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115화 (115/468)

제 38장. 쉽지 않은 남자. -04

“고맙기는.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가벼운 부탁이라 좀 미안하기는 해.”

“그럼 남은 건 나중에 합쳐서 한 번에.”

“묵혀 두는 거야?”

난희주가 피식 웃었다.

계산법이 남달라서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게 밉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의외로 반호진은 계산이 철저하고 깔끔했다.

“그러다가 내가 깜빡할 수도 있고.”

“오빠가 퍽이나 그러겠다.”

“사실 나도 알고 있어. 나름 기억력이 좋은 편이거든.”

“구천문에 대한 건 안 궁금해? 사천당가 연합과 구천문의 전쟁에 다들 관심이 많던데.”

“알아서 잘하지 않겠어?”

반호진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투로 말했다.

내부 분열이 일어난 사천당가라면 구천문을 감당하기 벅차겠으나 지금은 달랐다.

독왕이 비록 끝자락이라지만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암제 역시 건재했다.

단독으로 구천문을 상대하는 건 힘들겠지만 다른 문파들과 연합한 상태였기에 전력상 크게 밀리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게나 사천당가를 믿는 거야?”

“믿는다기보다는 저력이 있는 곳이니까. 순수하게 규모만 따지면 오대세가 중 가장 큰 가문이기도 하고.”

“폐쇄적인데도 이상하게 규모가 커. 혈족이라고 해도 과할 정도로.”

“역사가 깊은 곳이니까. 또 특수한 무공을 익히고 있기도 하고.”

“조심해. 독봉이 아주 독이 바짝 올랐다고 하던데.”

마음만 먹으면 천 리, 만 리 밖의 일도 눈앞에서 보듯 훤히 알 수 있는 사람이 난희주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반호진에게 경고를 했다.

한창 아랫도리의 지배를 받는 나이대였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어느 순간 치마폭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야.”

“아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막말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릴 수도 있으니까 여지를 두지 말라는 말이야.”

“난 늘 처신 잘하고 있어. 지금도 그렇고.”

“그걸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난희주가 쌜쭉한 표정을 지었으나 반호진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에 난희주는 못마땅한 기색을 얼굴에 대놓고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객당에서 머물 거야?”

“평소라면 그랬겠는데 본문의 사람들이 자주 들락날락 거리려면 등봉현이 더 나을 것 같아. 괜히 의심 받고 싶지도 않고.”

“편한 대로 해.”

“확인 작업이 다 끝나면 바로 사람을 보낼게.”

“응. 아, 국화차 좀 줄까?”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국화차를 권하는 반호진을 난희주는 말없이 살짝 노려봤다.

그러더니 콧방귀를 뀌듯 흥흥 거리며 방을 나섰다.

“싫음 말고.”

표정과 걸음걸이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멀어지는 난희주의 모습에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위에 어둠이 짙게 내린 야심한 시각에도 반호진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호롱불을 응시하며 반호진은 반질반질한 목함을 열었다.

그러자 산삼 특유의 향이 순식간에 방을 가득 채웠다.

천년설삼같이 오래 되거나 음기를 품고 있지 않은, 그냥 평범한 산삼이었으나 알아본 바에 의하면 오백 년은 족히 묵은 것이라고 했다.

“암월교 정도면 그래도 천년하수오나 공청석유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영약이 희귀하기는 해도 막상 찾아보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자연에서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고 해도 명문세가나 대문파에 뒤져 보면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당장 소림사만 하더라도 성공률이 낮아서 그렇지 매년 대환단과 소환단을 제조하고 있었고.

근데 암월교를 털었는데 나온 영약이라고는 지금 반호진의 손에 들린 산삼이 전부였다.

“아니면 사자마자 다 먹었나?”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수 치고는 유별나게 공력이 많았던 암월교주가 생각나서였다.

보통 살수들은 오로지 암살에만 모든 능력이 치우쳐져 있기에 특급살수들을 제외하면 공력이 대부분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오직 필살의 한 방만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공력이 크게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암월교주는 달랐다.

현역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암월교주는 지나칠 정도로 공력이 많았다.

“살수라기보다는 무인에 가까웠지.”

한때 특급살수였던 이답게 암월교주의 은신술은 매우 뛰어났다.

상대했던 특급살수들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잠시나마 공방을 주고받았던 걸 떠올리면 살수의 방식이라기보다는 무인의 방식에 좀 더 가까웠다.

살수들은 기본적으로 다음 공격을 생각하지 않았다.

“뭐, 그래도 내 재산을 늘려주기는 했으니까. 영약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백독환과 지금 눈앞에 있는 산삼 말고는 영약이나 영단이 없었으나 대신 재화가 많았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팔 만한 극비정보들도 많았기에 현재 반호진의 재산은 상당한 편이었다.

일개 개인이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정당한 노동의 대가이자 전리품이었다.

으적으적.

애초에 건드리지 않았으면 반호진이 암월교를 직접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나중에 천하사패의 앞잡이가 된다고 하나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한데 금상룡의 의뢰를 받으면서 명분이 생겼기에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괴멸시켰다.

그리고 지금 그 전리품 중 하나를 입에 털어 넣고서 꼭꼭 씹었다.

“으.”

산삼의 맛이 으레 그렇듯 쓰다 못해 떫었다.

단맛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쓴맛만 가득한데 중요한 건 씹을 때마다 강도가 더 강해진다는 점이었다.

녹기는커녕 더욱더 쓴맛만 진해지는 산삼이었으나 반호진은 무표정하게 씹는 걸 반복했다.

산삼이 품고 있는 기운을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서는 거의 갈 듯이 계속 씹어 주어야 했다.

꿀꺽!

거의 한 식경 동안 쉬지 않고 산삼을 씹던 반호진이 드디어 삼켰다.

동시에 가슴에서부터 뜨끈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졌다.

위에 도착한 산삼이 서서히 소화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오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아 온 기운들이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마음껏 날뛰어 봐.’

천 년 묵은 산삼은 아니라고 하나 그래도 백년산삼보다는 더욱 강력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게 지금 삼킨 산삼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하는 산삼의 기운에도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거칠게 날뛰도록 가만히 놔두었다.

품고 있는 기운을 전부 다 발산하도록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이번 생에서도 영약하고는 인연이 없나 보네.’

사나운 기세로 전신 곳곳에 퍼지기 시작하는 산삼의 기운을 느끼며 반호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거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행운도 함께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처럼 자꾸 그 이상을 바라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떠오르자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단전에 고이 잠들어 있던 공력을 일깨웠다.

‘자아, 그럼 흡수를 시작해 볼까.’

일행들이 먹은 백독환도 그렇지만 영초나 영약 역시 누가 먹느냐에 따라 전환되는 공력이 각기 달랐다.

먹는 이의 역량에 따라 공력의 양이 명백하게 나뉘어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자신 있었다.

젊어진 육신만큼이나 진기를 다루는 감각 역시 예민해졌기에 반호진은 거칠게 반항하는 산삼의 기운을 순식간에 제압하고는 본래 가지고 있던 기운과 융합하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반항하던 기운이 갑자기 체외로 빠져나가려 했다.

더 이상의 발악은 무의미하다고 여겼는지 차라리 자연으로 되돌아가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모공을 통해서 몸 밖으로 나가려는 기운들을 반호진은 모조리 흡수했다.

‘좋아.’

갈퀴로 쓸어 담듯이 도망치는 기운들을 한 톨도 남김없이 다시 체내로 끌고 들어온 반호진은 기분 좋은 고양감을 느꼈다.

공력이 한순간에 늘어나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단순히 내공을 늘린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단전에 켜켜이 쌓여 가고 있는 공력을 다시 움직여 아직 막혀 있는 전신세맥을 뚫거나 혹은 본래 사용하던 기맥들을 더욱 넓고 탄탄하게 만들었다.

후우우웅!

보통의 무인들은 기맥과 세맥의 타통에만 신경 쓰지만 상승의 경지로 가기 위해서는,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길만 뚫려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얼마나 빠르게, 더 많은 양의 진기를 움직일 수 있느냐가 승패를 판가름 냈다.

그렇기에 기맥을 꾸준히 관리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다만 지루하고 괴로운 과정이기에 매일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원래 수련이라는 건 반복의 연속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회복했는데?’

과거로 돌아오면서 가장 많이 부족했던 부분이 바로 공력이었다.

경지야 적응의 문제이지 회복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력은 달랐다.

시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기에 꾸준히 노력했음에도 증가하는 양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이번 산삼으로 반호진은 부족한 부분을 상당 부분 채울 수 있었다.

‘스물한 살에 이 정도면 확실히 빨라.’

부족했던 내공을 어느 정도 채움으로써 반호진은 죽기 직전의 경지를 구 할 가까이 회복했다고 판단했다.

거기다 젊어진 육체를 생각하면 서른 살 즈음에는 과거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을 가능성이 컸다.

반대로 죽기 직전에 이루었던 경지 이상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었고.

그렇기에 반호진은 자만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는 필패야.’

전생 때보다 성장 속도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고 하나 그래 봤자 죽기 전에 이루었던 경지보다도 못했다.

게다가 북해빙궁주와 동급의 절대고수가 세 명이나 더 있었기에 반호진으로서는 자만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북해빙궁주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는 되어야 자만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윽.

공력을 다 흡수한 반호진이 몸을 일으켰다.

영초를 먹었으니 이제는 직접 몸으로 확인할 차례였다.

늘어난 공력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스르릉.

해가 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후기지수들로 북적북적 거렸던 뒷마당이 지금은 한적하다 못해 고요했다.

무겁고 추운 적막 속에서 반호진은 느릿하게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고서 달빛 아래에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쉬이익. 쉬이익.

반호진의 검에는 초식이 없었다.

달마삼검이 아닌 즉흥적으로 지금의 감정과 느낌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체의 파공음이 없었다.

아무리 내기를 싣지 않았다고 하나 제법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데도 파공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휘익!

그때 반호진이 검을 던졌다.

허공에 떠오른 검을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잡은 것이었다.

그 상태에서 반호진은 검무를 이어 나갔다.

한데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근육, 궤적, 왼팔과 왼손의 기맥과 전신세맥.’

검은 단순히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전신의 근육과 피, 뼈, 신경 등 모든 것들이 동시에 어우러져서 움직였다.

그런 만큼 좌수검을 익혔다고 해서 곧바로 능숙하게 펼치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반호진은 오른손으로 달마삼검을 펼치는 것에 비해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쉬이익! 쉬익!

그걸 증명하듯 오른손으로 검무를 추었을 때와 달리 왼손으로 검을 옮겨 잡기 무섭게 파공성이 흘러나왔다.

오른손 때와 달리 지금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뜻이었다.

‘재미있네.’

어색하고 낯선 검무였으나 그래서 반호진은 재미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검을 잡았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에 반호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좌수검의 궤적에 공간이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졌다기보다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과 궤적이 늘어났다는 게 맞겠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