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장. 눈치싸움. -02
연거푸 하품을 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옆에 앉아 있던 선우방이 의아한 듯 물었다.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지만 이렇게 하품을 계속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조운과 정이륭, 모용척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신기한 눈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잠을 설쳤다기보다는, 못 잤다는 표현이 맞다고나 할까.”
“악몽이라도 꾼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좀 일이 있었어.”
주변에 하객들이 많았기에 반호진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굳이 시끄러운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어서였다.
두 사람의 격돌을 느낀 이들이 있겠지만 남궁호 때문에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스윽.
대신 팽만철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힐끔거렸다.
남궁호와 한판 벌인 걸 자신은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가 쳐다보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궁금하네. 어떤 일인지.”
“나중에 말해 줄게. 근데 잠을 못 잔 건 두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반호진의 시선이 선우방과 모용척에게 차례대로 닿았다.
그 못지않게 둘도 잠을 못 잔 것 같아서였다.
“난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어? 저도 그랬는데. 아버지께서 고민거리를 툭 던지는 바람에.”
“혹시?”
선우방과 모용척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이내 동병상련의 표정을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갈 사람은 빨리 가야지.”
“헉! 어떻게 아셨어요?”
“부모 마음이라는 게 다 똑같지. 자식이 잘되면 시집, 장가부터 보내려고 하니까.”
“헙!”
모용척과 선우방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건 서조운과 정이륭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선우방과 모용척이 벌써부터 혼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자 놀랐다.
“남궁 공자를 생각하면 방이나 척이가 이른 건 아니지.”
“그러고 보니 우리랑 동갑이었지?”
“맞아. 제갈 공자도 있고.”
여동생의 혼례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있는 제갈기정을 응시하며 선우방이 입을 열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기분이 참 묘할 터였다.
오랜 친구와 여동생이 결혼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렇게 들으니까 두 분의 나이가 확 와닿네요.”
“근데 난 아버지께 확실하게 말했어. 지금 당장은 갈 생각이 없다고.”
“에이. 그게 형 뜻대로 돼요? 저는 셋째고 형님은 속가제자라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두 분은 다르시잖아요.”
“그래도 선택지는 있어. 피할 수는 없어도.”
“오호? 그 말은 혼담이 들어온 곳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뜻이겠죠?”
서조운이 눈을 반짝거렸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으나 지금까지의 발언을 조합하고 해석해 봤을 때 나오는 결론은 이것이었다.
“얘기가 왜 그리로 흘러가?”
“당황하는 걸 보니 제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죠?”
“넌 별다른 얘기 없어?”
모용척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제대로 역공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선우방과 정이륭도 관심을 보였다.
서가장이 몰락한 무가라고 하나 서조운이 한창 뜨고 있는 후기지수이니 만큼 관심을 보이는 곳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예?”
“호오. 당황하는 걸 보니 뭔가 있나 보네?”
역공에 성공한 모용척이 히죽 웃었다.
특히 아주 자연스럽게 공수가 전환된 게 그는 마음에 들었다.
“저도 염룡(炎龍)이라 불리는데 없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염룡이라.”
잠깐 당황했을 뿐 이내 당차게 대답하는 서조운의 말을 들으며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거로 돌아오면서 가장 크게 미래를 바꾼 이는 누가 뭐래도 서조운이었다.
그렇다 보니 반호진은 자식이 인정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작 그는 전생에서도 자식을 낳은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마음에는 들어? 삼처사첩을 운운했던 만큼 결혼도 빨리하는 거지?”
“아니, 형!”
대뜸 삼처사첩을 거론하는 모용척의 말에 서조운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더니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에는 반호진 일행도 있었지만 모용희수와 당서린, 팽화영과 팽수영 자매도 있었다.
때문에 서조운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부끄러워하기는. 영웅은 호색이라며 삼처사첩을 운운하던 그 자신감은 어디 간 거야?”
“어머. 부인을 일곱 명 두는 게 목표셨어요?”
시기적절하게 당서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조운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네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조운의 예상과 달리 혐오하는 눈빛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동생을 놀리는 듯한 기색이었다.
정작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어, 그게 그러니까…….”
“뭘 부끄러워해? 그래 가지고 부인을 여러 명 둘 수 있겠어?”
“형님!”
“능력만 된다면야 삼처사첩이 흠은 아니지. 능력도 안 되는데 여자만 밝히고, 책임도 안 지면 문제지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어진 얼굴의 서조운을 보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어린애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막냇동생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서조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맞아. 책임만 제대로 진다면야 누가 뭐라고 할까. 본처가 싫다면 여자 쪽에서 시집을 안 가면 될 일이고.”
“그렇지.”
거기에 선우방이 거들었다.
서조운이야 어머니가 여러 명인 게 어색하겠지만 여기 있는 선우방이나 모용척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당장 사천당가만 하더라도 서자의 난이 벌어지기도 했고.
호색한이라 부인을 여럿 둔 경우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정략결혼을 한 경우도 명문세가나 군소방파에는 꽤 많았다.
“근데 결혼을 여러 번 하는 건 좋지만 부인을 잘 들여야 한다. 잘못 들이면 패가망신하는 거야. 또 잘 들여도 처신 한 번 잘못하면 아주 그냥 집안이 개판이 된다.”
“경험해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보고 들은 게 많으니까. 여자들끼리의 싸움이 얼마나 살벌한데. 넌 못 봤지?”
“저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딱 한 분씩만 계셔서요.”
선우방의 호언장담에 서조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단순한 말 몇 마디인데 이상하게 실감이 나서였다.
거기다 선우방의 말에 다들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부인이 많으면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게 많아. 기 싸움도 심하고. 상하 관계가 명확하다고 해도 실질적인 영향력은 또 다른 문제니까.”
“복잡하네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근데 잘 알고 계시는 걸 보니 형도 염두에 두고 계신 거 아니에요?”
“헉!”
훅 들어오는 서조운의 일격에 선우방은 말문이 막혔다.
순간적으로 부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인들의 시선이 전부 선우방에게로 집중됐다.
“방이 정도면 충분히 그래도 되지. 검룡인데.”
“생각이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요.”
반호진과 모용척의 말에 선우방은 슬그머니 팽수영의 눈치를 살폈다.
혼약을 맺은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른들끼리 의견을 주고받는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선우방으로서는 팽수영의 표정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은룡(隱龍)은?”
“예?”
갑자기 자신에게로 화살이 향하자 정이륭이 화들짝 놀랐다.
얌전히 경청하고 있었는데 반호진의 질문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정이륭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조운이에게도 혼담이 들어오는데 너라고 다를 건 없잖아?”
“맞아. 나랑 나이도 동갑인데.”
“어, 저는 딱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모용척이 너도 얼른 털어 내 보라는 듯이 팔꿈치로 찔러 댔으나 정이륭은 당황하지 않았다.
일행들과는 상황이 달라서 그런지 그에게 직접적으로 혼담에 대해서 말하는 이는 없었다.
숭산에서 지낼 때처럼 연서는 제법 받았지만 사실 편지만 봐서는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정이륭은 그저 예의상 답장만 보낸 상태였다.
“관심이 덜하다고 해서 너무 실망하지는 말고.”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요. 사부님께 말씀도 드려야 하고요. 척이나 조운이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을 수밖에 없는 이가 정이륭이었다.
반호진이야 정이륭의 실력도 알고, 방천문이 어떤 문파인지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
당장 같이 지내는 일행들조차 말이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을 수밖에 없었고, 반호진은 그걸 염려했는데 다행히도 정이륭은 그 부분에 개의치 않은 듯했다.
“저는 형님과 함께 지내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낯간지러운 소리는 하지 말고. 그런 말은 생각만 해, 생각만.”
“하하하.”
진심이 담긴 구박에 정이륭은 물론이고 모두가 피식 웃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법무도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전통 방식의 혼례는 계속 이어졌다.
혼례 복장을 입고서 예식을 이어 가는 남궁광과 제갈혜정을 지켜보던 반호진의 시선이 남궁호에게 향했다.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임에도 남궁호는 여전히 그를 힐끔거렸다.
누가 봐도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말이다.
‘욕심이 아주 뚝뚝 떨어지네.’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반호진은 남궁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사실 모르면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남궁호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번 생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 생각이었다.
‘딱 할 것만 하고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염왕도 지금보다 강해져야 하는데.’
남궁호는 분명 강했다.
하지만 지난 생과 비교하면 아직 덜 여물었다.
그리고 전생과 똑같은 수준으로는 패배를 뒤집을 수 없었다.
무조건 지난 생에 그가 이루었던 경지 이상으로 강해져야 했다.
‘어제의 비무가 충격요법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반호진은 냉정한 눈으로 남궁호를 살펴봤다.
어제 있었던 비무로 인해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남궁호의 성격을 감안하면 스스로의 패배를 부정하지는 않을 터였다.
자존심과 자긍심이 높지만, 누구보다 냉철한 게 남궁호였다.
물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건 쉽지 않았으나 반호진이 아는 남궁호라면 가능했다.
그렇다면 지난 생보다 더 빠르게 남궁호가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일단 두 명인가.’
반호진은 사부인 담현을 떠올렸다.
어느새 천하십대고수 중 두 명이나 미래를 바꾼 것 같아서였다.
물론 도왕이 있었으나 그는 충격요법이 통할 위인이 아니었다.
자기 꼴리는 대로 살 인물이었기에 반호진은 팽만철은 예외로 두었다.
‘거기에 한 자리는 공석. 미래를 생각하면 단위를 처리한 건 이득이지.’
녹림대군과 마찬가지의 길을 걷는 게 단위였다.
또한 그를 노리고 온 만큼 당연히 치워 버리는 게 맞았다.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과 주변이 다치지 않게 하려면 손을 쓸 때는 단호하게 쓰는 게 좋았다.
‘단점은 조금 귀찮아진다는 것 정도이려나.’
여전히 뜨거운 눈빛을 보내오는 남궁호의 시선을 피하며 반호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강렬한 안광을 뿌리는 건 남궁호만이 아니었다.
팽만철 역시 남궁호 못지않은 눈빛으로 반호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근처에 앉아 있는 모용궁 역시 대놓고는 못하고 힐끔거리고 있었고.
‘그래도 뭐,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귀찮음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애초에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천하사패와의 전쟁을 생각하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기에 반호진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남궁호나 팽만철의 생각은 그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결정을 내리는 건 자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