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장. 신흥강자. -02
금호연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자신을 농락했던 암월교가 어떤 말을 적어 놓았을지 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래서 사지 않아도 될 문서이지만 금호연은 사비로 살 생각이었다.
남들은 고작 궁금증에 거금을 쓴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푼돈이었다.
“역시 이것부터 눈에 들어오시는 모양이네요.”
“진심으로 궁금해서요. 이제는 사라진 곳이지만 글은 오래도록 남아 있으니까요. 또 잔당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일망타진한 걸 알지만 그래도 나름 그쪽에서는 두 번째로 큰 세력이었으니 몇 명 정도는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속을 바꿔서 활동하는 이도 있을 테고.”
“그럴 수도 있지요.”
이 세상에 완벽한 건 없었다.
그저 완벽해 보이는 것만 있을 뿐.
그리고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기에 확실하게 멸절시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금호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도 모르던, 심지어 금가장과 하오문의 정보력으로도 알아낼 수 없었던 암월교의 본거지를 알고 있던 게 반호진이었다.
사실 그 출처에 대해서 많은 곳들이 궁금해했다.
개방도 모르는 곳을 반호진이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반호진은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알아낸 방법이 있을 텐데 절대 말해 주지 않았기에 궁금해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없습니다.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요. 찾아온다면 그때 처리하면 되니까요.”
“그 말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죠?”
“복수하려는 이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였을 겁니다. 나중을 기약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때쯤이면 또 지금과는 다를 테니까요.”
“그렇죠.”
당대는 아니지만 추후 천하십대고수에 꼽힐 만한 무인이 바로 반호진이었다.
몇몇 호사가들은 천하십대고수에 꽤나 근접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녹림대군을 홀로 쓰러뜨렸으니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이걸 전부 다 구입하시겠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가격은 차이를 두었습니다. 암월교에서 일급기밀, 이급기밀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해 놓았더라고요. 저도 내용을 읽어 봤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아, 참고로 판매하는 즉시 잊을 생각입니다. 보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두 번 거래하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알고 있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반 대협을 믿습니다. 장주님보다도 더요.”
금호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눈빛과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막막한 미래에 좌절하던 그를 소장주로 만들어 준 게 반호진이었다.
그렇기에 금호연은 부친보다 반호진을 더 믿었다.
“지금의 말은 문제의 소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장주님도 저보다는 돈을 믿으시거든요. 사람은 변하지만 돈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요.”
“명언이네요.”
“하지만 그렇기에 외롭다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많은 걸 가질 수는 있지만 모든 걸 살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금가장주가 되면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갈 생각입니다.”
“자기만의 길이 있으니까요.”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소장주직에 오르면서 생각하는 게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성장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노력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지금의 장주님이 돈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벽을 쌓았다면, 저는 돈과 사람으로 보호막을 만들 생각입니다. 아,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요. 하하하.”
금호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 포부를 밝히는 것이다 보니 민망한 듯했다.
그러나 얼굴을 붉히는 것과 달리 금호연의 두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반호진은 그런 금호연을 응원하며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광의 혼례인 만큼 찾아오는 하객들은 많았다.
금가장을 비롯해서 각계각층에 초대장을 보냈고, 거의 대부분이 그 초대에 응해 남궁세가를 찾았다.
그리고 그건 곧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모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청춘남녀의 혼례라서 그런지 강호에 존재하는 웬만한 문파와 무가(武家)는 다 찾아온 듯싶었다.
“선우 공자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합니다!”
“서 소협께 비무를 청하고 싶습니다!”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인 당비의 고희연 때도 후기지수들은 많이 모였었다.
또한 비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는데 이번에는 그때와 분위기가 살짝 달랐다.
사천당가에서는 반호진에게 모든 관심이 쏠렸다면 지금은 서조운과 선우방, 모용척, 정이륭에게 골고루 관심이 쏟아졌다.
네 사람의 무위가 범상치 않다는 게 암암리에 알려졌기에 여기저기에서 도전해 왔던 것이다.
‘뿌듯하구먼.’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후기지수들의 중심에서 동떨어져 있던 게 선우방이었다.
과거로 돌아와 소림사에서 처음 선우방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자 반호진은 감회가 새로웠다.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선우방의 미래를 바꾼 것 같아서였다.
거기에 서조운을 살리고, 모용척을 보다 빨리 각성시켰다.
‘이대로 쑥쑥 자란다면 각자 전쟁에서 한 축을 맡을 수 있겠지.’
반호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속된 말로 그의 간택을 받고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네 사람이었다.
이제는 웬만한 후기지수들은 가볍게 제압할 정도였기에 지금까지 쉬지 않고 비무를 했음에도 네 명은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아니, 지지 않는 걸 넘어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확실히 여러 실전 경험들이 도움이 되긴 했어.’
팔짱을 낀 채로 반호진은 유심히 네 사람의 비무를 지켜봤다.
그를 따라 처절하게 수련을 하기도 했지만 단순히 노력한다고 해서 실력이 급진적으로 느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네 사람은 개인수련도 열심히 하면서 실전도 겪었기에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건 대가로 큰 성취를 얻은 것이었다.
스윽.
한편 그런 반호진을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힐끔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은근슬쩍 말을 섞고 싶기는 한데 반호진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일 거면 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겼기에 누구 하나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한 명이 물꼬를 틀었다.
“반 대협!”
“소장주님.”
“여기는 좀 괜찮네요.”
“보니까 많이 시달리시던데요?”
“말도 못 할 지경입니다.”
어제와는 달리 얼굴 가득 울상을 한 채로 금호연이 다가와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달라진 위치를 이번에 확실하게 느끼시겠네요.”
“좋은 건 잠깐뿐이었습니다. 계속 시달리니 피가 마르는 느낌입니다.”
진짜로 목이 탄 모양인지 금호연은 시비가 들고 다니는 쟁반에서 물 한 잔을 챙기고서는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도 부족한지 연달아 두 잔을 더 마셨다.
“여인들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이니까요. 언제 또 소장주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힘드네요.”
금호연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라고 지금의 상황이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관심을 받아서 기뻤다.
그냥 이 공자일 때와 소장주인 지금은 관심의 정도가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질리듯이 과도한 관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야 기쁘고 기분 좋았지만 지금은 좀 두려웠다.
“금방 적응될 겁니다.”
“아, 반 대협께서는 이미 겪으셨죠?”
“지금도 겪고 있는 중이지요.”
“역시 알고 계셨군요.”
“모르면 그게 더 문제이지 않을까요?”
반호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현재 금호연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반 대협께서는 아직 생각 없으십니까?”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평생 혼자 살 생각은 없거든요. 단지 시기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저하고는 상황이 다르시네요.”
“소장주가 되면 결혼이 허가되어서 더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좀 있는 것 같습니다.”
후계경쟁 중일 때에는 형평성의 문제로 혼례를 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식적으로 소장주가 되었기에 얼마든지 혼인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혼이 가능하다고 해서 아무하고나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시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는 반 대협의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요.”
“소장주님이라면 잘 헤쳐 나가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네 분의 실력이 대단하네요. 다들 여유가 있습니다. 분명 쉬지 않고 비무를 했는데도 말이죠. 달리 말하면 그만큼 격차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모두 열심히 했으니까요.”
잠시 쉬어갈 생각으로 금호연이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는 여인들을 상대하면서도 틈틈이 네 사람의 비무를 지켜봤다.
아무래도 아는 사이다 보니 시선이 절로 갔던 것이다.
한데 지금까지 비무에서 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다가 새로운 용이 탄생하는 거 아닌가요? 천룡이야 이번 잔치의 주인공이니 섣불리 도전하지 않겠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니까요.”
“그러기에는 독룡이 없지요.”
“사천당가가 전쟁 중이니 예외로 두어야지요. 솔직히 남은 두 명은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금호연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비록 무위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안목은 달랐다.
사람 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기에 금호연은 눈을 반짝였다.
“가능성은 충분하죠.”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천룡이나 독룡은 힘들지 몰라도 남은 두 명은 네 사람이 충분히 비벼 볼 만했다.
그리고 과거에도 용의 칭호를 얻은 이들은 꾸준히 늘어 구룡(九龍)까지 갔었다.
그러니 일행들이 추가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반 대협께서는 양보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 신룡이라는 별호를 딱히 좋아하지 않아서요.”
“하하하.”
금호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세처럼 말했지만 허세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사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반호진을 그렇게 생각했다.
사룡과 함께 담아 두기에는 반호진의 수준이 격이 다르다고 말이다.
“용의 칭호를 다느냐, 못 다느냐의 기준은 앞으로 네 사람이 정할 겁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하고요. 당장 주위만 봐도 반 대협께 비무를 청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제가 무조건 거절하는 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선우 공자께 먼저 다가간 게 반 대협이지 않습니까. 그래서인지 선우 공자도 차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네 명 모두 후기지수들의 비무 신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원은 살짝 달랐다.
모용척에 비하면 선우방에게 비무를 청하는 이들이 배는 많았다.
그 차이를 금호연은 상냥함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성격이 좋습니다.”
“그것보다는 반 대협께 받은 대로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그것 나름대로 좋지 않겠습니까. 싸가지 없고 무례한 것보다는요.”
“맞습니다.”
급이 맞지 않으면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던 게 오대세가의 자제들이었다.
그들만의 우월의식이 있다고나 할까.
그걸 금호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금상룡과 경쟁하던 시절에 사룡들은 그와 딱 인사만 나누었었다.
‘목소리의 온도 차이가 명확했지.’
금호연은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눈앞에서 냉대와 차별을 받던 순간이 말이다.
한데 재미있게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소장주가 된 건 금상룡이 아니라 그였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