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장. 쉽지 않은 남자. -03
또르륵.
반호진은 미리 데워 두었던 국화차를 난희주의 찻잔에 따라 주었다.
이윽고 그윽한 국화차의 향이 방 안을 서서히 채워 나갔다.
“향이 엄청 진한데?”
“선물받은 건데 꽤 괜찮지?”
“응. 이렇게 향이 진한 국화차는 처음이야.”
“그만큼 정성을 쏟았다는 뜻이겠지.”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차는 달랐다.
그렇다고 반호진이 고급스러운 차나 비싼 차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희소성에 중점을 두는 이들도 있지만 반호진은 개성에 좀 더 무게를 두는 쪽이었다.
“어디서 난 차인지 알 수 있을까?”
“요녕성에서 만든 것으로 알고 있어.”
“아.”
딱 세 글자였으나 난희주는 귀신같이 반호진이 누구에게 선물받았는지 알아차렸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상관세가는 여전해?”
“잠잠해. 암월교 이후로 더욱 조심하는 기색이랄까.”
“그렇군.”
“혹시 암월교와 관련이 있어?”
난희주가 은근슬쩍 물었다.
혹시나 상관세가와 암월교가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어.”
“혹 금액을 지불하면 그 정보를 살 수 있을까?”
조심스러운 어조로 난희주가 물었다.
귀한 정보는 돈이 되었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하오문이었다.
정보만 파는 정보 상인이라는 이들이 따로 있기도 했고.
“진짜 아직 찾지 못했어. 알아낸 게 있다면 내가 먼저 말했겠지. 이런 거 가지고 깐깐하게 굴 정도로 나 쪼잔하지 않아.”
“알지. 그래도 나는 조심할 수밖에 없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해. 그렇다고 너무 만만하게 보지는 말고.”
“에이. 내가 어떻게 그래?”
난희주가 피식 웃었다.
암살 시도를 했다고 암월교를 지워 버린 게 반호진이었다.
세간에는 법무와 팔대호법이 암월교를 멸절시킨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난희주와 하오문주는 알고 있었다.
암월교주를 잡은 게 반호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무인을 함부로 대할 정도로 난희주는 간이 크지 않았다.
또한 예의를 모르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막 대할까 싶어서.”
“그런 일은 없어. 내 꿈은 현모양처거든.”
“……정말?”
“뭐야? 그 눈빛은? 되게 불쾌한데?”
묘하게 말끝을 늘린 것 같은 말투에 난희주가 새치름한 얼굴로 쏘아봤다.
반호진의 태도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아니. 좀 놀라워서. 예상치 못한 말이었거든. 근데 뭐,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으니까. 어떤 꿈을 꾸든 자유지.”
“뭐가 놀라워? 현모양처보다는 요부가 더 어울린다는 거야?”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직설적인 단어에 반호진은 결백하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요부의 요 자도 꺼내지 않았다.
“말투가 그런 느낌이었잖아.”
“나 혼자 놀란 거지 널 놀리거나 하지는 않았어. 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흐응.”
논리정연한 반호진의 대답에 난희주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기에 따지기가 애매해서였다.
“덧붙이자면 나는 응원하는 쪽이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정말?”
“난 변명하는 성격 아냐.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성격이지.”
“그것도 알긴 아는데. 근데 가끔은 선의의 거짓말도 해 줘.”
“지금 할까?”
반호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원한다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자 난희주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농담이야. 자, 그럼 거래를 시작해 볼까요? 난희주 소문주님.”
“네.”
장난기 서린 반호진의 표정과 달리 난희주는 진지했다.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며 반호진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뒤에 시립해 있던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방법은 저번과 같아. 내가 직접 정리한 목록이야.”
“출처는 암월교겠고?”
“물론이지. 다만 이번에는 순위에서 조금 밀렸어. 또 판매할 수 없는 무공들도 있었고.”
“그건 충분히 이해해.”
암월교는 엄연히 사파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정사마(正邪魔)를 가리지 않고 수집할 수 있는 무공비급들은 전부 다 수집했을 터였다.
개중에는 정도문파의 무공비급들도 있을 테고 소림사의 입장에서는 주인에게 돌려주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아무리 소림사라도 그냥 돌려주지는 않았을 테고 무형의 무언가를 받아 내거나 빚으로 남겨 두었을 것이었다.
“가격은 따로 정해 놓지 않았어. 얼마든지 조율이 가능하니까. 물론 밑져서 팔 생각은 없고. 그렇다고 바가지를 씌울 생각도 없어.”
“알지. 내가 오빠 성격을 모를까 봐. 근데 수준이 확실히 높다. 살문 다음가는 살수문파답다고나 할까.”
“일단 종류가 다양하니까. 산적들의 무공은 주로 사공이나 마공들이 많았지. 그런데 암월교에는 정공도 많아서.”
“그래서 더 좋은 거 같아.”
단기간의 성취를 생각하면 사공과 마공이 단연 앞섰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마공과 사공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위험하거나 혹은 사이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반면에 정공은 느리지만 안정적이었다.
“지난번에는 내공심법 쪽이 약했지. 수준은 높지만 한계가 명백하기도 했고.”
“혹시 상성도 맞춰 봤어?”
“거기까지는 못했어. 요즘에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거든.”
“오빠는 따로 보좌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난희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림 전역에 이름이 알려지긴 했으나 반호진은 딱히 세력이 없었다.
사문이 소림사일 뿐이지 반호진이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다.
“맞아. 그래서 거기까지는 못했어. 이게 나름 정리하는 것도 일이더라고. 이거는 이래서 제외, 저건 저래서 제외.”
“고생 많이 했네, 우리 오빠.”
평소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내는 반호진을 난희주가 안쓰럽게 바라봤다.
개인수련 시간을 줄이지는 않았을 테니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줄여서 정리 작업을 했을 게 분명했다.
하던 이들에게도 지루하고 힘든 일인데 안 하던 사람이 했으니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었을 터였다.
“고생한 건 맞는데 우리 오빠는 아니고.”
“별거 아닌 건 그냥 넘어가도 되잖아?”
“짚을 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지.”
“쓸데없는 부분에서 깐깐하다니까.”
난희주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모습에 흔들릴 반호진이 아니었다.
“어떻게, 문주님께 전권을 받아서 온 거야? 이번 거래는 판이 좀 큰데?”
“물론이지. 나 소문주야. 하나뿐인 사부님의 후계자라고. 그리고 우리가 무력이 약하지 금력은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아. 금가장을 제외하면. 순수하게 현금만 따지면 금가장에 크게 안 꿀릴걸?”
“그렇긴 하겠네.”
모든 거래가 현금으로 이루어질 테니 난희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반호진에게 중요한 건 대금을 지급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금가장과 하오문이 대등하니 마니 하는 건 중요치 않았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물건만 확실하다면.”
“좋네.”
이것저것 재거나 돌려 말하는 거 없이 직설적인 말에 반호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원하는 것도 딱 이것이었다.
서로의 물건만 확실하다면 거래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래도 분류는 다 해 놓았네. 난 여기까지도 안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판매하는데 그 정도는 해 둬야지. 너라고 모든 무공을 아는 건 아닌데.”
“강호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무인들은 웬만하면 다 알고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대표하는 무공만 주로 알지.”
“급한 건 아니니까 목록에 있는 것들 알아보고 구입해도 돼.”
“정말 그래도 돼?”
안 그래도 개수가 많아 난감하던 차였다.
간단하게 한다면야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만 다 구입하면 되지만 그럴 경우 하오문이 가지고 있는 무공서들과 겹칠 가능성도 있었다.
즉 같은 무공을 또 사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에 난희주는 그게 좀 걸렸는데 반호진이 이렇게 말해 주자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나도 급한 건 아니니까. 이제는 나도 재산이 제법 되거든.”
“하긴.”
“그렇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무공비급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네가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거지.”
“불편함을 감수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어. 또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만 잠깐 보고 가는 것도 좀 그렇잖아?”
“난 괜찮은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기습적으로 꼬리를 쳤으나 반호진도 만만치 않았다.
은밀하게 다가온 일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려 내며 회피하자 난희주가 다시 한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마디도 안 지지?”
“편한 대로 해.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너무 후하게 대해 주니까 고맙기도 하면서 부담스럽기도 하네. 혹시 본문에 부탁할 거 없어?”
“흐음.”
“있구나?”
난희주가 눈을 반짝였다.
단번에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건 고민하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맞았다.
‘가장 궁금한 건 북해와 서장의 상황이지만, 아직은 완전히 믿을 수 없어.’
난희주와의 관계가 많이 돈독해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서조운이나 선우방만큼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점차 긴밀해져 가는 중일 뿐.
반호진은 그걸 명백히 했다.
괜히 무작정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고 싶지는 않았다.
“고민하는 걸 보니 꽤 큰 건인가 보네?”
“그런 건 아니고. 어떤 게 적당한가 생각해 본 거야.”
“부탁할 게 그렇게 많아?”
난희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뜻 보면 세상만사에 초탈해 보이는 게 반호진이었다.
그런데 지금 말을 들어 보니 또 그건 아닌 듯했다.
“많다기보다는 네가 들어줄 수 있는 선을 생각한 거지.”
“아, 그렇구나. 근데 그걸 꼭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일단 내뱉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내가 판단하면 되니까. 그게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그럼 팔흉(八凶)에 대해서 알아봐 주었으면 해.”
“팔흉?”
생각지도 못한 이들의 등장에 난희주가 눈을 껌뻑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뜬금없어도 너무 뜬금없어서였다.
“응. 팔흉.”
“무림공적인 팔흉을 말하는 거지?”
“맞아. 혹시 하오문과 가까운 사이야?”
“그럴 리가. 아무리 우리가 정사중간이라지만 무림공적과 친밀하지는 않아. 문도들 중에는 거래를 하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한통속이라 할 만한 이들은 없어.”
난희주가 손사래를 쳤다.
팔흉과 인연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만약 그럴 경우 백도무림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 하는데 하오문은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 않았다.
“정보 정도는 줄 수 있잖아? 위치까지는 힘들어도.”
“가능해. 사실 팔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도 하고. 위치는 따로 알아본 적이 없지만 행적을 조사해 보면 대략적으로는 파악할 수 있어. 팔흉도 사람인 이상 의식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돼. 비용이 좀 많이 들어갈 것 같으면 미리 청구해도 되고.”
반호진은 굳이 억지로 알아볼 필요까지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알아 두면 좋은 정도지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런데 난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현재 위치는 힘들지만 그 외는 가능해. 우리 나름대로 알아본 것도 있고. 진위파악 하는 시간이 좀 필요해서 그렇지. 용모파기까지 깔끔하게 전달할게. 어차피 나도 시간이 좀 필요하기도 하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