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장. 염왕(閻王) 대 검신(劍神). -03
반호진의 일검이 대기를 갈랐다.
보이지 않는 검격이 앞에 존재하는 모든 걸 가르며 남궁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그 기세에 남궁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반사적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쇄도하는 반호진의 검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터어어엉!
이윽고 반호진의 검격과 남궁호의 일검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근데 아무렇지 않은 반호진과 달리 남궁호의 영역은 크게 출렁였다.
남궁호의 지배를 받는 공간이 단 일검에 흔들린 것이었다.
그게 말하는 바는 딱 한 가지뿐이었기에 남궁호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차합!”
동시에 남궁호가 땅을 박찼다.
비무를 시작하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그가 먼저 반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기에 반호진은 쇄도하는 남궁호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쌔애애액!
그리고 남궁호 역시 반호진이 짓는 미소의 의미를 알았다.
여전히 믿기지가 않고, 이해도 되지 않았지만 검과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알기에 남궁호는 좀 전과 사뭇 다른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득했던 여유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쿠아아앙!
묵직하고 거대한 검격이 반호진을 쪼개 버릴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게다가 반호진이 상대해야 하는 건 남궁호의 검격만이 아니었다.
그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권역도 신경 써야 했다.
남궁호가 움직이는 만큼 그가 지배하는 공간 역시 함께 움직였기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왼쪽.’
창천검을 휘두르면서도 남궁호는 무형강기를 끊임없이 조종했다.
자신의 권역 안에서는 왕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쉴 새 없이 반호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중에 반호진의 몸에 닿는 공격은 없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다른 이들이었다면 위협적이었겠지만 아쉽게도 상대가 나빴다.
과거로 돌아와 육체가 젊어지면서 원래부터 예민했던 반호진의 감각은 더욱 민감해졌다.
그리고 비슷한 경지의 무인과 겨뤄 본 경험이 별로 없는 남궁호와 다르게 반호진은 수없이 싸워 봤었다.
그것도 비무나 대련이 아닌 생사결을 말이다.
남궁호는 경험에서는 자신이 압도적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스스슥!
그 사실을 반호진은 검으로 증명했다.
자신의 주위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남궁호의 공간을 참격으로 갈라 버렸다.
그 어떤 공격도 다 막아 내거나 튕겨 내는 절대영역을 말이다.
“허!”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의 갈라짐에 남궁호가 경악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러나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연달아 뿌려지는 참격에 그의 공간이 난자되듯 갈라졌다.
지이익! 지익!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남궁호의 검역이 사정없이 갈라졌다.
남궁호의 영역 밖에서 반호진이 파상공세를 날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에 파훼법을 찾아냈음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분명 우세를 점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반호진이 크게 유리한 건 아니었다.
‘역시 내공이 부족해. 장기전으로 가면 내가 불리해.’
산삼을 먹고 내공이 많이 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남궁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때문에 반호진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남궁호의 검은 충분히 봤으니 이제는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
“하아압!”
그걸 남궁호 역시 느낀 모양인지 모든 힘을 한 곳에 모았다.
이윽고 반호진의 검과 남궁호의 창천검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꽈아아앙!
굉음과 함께 우윳빛과 금광이 뒤섞인 눈부신 빛이 연무장을 가득 채우다 못해 허공으로 치솟았다.
더불어 어마어마한 폭발이 사방을 휩쓸었다.
힘 대 힘의 격돌에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승패가 갈라졌다.
투둑. 툭.
건곤일척의 승부답게 후폭풍이 가라앉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흙덩이들과 산산조각 난 돌들이 우수수 떨어지며 먼지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모습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둘 다 검을 내지르고 있는 자세였는데 몸 상태가 극명하게 갈라졌다.
말끔한 모습의 반호진과 달리 남궁호의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반호진이 충돌 직후의 폭발을 완벽하게 막아 낸 반면에 남궁호는 그렇지 못한 것이었다.
“…….”
검을 든 자세 그대로 서 있던 남궁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정확하게는 왼쪽 부분을 말이다.
예리하게 베어진 흔적을 본 남궁호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제 실력은 충분히 보여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없이 베어진 부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남궁호에게 반호진은 무심하게 한마디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비무가 끝났으니 가려는 것이었다.
애초에 원해서 한 비무가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남궁호의 대답도 듣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렸다.
휘이이잉.
반호진이 떠나고 쑥대밭이 된 연무장에 홀로 남은 남궁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반호진이 서 있던 자리를 보며 남궁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충격과 공포를 한숨과 함께 털어 내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이게, 말이, 되나?”
망연자실한 얼굴로 남궁호가 중얼거렸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남궁호는 지금의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살갗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그리고 검을 쥔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이 모든 게 현실임을 명명백백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끝까지 갔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흐릿했던 초점이 빠르게 돌아왔다.
정황만 보면 그의 패배였다.
그런데 만약 반호진의 검이 옷깃을 벤 게 전부라면?
일부러 옷깃만 벤 게 아니라 가까스로 왼쪽 가슴만 살짝 검으로 베어 낸 것이라면 승패는 결정 난 게 아니었다.
물론 억지일 수도 있었다.
반호진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운 좋게 가슴 부근을 벤 게 아니었다.
“아니지. 나이를 생각하면, 배분을 생각하면 내 완패야.”
남궁호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구차하게 변명하는 게 더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내대장부라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게 비록 경악스러울 정도의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차대 천하십대고수가 아니라, 이미 천하십대고수였어.”
시원하게 패배를 인정하자 남궁호는 반호진이 어째서 신룡이라는 별호를 탐탁지 않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왕의 칭호를 받아도 부족할 마당에 후기지수들과 엮으니 반호진으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 생각이 없었으나 남궁호는 홀로 그렇게 단정을 지으며 피식거렸다.
동시에 더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
“반드시 데려와야 해.”
사실 그는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조금 고민했었다.
반호진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으나 그에게 있어 딸은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의 가주이기 앞서 그 역시 한 명의 아빠였다.
그래서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무조건이야.”
반호진을 만나기 전에는 고민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남궁호는 반호진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눈을 빛냈다.
선우청은 앞에 앉은 아들을 보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허허허허! 내 아들이 검룡(劍龍)이라 불리는 날이 오다니!”
“민망합니다.”
“허어! 민망하기는! 자랑스러워해야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훨씬 커진 선우청이 히죽 웃었다.
선우방은 부끄러울지 모르겠으나 그는 아니었다.
후기지수들 중 손꼽히는 강자가 되자 선우청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는 평생 동안 이루지 못한 꿈을 선우방이 이루어서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용의 칭호를 얻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지. 강호에 고수는 모래알처럼 많아. 후기지수들 중에서만 돋보이는 것이지 천하를 놓고 보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정말 고생 많았다. 그리고 내가 이루지 못한 걸 이루어 줘서 고맙구나.”
“아닙니다. 제가 한 건 솔직히 별로 없어요. 그냥 늘 하던 대로 노력했을 뿐입니다. 다만 지금의 결과가 나온 건 호진이 덕분이에요.”
“영향이 꽤 크지.”
선우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들이 달라진 데에는 반호진의 영향이 크다는 걸 그 역시 인정했다.
어떻게 보면 선우방을 낳은 건 그이지만 키운 건 반호진이었다.
“호진이가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못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더더욱 잘해야 한다. 마음으로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 표현을 해야 한다. 아, 이참에 내가 선물을 해 주어야겠구나.”
“참고로 호진이는 돈 엄청 많아요. 암월교를 토벌하면서 얻은 돈이 엄청나요.”
“그, 그러니?”
선우청이 말을 더듬었다.
선우세가의 재정상태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선우청은 성의 표시로 용돈을 주는 건 포기했다.
“저도 꽤 벌었고요. 물론 가장 큰 건 경험을 얻은 것이지만요. 이런저런 경험이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조운이, 척이, 이륭이가 끊임없이 자극을 주기도 하고요.”
“얘기는 많이 들었다. 반 공자의 간택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꽤 많다고.”
“직접 보시면 더 놀랄 거예요.”
선우방이 실소를 흘렸다.
은근히 그에게 어떻게 하면 반호진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이들이 상당했다.
아니, 물어보는 걸 넘어 금품으로 유혹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발 자신도 합류시켜 달라면서 말이다.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다. 너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실력이 대단하니까. 일부러 그렇게 모으기도 쉽지 않을 텐데.”
“하지만 가장 돋보이는 건 호진이죠. 사실 목표이긴 한데, 이룰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일단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볼 생각이에요.”
“그 정도야?”
“네. 알려진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에요.”
선우방이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모든 이들이 반호진을 향해 미래의 천하십대고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건 반호진에 대해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반호진은 차기 천하십대고수가 아니라 이미 천하십대고수였다.
‘아마 알려지면 무림의 모든 무인들이 경악하겠지.’
비록 말석이기는 하나 단위 역시 엄연히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었다.
그런 이를 반호진은 어렵지 않게 쓰러뜨렸었다.
그날의 충격을 떠올리며 선우방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친구이니 가장 잘 알겠지. 그런데 인생이라는 건 말이다. 죽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고. 그러니 너는 열심히, 꾸준히 노력하면 된다.”
“그럼요. 제가 아버지께 배운 게 바로 그건데요.”
“허허허!”
선우청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빈말일지라도 기분이 좋아서였다.
“문제는 호진이도, 아이들도 엄청나게 노력한다는 거지만요.”
“그래도 이만큼 올라오지 않았더냐.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네가 원하는 곳에 와 있을 것이야.”
“네.”
“흠흠! 그보다 너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다.”
선우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 다르게 부친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였다.
그게 선우방은 의아했다.
“어떤 거요?”
“커험! 하북팽가주의 장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