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장. 염왕(閻王) 대 검신(劍神). -01
널찍한 방에 호롱불 하나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바람에 따라 춤을 추듯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근엄한 인상의 중년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내 소개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예.”
이번 생에서는 초면이지만 지난 생에서는 함께 전장을 구른 사이였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한눈에 남궁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앉지.”
“예.”
짧은 대답과 함께 반호진이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 반호진의 모습에 남궁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아무리 대단한 후기지수라도 그와 대면하면 긴장하기 마련인데 반호진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귀찮은 티를 풀풀 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부른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군.”
“정상적인 이유였다면 이 시간에 초대하지 않았겠죠.”
“자네도 알다시피 아들의 혼례 준비로 정신이 없었네. 이제야 겨우 짬이 났다고나 할까.”
“그런가요.”
대답은 했으나 딱히 수긍하지는 않았다.
저 모든 게 변명이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마음만 먹으면 잠깐의 시간을 만드는 건 남궁호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걸 잘 알기에 반호진은 삐딱하게 대답했다.
“믿지 않는 모양이군.”
“아닌 겁니까?”
“하하하.”
듣던 대로 당돌한 반호진의 성격에 남궁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건방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보는 게 맞다면 반호진은 충분히 그의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일 자격이 있었다.
일단 녹림대군을 쓰러뜨린 것으로 무림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했고.
‘근데 너무 커.’
남궁호의 투명한 두 눈이 반호진에게 향했다.
상대가 누구이든 냉정하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기에 그의 별호가 염왕(閻王)이었다.
염라대왕처럼 칼같이 심판을 한다고 해서 붙은 별호였다.
하지만 반호진을 앞에 두고서는 냉정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정도 격차는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없다.’
남궁광은 분명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런 남궁광을 가볍게 찍어 누를 정도의 실력자였다.
심지어 남궁광과 동갑인데 말이다.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직접 보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남궁광도 희대의 천재지만 반호진은 그 이상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남궁광이 반호진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대로 정체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러지는 않겠지.’
일정 경지에 이르면 성장세는 점차 둔화되었다.
그게 일반적이고 정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둔화되더라도 성장한다는 점이었다.
즉 격차가 좁혀지긴 하겠으나 남궁광이 반호진을 따라잡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터였다.
‘……어쩌면 평생 넘지 못할 수도 있다.’
당장 그만 하더라도 태어나면서부터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기 전까지 천재, 신동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었다.
하나 그랬음에도 천하제일인이 되지는 못했다.
천하십대고수 중 가장 강한 세 사람에 꼽히기는 했으나 최강, 최고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다른 두 명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패배할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진심으로 우려가 되었다.
그에 이어 남궁광도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걸 막으려면…….’
순간 남궁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추악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사람이라면, 아비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절대 그걸 실행해서는 안 됐다.
‘다른 곳은 몰라도 대남궁세가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그는 냉철한 심판을 내린다고 해서 염왕이라 불리는 무인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해서는 안 되었다.
한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다른 게 뇌리에 번쩍였다.
‘역시 방법은 그것뿐인가.’
치울 수 없다면 품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이길 수 없다면 친해지라는 말처럼 넘어서는 게 불가능하다면 가족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운을 띄워 놓기도 했고.
또르륵.
남궁호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반호진은 알아서 차호를 들어 차를 따랐다.
적당히 식어 있는 상태였기에 따로 삼매진화를 일으켜 데울 필요는 없었다.
여기가 남궁세가라는 걸 자랑하려는 듯이 차가 용정차였으나 소림사 출신이라고 해서 고급 차의 맛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것 참. 내가 차도 따라 주지 않았군.”
“괜찮습니다.”
“어째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은데?”
“글쎄요.”
반호진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만 조용히 홀짝였다.
남궁호는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반호진은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훤히 다 알고 있었다.
이 시간에 자신을 왜 불렀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시간이 늦었으니 사족을 붙이지는 않겠네. 내가 자네를 부른 건 따로 한 번 직접 만나 보고 싶어서였네.”
“그렇습니까.”
“역시 안 놀라는군.”
“놀라야 합니까?”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처음에도 느꼈었지만 남궁호는 다시 한번 확실히 느꼈다.
반호진이 그를 상대하면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천하의 염왕을 앞에 두면 강호의 명숙들도 얼어붙어 버리는데 반호진은 그렇지 않았다.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다.
“그럼 이제 볼일은 다 보신 겁니까?”
“어떨 것 같나?”
“충분히 보신 것 같습니다만.”
“티가 났나?”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남궁호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돌하지만 배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 어떻게 보면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반호진 정도라면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만 했다.
‘오히려 거만을 떨지 않는 게 대단한 거지.’
냉정하게 말해 아들인 남궁광이 반호진의 경지였으면 세상이 발아래 있는 것마냥 행동했을 게 분명했다.
온갖 시건방을 떨면서 말이다.
그에 반해 반호진은 당돌하기는 해도 오만하지는 않았다.
“이제 가도 됩니까?”
“자리에 앉은 지 일다경도 안 되었네.”
“볼일은 다 보신 것 아닙니까?”
“흐음. 혹시 나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나?”
남궁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기에 신선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대개는 어떻게든 그와 만나려고 하거나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어 하는데 반호진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이 자리에 더 있기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서둘러 헤어지려고 하나?”
“반대로 굳이 이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자네 입장에서는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군. 광이나 쌍둥이 딸들에게 관심이 전혀 없으니. 나도 마찬가지일 테고.”
“예.”
반호진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뒤끝이 있는 성격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굳이 남궁호의 의도대로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
초대에 응한 건 더 귀찮은 일을 막기 위해서지 남궁호에게 잘 보이려고 온 게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다니.”
“쓸데없이 여지를 두지 않는 성격인지라.”
“확실히 패기가 있어.”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궁금해졌네. 자네의 실력에 대해서 말일세.”
슈아아앗!
자리에서 일어나는 반호진을 보며 남궁호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해 가며 반호진을 압박했다.
“역시 이게 본론이었군요.”
“예상했나?”
기도를 드러냈음에도 반호진은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담담했다.
“이게 아니라면 굳이 이 시간에 보자고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근데 자네가 싫어할 이유가 있나? 자랑은 아니지만 나와 검 한 번 섞어 보고 싶은 무인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들과 저는 달라서요.”
“하하하하!”
한마디로 전혀 관심 없다는 뜻이었다.
그게 남궁호는 생소하면서도 신기했다.
여느 후기지수들과는 너무 달라서였다.
특히 시큰둥한 표정이 그를 더욱 자극했다.
“강압적인 건 가주님께도 썩 좋지 않을 텐데요.”
“소림사라는 배경은 확실히 나에게도 부담스럽긴 하지. 더욱이 자네는 방장의 제자 아닌가? 근데 내가 본 자네는 사부나 배경에 숨을 성격 같아 보이지는 않은데?”
“뭐, 그렇긴 합니다.”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나 그래도 웬만한 중견고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의 기세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반호진의 신색은 여전히 태연했다.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에 남궁호는 점점 더 기세를 높여 갔다.
“그러니 한 번 검을 나누어 보자는 것이네. 자고로 검객은 검으로 말하는 법 아닌가?”
“중간과정이 너무 생략된 것 같습니다만.”
“강압적이라고 돌려 까는 말인 것 같구먼?”
“맞습니다.”
남궁호가 피식 웃었다.
가만히 대화만 보면 그가 사정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본 게 전부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였다.
“부정하지 못하겠군. 근데 솔직히 말하면 궁금해서라네. 내가 본 게 전부일 것 같지가 않거든. 그리고 신룡의 검을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신룡이라.”
“그 별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구만?”
떨떠름한 반호진의 표정에 남궁호가 신기하다가는 표정을 지었다.
좀 전에도 느꼈었지만 일반적인 후기지수들과는 거리가 멀어서였다.
동시에 남궁광이 처음 천룡이라는 별호를 얻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아들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었는데 반호진은 정반대였다.
“애초에 자신이 원하는 별호를 얻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까. 원하신다면, 나가시죠.”
“허허허. 받아 주는 건가?”
“예.”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가져가는 반호진의 화법에 남궁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염왕이라 불린 뒤로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남궁호는 생경한 기분을 느끼며 반호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그만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곳이라면 마음 편히 검을 나눌 수 있을 걸세. 나름 신경 써서 만든 곳이거든.”
“그렇습니까.”
“못 믿는 눈치 같은데.”
“아닙니다.”
한결같이 심드렁한 태도를 유지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남궁호는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았다.
남궁세가의 가주에게만 전해지는 신물이자 강호에서도 유서 깊은 신검인 창천검이 검갑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연무장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한순간에 서늘한 기운이 장내에 드리워졌던 것이다.
스르릉.
소리도 없이 검갑에서 모습을 드러낸 창천검과 달리 반호진의 애검은 청아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반호진이 과거로 돌아온 만큼 젊어진 애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남궁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검이기는 한데, 자네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군.”
“고수는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죠.”
“맞는 말이긴 하네. 그러나 비슷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면 당연히 좋은 병기를 가진 쪽이 우세하단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저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이번에도 당돌하게 받아치는 반호진의 대답에 남궁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검을 들어 반호진을 겨누었다.
후우우웅!
그러자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반호진을 내리눌렀다.
단순히 검을 겨눈 것뿐인데도 어마어마한 검압이 일어난 것이었다.
‘초반부터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