과 맛을 음미했다.

“차는 마음에 드나?”

“비싼 차가 좋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아주 그냥 날이 바짝 서 있군.”

“가주님과 제가 편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어제의 일은 미안했네. 내가 너무 마음이 앞서 자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

다른 이였다면 남궁호의 말을 듣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겠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반호진이었다.

웬만해서는 사과를 하지 않는 남궁호의 말에도 반호진은 시종일관 심드렁한 태도를 유지했다.

“가주님의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해 드리겠습니다.”

“꼭 그렇게 조건을 걸어야 하나? 아니면, 보다 친해져야 하나?”

“글쎄요.”

이렇게 저자세로 대화한 지가 까마득했으나 의외로 남궁호는 기분이 언짢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러나 이건 반호진이었기에 드는 감정이었다.

일단 그보다 강하기에 이런 대접을 받아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매몰찬 거 아닌가? 그래도 나는 사과도 하고 나름 노력도 하는데.”

“저도 그걸 아니까 여기까지 온 겁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냥 떠났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않나.”

“저에게 하려 했던 말만 하시면 됩니다.”

“그 외에는 듣고 싶지 않다?”

남궁호가 다시 한번 헛웃음을 흘렸다.

푸대접도 이런 푸대접이 없어서였다.

정작 이 거대한 장원의 주인은 그였는데도 이상하게 눈앞의 반호진 앞에서는 작아졌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방장께서는, 알고 계시나?”

“사부님께서 모르신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대제자도 알고 있는 듯하던데.”

“저에 대해 많이 조사하신 모양입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에도 남궁호는 웃었다.

방금 전에 했던 반호진의 말마따나 죄를 지은 게 아니어서였다.

“자네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말일세.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나.”

“그렇습니까?”

남궁호의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는 듯이 반호진이 반문했다.

여전히 시선은 찻잔에 둔 채로 말이다.

“사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자네의 존재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고 전례가 없는 건 아니었죠.”

“본인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닌가?”

“그분들과 동급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말씀드린 겁니다.”

“말을 참 얄미울 정도로 잘해.”

남궁호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 밖에 말한 걸 다시 거둬들이지는 않았다.

이 정도 말에는 딱히 신경 쓰지 않을 것임을 알아서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참나.”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남들은 어떻게든 만들어 보고자 하는 독대 자리인데 반호진은 달랐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귀찮고 불편하다는 기색을 얼굴에 대놓고 드러냈다.

그 모습에서 남궁호는 을의 처지와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첫 단추를 잘못 꿴 내 잘못이겠지.”

“다른 후기지수였다면 통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것이고요. 늘 통했으니 그 방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고요. 그 악습이 지금까지 내려왔다가 저의 대에서 제자리를 찾은 거죠. 반대로 생각하면 이해가 참 쉬운데, 사람이라는 게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그걸 티 내려고 하더라고요. 자기 편한 대로 하려는 기질이 있다고나 할까.”

뼈를 때리는 직언에 남궁호는 입이 있음에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기에 그로서는 쓴웃음만 지었다.

동시에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남궁세가주였기에, 염왕이었기에 불만이 있어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만하게. 이제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알겠습니다.”

잔소리하는 건 반호진도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남궁호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여기까지 말한 건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반호진이 이런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따로 부른 건 자네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글쎄요.”

남궁호가 슬쩍 무게를 잡으며 운을 뗐지만 반호진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완벽하게 시치미를 떼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호는 그런 반호진의 표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자네의 짝으로 내 딸들은 어떤가?”

“싫습니다.”

“고민도 하지 않고?”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까?”

반호진이 되레 반문했다.

그로서는 고민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꽤 많은 제안을 받기도 했고.

지금과 같은 제안은 앞서 하북팽가에서도, 사천당가에서도 받았었다.

“사천당가와 하북팽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제안을 받았을 거라 생각하네.”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두 곳은 대뜸 딸과 혼인하라고 했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네.”

남궁호가 여유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두 곳과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단어와 말투만 조금 다를 뿐 반호진이 느끼기에는 대동소이했다.

“냉정하게 말해 내 딸들의 미모는 독봉에 비할 수 없지. 하나 그렇다고 미색이 크게 떨어진다고도 생각하지 않네. 이건 지극히 객관적으로 보고 하는 말이야. 내 눈에는 당연히 독봉보다 내 딸들이 더 예뻐 보인다네.”

“그럴 수 있지요. 이해합니다.”

반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자식이 더 예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그렇기에 이 부분에 대해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네의 관점에서는 다르겠지. 남자들의 구 할은 취향이 비슷하지만 일 할은 독특하니까. 자네가 그중 일 할에 속할 수도 있고.”

“저도 비슷합니다. 미녀 싫어하는 남자는 없죠.”

“그러나 단순히 미모만으로 자네 같은 후기지수를 잡을 수는 없지. 자네 입장에서는 굳이 남궁세가 말고도 선택지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혼사를 맺을 수도 없고. 그래서 나는 내가, 그리고 본가만이 해 줄 수 있는 걸 말해 줄 생각이네. 자네도 무인이니 목표가 있겠지? 그 목표를 이루는 데 물심양면, 전심전력으로 지원해 주겠네. 사실 방장의 제자이지만 자네는 속가제자이지 않나? 소림사가 배경이라고 하나 실권은 전혀 없는. 그렇다면 자네 입장에서는 본가가 충분히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해 보게. 사문이 소림사, 처가가 남궁세가일세. 천하제일인으로 향하는 길이 탄탄대로이지 않겠나?”

남궁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말만 들어도 창창한 미래가 그려져서였다.

이런 제안이라면 그 어떤 후기지수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고 남궁호는 자신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그의 머리 위에 있다는 점이었다.

“대신 저는 남궁세가에 묶이게 되겠죠. 천하제일인이 되었다고 한들 모든 건 남궁세가가 가지지 않겠습니까? 천하제일가라는 칭호와 함께.”

“그건 자연스럽게 딸려 오는 것일세. 중요한 건 천하제일인이지. 바로 자네가 말일세.”

“제안은 감사하지만 남궁세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또 소림사 말고 다른 배경을 가질 생각도 없고요.”

남궁호가 재차 설득하려 했으나 반호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분명 남궁호의 조건은 좋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남궁세가가 제대로 지원해 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중요한 건 남궁세가의 지원이 없어도 반호진은 천하제일인이 될 자신이 있었다.

“벌써부터 너무 단정 짓지 말고,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게 어떻겠나? 자네의 미래에 대한 일 아닌가? 며칠 동안 본가에서 머물면서 한 번 생각해 보게. 내 딸들도 만나 보고.”

“고민은 충분히 했습니다. 제 대답도 충분히 드렸고요. 더 이상 나눌 대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어!”

단호한 반호진의 대답에 남궁호가 탄식했다.

너무나 단호해서 어디 찔러 볼 구석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거기다 얼마나 영악한지 그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게?”

“더 있습니까?”

진짜로 나갈 생각이라는 듯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허리를 곧게 펴며 반호진이 물었다.

하지만 남궁호는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정도라면 반호진도 충분히 혹할 거라 생각했기에 차선책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있다가는 반호진이 이대로 소림사로 돌아갈 게 자명했기에 남궁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꼭 당장 소림사에 가야 하나? 여기까지 왔는데 나와 좀 더 무공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건 어떤가? 분명히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네. 솔직한 마음으로는 자네와 한 번 더 제대로 붙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여자로 반호진을 유혹할 수 없다면 남은 한 가지는 무공뿐이었다.

소림사에는 같은 무림십왕 중 한 명인 법왕 담현이 있다고 하나 그는 방장이었다.

아무리 소림사가 절이라고 해도 업무가 적지는 않을 테고 그렇기에 따로 만나는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그는 업무적인 부분에서는 조금 자유로웠기에 충분히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일단 붙잡고 봐야 해. 다른 아이들은 다 내보내고. 자주 보고, 만나면 사람인 이상 정이 들 수밖에 없어.’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야 했지만 그 결실과 열매가 반호진이라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놓치면 다음은 없다고 본능이 강렬하게 말하고 있었기에 남궁호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안 그런가?”

“네.”

“역시 자네도……. 응?”

남궁호가 눈을 크게 떴다.

예상과는 다르게 단칼에 거절해서였다.

반호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나섰다.

끼이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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