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장. 신흥강자. -01
인지하고 있는 공간은 똑같았다.
또한 감각이 감지하고 있는 공간 역시 같았다.
그럼에도 낯섦을 느낀다는 건 평소에 활용하지 못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반호진은 그 사실을 지금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변초는 변초일 뿐이야.’
상황에 따라서 오른손과 왼손으로 검을 번갈아 쥐면 변수를 만들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이 생각하는 건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변수나 변초, 또는 반격의 수준이 아닌 그 이상을 생각했다.
응용과 임기응변은 비슷한 경지에서만 큰 효과가 있었다.
‘그 너머.’
전생에서는 닿지 못했던 그 경지를 반호진은 떠올렸다.
여전히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 엇나가고 헤매도 괜찮아. 결국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까.’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이었다.
포기하는 순간 모든 건 거기에서 끝났다.
발전도, 미래도, 꿈도.
그렇기에 반호진은 오늘도 마음을 다잡고서 검무를 추었다.
***
어느새 겨울의 끝자락에 와 있는 날씨를 느끼며 반호진은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원해서 온 게 아니라 반쯤 끌려오다시피 왔기에 반호진은 얼굴 가득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남궁세가군요!”
“맞아. 사천당가하고는 또 다르지?”
“분위기가 완전 다르네요.”
서조운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거대한 궁궐 같은 남궁세가를 둘러봤다.
그러자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여인들이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선뜻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소림사에서부터 이곳까지 함께 왔지만 여전히 서조운과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근데 너도 처음 아냐?”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지.”
“말이 그게 뭐야? 이번 생이라니.”
“그런 게 있어.”
서조운을 일별한 선우방이 헛웃음을 흘렸다.
가끔 지금처럼 알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땐 말문이 콱 막혔다.
어떻게 봐도 농담인데 이상하게 농담 같지가 않다고나 할까.
“확실히 남궁세가는 남궁세가네요. 사천당가도 방문객들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비교가 안 되네요.”
“그땐 할아버지의 고희연이었고, 지금은 소가주의 혼례니까요. 차기 남궁세가주의 혼례인데 당연히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요.”
“흐음?”
감탄하던 모용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꼭 그런 이유만으로 숫자가 차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본가가 이 등이라서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꼭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톡 쏘는 당서린의 한마디에도 모용척은 기죽지 않았다.
그녀가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한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이라고 하나 자신 역시 모용세가의 소가주였다.
한때는 사천당가와 마찬가지로 오대세가 중 일좌를 차지하기도 했었고.
그리고 무림인에게 있어 배경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본신의 무위였기에 꿀릴 게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저한테는 그렇게 들렸는데요?”
“과민반응입니다.”
“흐음.”
당서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러나 모용척도 만만치 않았다.
표독한 그녀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다.
“이렇게 다 함께 오니까 단체로 여행하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안 좋아.”
“예?”
“너무 시끄럽잖아.”
“아하하하.”
진심이 듬뿍 담긴 반호진의 대답에 서조운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눈알을 빠르게 굴려 주변을 살폈다.
한데 의외로 서조운의 걱정과 달리 기분 나빠하는 후기지수들은 없었다.
반호진이 원래 이런 성격이라는 걸 알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는 기색이었다.
“사제.”
“예, 대사형.”
“너무 싫은 티는 내지 말고.”
“억지로 끌려 와서 그런지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습니다.”
“허허허허.”
반호진과 함께 이번 남궁광의 혼인식에 참석하게 된 법무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해서였다.
그런데 사실 그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이야 차기 방장이니 담현을 대신해서 오는 게 맞았으나 반호진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유가 더욱 궁금하네요. 저를 콕 짚어 초대한 이유가요.”
“나도 궁금하긴 해. 아무 이유 없이 사제를 초대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근데 한편으로는 대단한 거기도 해. 후기지수 중에 따로 초대장을 보낸 건 사제가 처음일걸?”
“이런 건 저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후기지수들이었다면 밤잠을 설쳤을지도 모르나 반호진에게는 아니었다.
그 대단한 남궁세가주도 그에게는 그냥 검 잘 쓰는 아저씨일 뿐이었다.
“사제가 남다르긴 하지. 그래도 이왕 왔으니 축하는 해 주고 가야지.”
“알겠습니다.”
반호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인산인해인 정문을 가로지르며 반호진은 총관을 따라 남궁세가에 들어갔다.
“반 대협님!”
배정받은 으리으리한 거처를 잠깐 구경하는데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함의 극치였던 금상룡과 달리 고급스러운 원단이기는 하나 그래도 깔끔한 백의경장을 입은 금호연이 환하게 웃으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역시 오셨군요.”
“남궁세가주님께서 초대장을 보내 주셨습니다. 장주님과 제 것을 따로요. 물론 가장 원하는 건 장주님이겠지만 워낙에 갑작스러운 혼례라 장주님은 오시지 못했습니다.”
“너무 급작스럽긴 했죠. 뜬금없다고나 할까요.”
반호진이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그가 놀란 건 또 있었다.
지난 생에 남궁광과 혼인한 여인과 지금 결혼하는 여자는 달랐다.
그래서 처음 초대를 받고 혼례를 올리는 여인에 대해 들었을 때 반호진은 살짝 놀랐었다.
“의외이기도 했고요. 예전부터 빈번하게 결혼했던 가문이기에 이번에는 피할 줄 알았거든요.”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소장주님이 되시니 얼굴이 확 펴지신 것 같습니다.”
눈치를 살피던 서조운과 정이륭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해왔다.
모용척과 선우방은 먼저 온 부친에게 갔고, 법무는 남궁세가주를 만나기 위해 이동한 상태였기에 현재 반호진의 곁에는 서조운과 정이륭뿐이었다.
“얼굴은 저번에 오셨을 때부터 펴졌었는데요.”
“하하하.”
“요즘에 정신없이 지내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금호연이 반갑게 웃으며 정이륭과 서조운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반호진만큼은 아니지만 두 사람도 금호연에게는 고마운 이들이었다.
그중 금호연은 보다 친근한 서조운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너무 북적북적 거리기는 한데, 나름 재미있습니다. 다채로운 경험을 쌓고 있다고나 할까요.”
“제 호위대원들 중에서도 부러워하는 이들이 꽤나 많더라고요. 정말 흔치 않은 기회라면서요.”
“다양한 후기지수가 한 곳에 모이는 경우가 드물기는 하죠. 형님이 아니었다면 절대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서조운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엄밀히 따지면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 웃긴 건 금호연과 정이륭이 당연하다는 듯이 동조한다는 것이었다.
“맞습니다. 정말 대단하시죠. 단순히 무공이 뛰어난 걸 넘어 인품도 있어야 가능하니까요. 과거 사룡 중 수좌에 꼽혔던 남궁 공자도 반 대협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는 못했으니까요.”
“그들만의 만남의 장 같은 느낌이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고요.”
아무래도 뒷담화의 성격이 강했기에 서조운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처에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없었으나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속담에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들으면 언짢아할 게 분명하기에 서조운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괜히 주류와 비주류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죠. 급이 맞지 않는 이와는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반 대협은 정말 다르십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이 아예 없으니까요. 사실 그게 정말 어려운 것이거든요.”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다 똑같이 보이는 거 아닐까요? 원래 어중간한 녀석들이 제일 시끄럽잖아요.”
“하하하.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 같습니다. 근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내려다보는 느낌은 또 아니니까요.”
“일단 들어가시죠.”
대화가 길어질 듯하자 반호진이 슬쩍 입을 열었다.
봄이 오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추위가 매서운 겨울이었다.
또 이런 쪽의 대화는 가급적이면 듣는 이가 적을수록 좋았기에 반호진은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세가에서 신경 쓴 티가 나네요.”
“금 공자님께도 신경 많이 썼을 텐데요? 이제는 이 공자가 아닌 소장주이시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지긴 했습니다. 하하하.”
금호연이 겸연쩍게 웃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숙소를 바꿔 준 게 반호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반호진이 그가 아닌 금상룡의 손을 들어 주었다면 이렇게 남궁세가에서 대접받으며 지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금호연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 은혜를 평생 동안 갚겠다고 말이다.
동시에 절대 이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요. 장주님을 대신해 자리를 참석하신 거잖아요.”
“그런 의미도 조금은 있습니다.”
“저희는 방에 가서 개인 짐을 풀고 있을게요.”
“그래.”
서조운이 눈치껏 정이륭과 함께 응접실을 나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자신들이 빠져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 서조운을 향해 금호연이 눈짓으로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원래는 숭산에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금가장에 대한 기밀문서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이건 저도 생각했지만, 장주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장주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니 조금 무섭긴 하네요.”
“하하하.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는 아닙니다. 그냥 궁금증 정도입니다. 물론 반 대협께서 판매하실 의향이 있는지가 중요하겠지만요.”
금가장의 소장주가 되었음에도 금호연의 태도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한결같이 예의를 차리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조심하는 듯했다.
인간관계라는 게 쌓는 건 어렵지만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가까울수록 더 선을 지켜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금호연은 절대 반호진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판매할 생각은 있습니다. 저에게는 쓸모없는 정보니까요. 굳이 많은 이들이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공간만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필요한 사람한테 넘기는 게 저한테는 이득입니다.”
“그렇다면 비싸게 사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제가 소장주가 되면서 쓸 수 있는 금액의 한도가 높아졌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 한해서는 한도가 없습니다. 장주님께서 가격이 얼마가 되었든 모두 다 사 오라고 하셨습니다.”
“금가장의 기둥이 휘청거릴 수도 있습니다만?”
농담 섞인 진담을 하는 금호연의 말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정보의 가치를 정확히 모르는데 너무 지르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반호진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금호연이 그에 대해 잘 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구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신 분이 반 대협이시지 않습니까. 얼토당토 않는 가격을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이건 저와 장주님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
“보상금을 더 드린다고 해도 받지 않으셨잖습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심지어 금가장의 돈이지 않습니까? 나중에 갚아야 하는 선금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금호연이 히죽 웃었다.
그가 반호진에 대해 잘 알고 있듯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금호연은 새삼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많이 친해진 것 같습니다. 서로를 잘 아니까요.”
“일단 금가장과 관련된 것들은 다 가져왔습니다. 소장주님에 대한 것도요.”
“금상룡이 의뢰한 것이겠네요.”
“소장주님이 의뢰한 것도 있습니다.”
“궁금하네요. 어떤 말을 적어 놓았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