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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113화 (113/468)

제 38장. 쉽지 않은 남자. -02

정현이 가니 이번에는 선우방이 반호진을 찾았다.

방금 전까지 비무를 했다는 걸 보여 주듯이 한겨울임에도 선우방의 얼굴과 목에는 땀이 가득했다.

무명천으로 땀을 닦아 내며 선우방이 그를 올려다봤다.

“난 거절하지 않는데?”

“그럼 눈이 높은 건가?”

“너에게 관심을 보이는 소저들도 꽤 많던데?”

“다 네 덕분이지.”

선우방은 부정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만해하지는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 이 모든 건 반호진 덕분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전부 다는 아니고. 일정 부분은 내 덕이 있지.”

“구 할은 네 덕분이지. 네가 먼저 날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야.”

“그래도 넌 결국에 빛을 발했을 거야.”

“대신 시간이 꽤 오래 흘렀겠지?”

반호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는 객관적으로 봐도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건 어려워서였다.

“근데 결국 지금의 널 만든 건 너 자신이야.”

“그냥 인정하면 될 것을.”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있고?”

여전히 누운 자세로 반호진이 화제를 돌렸다.

이런 식의 대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칭찬은 인간관계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만 반호진은 민망했다.

금칠이나 기름칠도 가끔 해야 기분 좋은 법이었다.

“글쎄다. 난 단순히 내가 좋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서. 아버지 마음에도 들어야 하고, 가문에도 이득이 되는 게 먼저이니까.”

“이미 혼인을 전제로 깔아 두고 있네.”

“오대세가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신분인 것도 아니니까. 척이도 비슷하고. 근데 그 녀석은 아예 관심이 없는 거 같더라고. 은근히 관심을 표명하는 여인들이 적지 않은데. 나보다도 많아.”

“냉정하게 잘생겼으니까. 거기에 가문도 좋고, 개인 실력도 뛰어나니 당연히 여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니까.”

“맞아. 조운이도 그래서인지 꽤 인기가 많더라고. 물론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건 너지만. 좀 과장해서 새벽에 육탄돌격이라도 할 기세던데?”

선우방이 조금은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몸을 던지더라도 순순히 당해 줄 위인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과도한 관심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무덤덤한 성격의 반호진이라도 한두 명이 아니라 몇 명이 달려들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화화공자들이야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지만 반호진은 수도승에 가까운 생활을 하기에 짜증 날 터였다.

“그런다고 한들 순순히 당해 줄 내가 아니지. 게다가 근처에 바로 너나 애들이 있는데 생각이 있으면 그러지 못하지. 너희들의 기감에 잡히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 정도 실력자면 후기지수가 아니라 한 명의 살수라고 봐야겠지.”

선우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세가 아니라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그 혼자만 머무는 게 아니었기에 몰래 반호진의 방으로 침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말 그대로 모 아니면 도인데 그렇게까지 할 정도는 아니지. 또 그 정도의 마음가짐이라면 나도 모르지.”

“쉽지 않은 선택이긴 하지. 잘된다면 상관없지만 만약 안 된다면, 심지어 소문까지 난다면 혼삿길이 완전 막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갑자기 확 덮칠 수도 있으니까.”

“안 그래도 조심하고 있어. 처음에는 나도 관심을 받으니까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무섭다.”

“적당히 즐기는 건 좋아. 네가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는 거니까.”

반호진은 선우방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후기지수들의 모임에 참석하기는 했으나 선우방은 결코 두각을 보이는 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비주류에 가까운 무리에 속해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있어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던 게 과거의 선우방이니만큼 지금의 관심이 기쁘기도 할 터였다.

“그래서 고마워. 널 만나고서 내 운명이 바뀌었으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야. 아마도 본가에서 홀로 외롭게 처박혀 수련만 했겠지.”

“오늘따라 왜 그렇게 감성적이야?”

반호진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감성적인 것 같아서였다.

“근래 내가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잖아. 근데 이게 다 네 덕이니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는 어떡하려고? 아직 별호가 생긴 것도 아니다? 갈 길이 멀어. 멋있는 별호를 얻고, 무림을 호령해야지.”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아직 제대로 무명을 알린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너무 고마워하는 것 같아서였다.

분명 그가 미래를 바꾸기는 했으나 나중에 재능을 만개했을 때에 비하면 실력이 반의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은 그 정도 수준이 되었을 때 듣는 게 맞았다.

“당연히 그래야지. 다만 그 전에 이 마음은 전하고 싶어서. 마음속으로만,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말한다고 해서 그게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건 아니니까.”

“나 죽으러 가나? 아니면 너?”

“어느 날 갑자기 비명횡사하는 게 무림이잖아. 말할 수 있을 때 충분히 해 놓아야지. 나중에 이자 쳐서 갚는 것보다는 차곡차곡 갚는 게 낫잖아?”

“빚쟁이냐?”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선우방은 진심이었다.

“그냥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거든. 한 번쯤은 날을 잡아서. 또 왠지 앞으로는 이런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바빠질 것 같기도 하고.”

“호오.”

반호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성장한 무공만큼이나 눈치도 빨라진 것 같아서였다.

“아마 다들 느끼고는 있을 거야. 구천문의 일도 있으니까.”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철혈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나 그것도 시간문제라고 반호진은 생각했다.

일단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은 알고 있을 테니까.

물론 대수롭지 않게 여길 가능성이 크기는 하나, 그래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악은 면했다.

반호진이 미래를 알고 있기도 하고.

“맞아. 우선 그 전에 나부터 강해지고 가문부터 키워야 하겠지만.”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경쟁자들이 좀 강하긴 한데, 원래부터 쉬운 일은 없으니까.”

“기존의 강자들도 쉽게 밀려나지 않을 테고.”

선우방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목표를 이루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힘들기에 더더욱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중에는 나와 경쟁해야 할 수도 있어.”

“그것까지 감안하고 있어. 네가 언제까지나 소림사에 머물지는 않을 테니까.”

“아주 좋은 눈빛이야.”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우방의 눈빛에 반호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 사이라고 해도 경쟁은 필요했다.

특히나 선의의 경쟁은 더더욱.

‘선우세가, 모용세가, 거기에 조운이와 나의 가문이 오대세가가 되는 것도 재미있겠네.’

승부욕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선우방의 눈을 보며 반호진이 속으로 웃었다.

철옹성과도 같은 오대세가 중 네 곳을 밀어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역사와 전통이 있는 오대세가를 밀어내기가 쉽지는 않겠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누구야?”

“웬 면사지?”

“매봉 아냐?”

“체형이나 분위기가 달라.”

앞마당뿐만 아니라 공터 곳곳을 차지한 후기지수들이 갑자기 등장한 면사여인을 힐끔거렸다.

그런데 그건 남자들뿐만이 아니었다.

한쪽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여인들도 면사여인을 유심히 쳐다봤다.

하지만 두 눈과 눈썹만으로는 누구인지 알기가 힘들었다.

“소문대로네요.”

“그러게. 만남의 장이라고 하던데.”

“보이지 않는 경쟁이 어마어마하대요. 사룡보다도 더하다고 들었어요.”

“충분히 그럴 만하지. 반 공자님이신데.”

수많은 시선들이 집중되었음에도 난희주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과 경계심 가득한 후기지수들의 눈빛을 즐겼다.

이곳이 아니면 이런 눈빛을 받아 볼 수가 없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난희주는 되레 도도하게 시선을 즐기며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형님을 찾아오신 건가요?”

“네. 약속은 되어 있어요. 제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찾아오기는 했지만요.”

도도하게 치솟았던 눈썹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서조운이 인사하며 다가와서였다.

다른 세 명은 대련 중인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익숙한 기합성이 들렸다.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서 공자.”

“별말씀을.”

면사를 쓰고 있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서조운은 난희주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래서 보자마자 다가갔다.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까 싶어서였다.

사람이 많을수록 사건사고 역시 비례해서 증가했기에 서조운은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지만 미녀가 있으면 남자들이 사고를 치기도 했기에 서조운은 아예 원천봉쇄할 생각이었다.

“안내해 주셔서 고마워요.”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고가 나면 뒤처리는 막내인 제 몫이거든요.”

“호호호.”

한 살을 더 먹어서 그런지 지난번보다 왠지 모르게 의젓해진 서조운의 모습에 난희주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면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시선들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의 등장에 다들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들어가시죠.”

“이따가 차 한 잔 할 수 있으면 해요.”

빈말이 아니라 난희주는 진심으로 말했다.

반호진처럼 남자로서 보는 건 아니지만 서조운은 장래가 유망한 후기지수였다.

그렇기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꼭 그렇게 계산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알고 지내고 싶은 좋은 동생이기도 했고.

“알겠습니다. 그럼 대화 나누시길.”

“예.”

늘 대동하던 여자 수신호위와 함께 난희주가 생긋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나야 뭐, 늘 똑같지. 사람들이 많아진 것 빼고는.”

“후기지수들의 만남이 장이 되었다고 하던데?”

“청춘남녀들이 모였으니 눈이 맞는 게 이상할 건 없지.”

난희주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으나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또 부정하지도 않았다.

남녀가 눈이 맞고, 마음이 맞고, 몸이 맞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강제성이 있다면 문제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게 맞았다.

“그 중심에 오빠가 있다고 하던데?”

“다들 내 미래에 관심이 많더라고. 나는 정작 경험에도 없던 문서 분류 작업으로 눈알이 빠질 뻔했는데.”

“확인은 다 했어?”

“아직 하는 중이야. 우선적으로 급한 것들부터 보고 있어.”

“그렇단 말이지.”

난희주가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벗으며 눈을 반짝였다.

우선적으로 선별해서 봤다는 말에서 그녀나 하오문에 관련된 것들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내가 등봉현으로 내려갔어도 되었는데.”

“아니야.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소림사에 오는 거 좋아해.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피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당찬 난희주의 말에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 말마따나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상당한 관심을 받겠지만 지금의 태도를 보니 이제는 좀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를 그만큼 믿거나.

‘나한테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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