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112화 (112/468)

제 38장. 쉽지 않은 남자. -01

해가 바뀌며 반호진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그를 시작으로 일행들도 나이를 먹었고.

즉 이렇게 관심을 받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혼기가 찬 남녀들이 만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나는 이용할 것만 이용하면 돼.’

사람이 모인다는 건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걸 뜻했다.

특히나 미래에 도후라는 별호를 얻게 되는 팽화영의 재능은 서조운이나 모용척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한계를 한 꺼풀 벗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현재의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생각이었다.

‘뭐, 인연이 닿는다면 정식으로 교제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반호진은 살짝 여지를 두었다.

그라고 혼인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이번 생은 전생과 다른 삶을 살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했기에 언제가 되었든 간에 혼인은 할 생각이었다.

단지 여자에 너무 매달릴 생각이 없었을 뿐.

“반 공자님?”

“말씀하시죠.”

“혹시 술은 안 좋아하시나요?”

“절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만.”

뜬금없이 술을 찾는 당서린의 말에도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특유의 담담한 얼굴로 정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스님들께서는 안 드시지만 방문객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나요?”

“그렇긴 합니다.”

“그럼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저녁에 다 함께 모여서 가볍게 한 잔 하는 건 어떠세요?”

당서린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반호진과 단둘이서 마시고 싶었으나 지켜보는 눈들이 많기에 그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차라리 모두 함께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제안했다.

“술자리라.”

“생각해 보니까 구천문 때문에 본가에서 제대로 술자리를 가지지 못한 것 같아서요.”

“그래도 소림사에서 그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네가 못 마셔서 말리는 건 아니고?”

은근슬쩍 반대하는 모용희수를 바라보며 당서린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본인이 마시지 못하니 훼방을 놓는 건 아니냐는 미소였다.

그런데 모용희수는 그런 당서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장소에 따라 지켜야 하는 예의가 있으니까요. 개방주님은 몰라도 후개께서도 소림사에서는 가급적 술을 드시지 않는 걸로 알고 있어요.”

“여기는 소림사가 아니잖아? 맞닿아 있다시피 하기는 하지만. 게다가 여기에 승려는 없고.”

당서린이 당당하게 좌중을 둘러봤다.

한창 혈기왕성한 후기지수들.

거기에 능력 있는 남자들과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었다.

여기에 술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또한 술자리는 그녀뿐만 아니라 팽화영, 팽수영 자매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술은 사람의 경계심을 어느 순간 확 낮춰 주니까.

즉, 두 자매에게도 이득이기에 당서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팽수영, 팽화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술자리는 다음에, 다른 장소에서 갖도록 하지요.”

“정 찝찝하시면 등봉현에서…….”

“지금은 다들 중요한 시기라서요.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다음에 함께하죠. 정 원하신다면 참석하고 싶으신 분들과 따로 가시면 될 듯합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반호진의 거절에 당서린이 남몰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반호진이 없는 술자리는 그녀에게 있어 의미가 없었다.

아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오히려 똥파리들만 꼬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사안은 좀 더 대화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시죠.”

당서린은 은근슬쩍 한 발 물러났다.

반호진이 없는 자리는 의미가 없기도 하지만 너무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반호진이 참석하지 않으면 선우방, 서조운, 정이륭, 모용척도 불참할 가능성이 컸다.

“아참. 아빠께서 이걸 반 공자님께 드리라고 하셨어요. 본가에서 직접 키운 국화로 만든 차예요.”

당서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나는 순간을 노리고 모용희수가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차를 좋아하는 반호진의 취향에 딱 맞는 선물을 꺼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당서린이 매서운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모용희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가주님께도 전해 주세요.”

“네!”

자연스럽게 반호진의 관심을 끌어가는 모용희수의 모습에 당서린은 물론이고 팽화영의 눈빛도 달라졌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다.

오빠들하고 함께 오다 보니 정신없이 싸우는 걸 말리기만 했었다.

그 시간들이 팽화영은 너무 아까웠다.

‘너무 생각 없이 왔어.’

팽화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경쟁자가 많다는 걸 그녀는 물론이고 팽만철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준비 없이 왔다는 건 명백한 그녀의 실수였다.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으며 팽화영은 아랫입술을 다른 사람들 모르게 깨물었다.

‘대책이 필요해.’

팽화영은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당서린을 힐끔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반호진의 거처는 날이 갈수록 북적거렸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객당과의 거리가 멀어도 사람들은 매일 아침 일찍 반호진의 거처를 찾았다.

“으자자잣!”

“하압!”

곳곳에서 힘찬 기합성과 함께 대련이 이어졌다.

한창 힘이 넘치는 나이답게 상대를 바꿔 가며 대련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몇몇은 몇 번 하고 말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정말 지칠 때까지, 아니 지쳐도 계속해서 대련을 이어 갔다.

“좋을 때야.”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선우방과 정이륭이었다.

재능을 타고난, 누가 봐도 천재인 서조운과 모용척보다는 두 사람이 편하기도 하고 정중했기에 대부분의 후기지수들은 선우방과 정이륭을 선택했다.

물론 자신감 넘치는 몇몇 이들이 모용척과 서조운에게도 호기롭게 도전했으나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재능이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한 서조운과 모용척은 사룡이라고 할지라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핫!”

따다다당!

그나마 팽화영 정도만이 거의 대등하게 두 사람과 대련했다.

괜히 미래의 도후가 아니라는 듯이 팽화영은 서조운과 모용척을 상대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아주 좋아.”

다들 일정 수준에 오른 상태이기에 급격한 발전은 없었으나 원래 성장이라는 게 점진적으로 이어지는 법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기점을 기준으로 깨달음을 얻어 팍 하고 치고 올라가는 게 무인이었다.

때문에 반호진은 지금이 딱 좋다고 생각했다.

매일같이 새로운 얼굴들이 보이기도 했고.

“간택이라.”

오늘도 어김없이 지정석이라 할 수 있는 나뭇가지 위에 편안하게 누운 반호진이 낯선 얼굴들을 찬찬히 훑었다.

인사를 나누었지만 사실 이름은 잘 몰랐다.

전생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렸던 이들이라면 기억했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이들은 없었다.

대신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다.

그의 선택을 받으면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는 소문이었다.

한데 얘기를 들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방이나 척이는 나중에라도 빛을 보는 경우지만 조운이나 이륭이는 다르니까.’

엄밀히 말하면 정이륭 역시 나중에는 대단한 무명을 떨치지만 중요한 건 원래대로라면 이 시기에 나타나지 않은 무인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간택을 받으면 신진고수, 신흥강자가 된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는 중이라고 했다.

“받으시오!”

“이번에는 내 차례요!”

그래서인지 다들 대련에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다.

반호진을 제외한 사인방과 대련을 하며 경험도 쌓으면서 눈에 들기 위해서였다.

특별한 자격조건이 따로 없고, 대신 열심히 하는 이들에게 호의적이라는 소문만 돌았기에 반호진 또래의 후기지수들은 악착같이 대련에 집중했다.

“열기가 어마어마하네요.”

“너를 비롯해서 이대제자들에게는 미안하네.”

“에이. 괜찮아요. 사백님께서 따로 봐주시잖아요.”

“그래도 원래는 너희가 먼저 왔었는데.”

반호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서 대답했다.

나무 그늘 아래로 온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애초에 이곳은 주인 없는 땅이었잖아요. 굳이 따지자면 사백님이시고.”

“그래도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 서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

“정말 괜찮아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요. 오히려 다들 좋아하는걸요?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잖아요. 후기지수분들하고 안면도 익히고.”

“거기에 미녀들도 있고?”

“으흐흐흐!”

한 살을 더 먹었음에도 여전히 앳되고 탱글탱글한 얼굴을 가진 정현이 음흉하게 웃었다.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있어서 그런지 이제 더 이상 마냥 귀엽지만은 않았다.

“징그럽다.”

“헙! 너무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징그럽다니요!”

“동경을 보고서 지금과 똑같은 표정으로 웃어 봐. 그럼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거야.”

“그래도 징그럽다는 표현은 좀.”

“한 번 봐 보라니까.”

정현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듯이 살짝 촉촉한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반호진은 가차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정현은 귀엽지 않아서였다.

그걸 증명하듯 이제 코 밑에 거뭇거뭇하고 긴 수염이 자라나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면도를 한 번 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었다.

“사백님은 저 안 보시잖아요.”

“난 다 보여. 안 보는 척하지만 다 보고 있어.”

“거짓말은 나쁜 거예요.”

“내 기감이 말해 주거든. 네가 눈썹을 잔뜩 모으고서 아주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다는 것도.”

“헙!”

정현이 화들짝 놀랐다.

앞마당을 지나 먼 곳을 응시하기에 당연히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아서였다.

그래서 정현은 황급히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풀었다.

“표정을 수습하면 뭐 해? 이미 다 봤는데.”

“지, 진짜 기감이 예민하면 다 느껴져요?”

“궁금하면 너도 내 경지까지 올라와.”

“……죽기 전에 가능할까요?”

“못 하면 어쩔 수 없고.”

자신하고는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하는 반호진의 말투에 정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쩔 땐 챙겨 주는 듯하면서도 또 어느 때는 무관심했다.

그래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하세요.”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그냥 핑계 대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고. 근데 요즘 들어 되게 자주 오는 것 같다? 너를 비롯해서 다른 아이들도?”

반호진이 이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아주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정현을 비롯해서 이대제자들의 속내를 훤히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성실함이야말로 사백님께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신 거잖아요. 열심히, 매일, 꾸준히 수련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건데 불편하세요?”

“의도가 썩 순수해 보이지 않아서 하는 말이지.”

“수, 순수하지 않다니요?”

“글쎄. 그건 네가 잘 알지 않을까?”

반호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정현을 쳐다봤다.

아주 부담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정현은 고도의 유도심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제는 나이도 한 살 더 먹었고, 당한 경험들이 상당했기에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저는 모르겠는데요?”

“뭐, 이해는 해. 한창 혈기도 왕성하고 궁금증도 많을 때니까.”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아, 저는 깜빡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구석에 몰릴 것 같을 때 최고의 상책은 바로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그걸 그간의 경험으로 습득했기에 정현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쯧쯧. 그냥 인정하면 될 것을. 어떻게 보면 자연의 섭리인데.”

소림사의 무승이라고 하나 남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즉 남자로서의 본능이 들끓는 건 이상한 게 전혀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또 본인을 제대로 마주할 줄 알아야 제어도 할 수 있는 법이었는데 정현은 너무 피하기만 했다.

“그 자연의 섭리를 너도 거절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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