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장. 나 이런 사람이야. -03
“네가 어떻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지금 구천문과 전쟁 중이지 않아?”
당서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를 가진 팽화영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서린이 이곳에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나까지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사천성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볼일이 있어서 왔어.”
“이 시국에?”
“구천문쯤이야 별거 아니니까.”
당서린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묘강의 패자라고 하나 사천당가의 전력 역시 구천문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다른 세력과 힘을 합친 것뿐이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나 할까.
“그래? 나야 구천문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모르니까.”
“근데 사남매가 다 왔네?”
“오빠들은 아빠가 강제로 보냈어.”
팽화영의 말에 당서린이 실소를 흘렸다.
어떤 의미인지 눈치 빠른 그녀는 단박에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형제의 끈덕끈덕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녀의 기분은 단번에 바닥을 쳤다.
형제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였다.
“오랜만입니다, 당 소저!”
“작년 태상가주님의 고희연에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는 가고 싶었는데, 사정이 있었는지라.”
언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팽추영과 팽주영이 활짝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당서린의 등장에 기꺼워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둘 다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오랜만이에요.”
“하하하. 그런데 당 소저께서는 무슨 일로 소림사까지 오신 겁니까?”
팽추영이 호탕하게 웃으며 물었다.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서린은 그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반 공자님을 뵈러 왔어요.”
“예? 바, 반호진요?”
“어라? 편하게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근한 사이였어요? 제가 알기로는 아닌데.”
당서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알기로 팽추영과 그 옆에 있는 팽주영을 폐관수련하게 만든 인물이 반호진이었다.
물론 직접 나선 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니 친근한 사이라기보다는 막 대한다는 말이 맞았다.
“안면만 있는 사이입니다.”
그걸 증명하듯 팽추영과 팽주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반호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려서였다.
그래서 두 형제는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질투도 그 저변에 깔려 있었고.
“그럼 막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이 자리에 없지 않습니까.”
“나이도 형이 위고요.”
실력이 안 되니 나이로라도 이기겠다는 듯이 말하는 두 형제의 모습에 당서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못나도 너무 못나서였다.
한데 그건 같이 있던 팽수영, 팽화영 자매도 마찬가지라는 듯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오빠들을 쳐다봤다.
“근데 반호진은 왜 만나러 오신 겁니까?”
“제가 이유를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요?”
“꼬, 꼭 그럴 필요는 없죠.”
독장미에 난 독가시 같은 말투에 팽추영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움츠렸다.
그 정도로 당서린의 눈빛은 매서웠다.
“나도 궁금해서 그런데, 말해 줄 수 있어?”
“싫어.”
동갑내기이지만 그렇다고 친구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면이 있어, 오고 가며 인사만 하는 사이.
당서린과 팽화영의 관계는 딱 그 정도였다.
그렇기에 당서린은 도도하게 몸을 돌려 반호진의 거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여전하네.”
“사람은 쉽게 안 바뀌니까.”
“근데 목적은 역시 그거겠지?”
인사도 나누지 않고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팽수영이 확신 어린 눈빛으로 당서린 일행을 응시했다.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 당서린이 이 먼 숭산까지 왔는지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지. 언니도 당가주님 눈빛 봤잖아.”
“봤지. 근데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억지로 맺어지는 게 아닌데. 반 공자님이 명문세가 출신이라면 뜻대로 됐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문이 소림사라.”
“방장께서는 아예 관여하지 않으시겠다고 했어. 그런 권한은 없다고. 반 공자님의 부모님이라면 모를까.”
“근데 부모님 쪽을 공략한다고 해도 통할까?”
“쉽지 않을걸?”
팽수영과 마찬가지로 팽화영도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보여 준 반호진의 행보를 보면 부모님이 만나 보라고 해도 본인이 싫다면 거절할 게 분명했다.
“우리도 가자.”
“쓸데없는 대화는 그쯤 하고.”
“뭐가 쓸데없어?”
당서린이 떠나자 다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온 팽추영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팽수영도 만만치 않았다.
오빠들과 티격태격 댄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대화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당서린이 있을 때랑 없을 때랑 태도가 너무 다른 거 아냐?”
“너랑 당 소저랑 같아?”
“참나. 이래서 남자들이란.”
“어쨌든 우리는 소림사로 간다. 반호진한테는 너희들만 가.”
팽추영의 말에 팽수영은 물론이고 팽화영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이렇게 대놓고 팽만철의 지시를 어길 줄은 몰라서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반호진을 찾아가라고 했지 꼭 만나야 한다고 말한 건 아니니까.”
“아빠가 가만히 안 있을걸?”
“보긴 볼 거야. 근데 그게 오늘은 아냐.”
“설마 아빠의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팽수영이 지금 있었던 일을 고대로 보고하겠다는 듯이 허리에 양손을 척하니 올렸다.
그런데 그녀의 협박 아닌 협박에도 팽추영은 피식 웃었다.
“잊었을 리가. 단지 오늘이 아닐 뿐이라고. 때가 되면 찾아갈 거야. 그리고 소림사까지 왔는데 방장께 한 명 정도는 인사를 드려야지. 그게 예의인데.”
“나한테는 빠져나가려는 잔머리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가만히 들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림사까지 왔는데 담현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건 분명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다만 팽수영이 보기에는 그걸 악용하는 것 같았기에 잔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잔머리라니. 소가주로서 방장께 인사를 드리겠다는 건데. 네가 하는 것하고 내가 하는 것하고는 다르지.”
“말주변이 좀 늘었다?”
“이게 큰오빠한테?”
“오빠가 오빠다워야 오빠지.”
“끄응!”
한마디도 지지 않는 팽수영의 대답에 팽추영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소리만 들으면 누구를 패고도 남을 정도라서 그런지 지나가던 향화객들이 힐끔거렸다.
반대로 무인들은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다.
“이번은 넘어가 주겠어. 근데 내일은 아냐. 오늘은 별말 안 하겠지만 내일도 안 찾아가면 아빠한테 말할 거야. 아빠가 나한테 직접 부탁하기도 했고. 알지?”
“……간다니까.”
“우리도 남자다. 약속한 건 지켜.”
끊임없이 이어지는 팽수영의 잔소리에 팽주영이 거들 듯이 말했다.
지금 막지 않으면 한 식경은 더 이어질 것 같아서였다.
“다녀와. 방장께 말실수하지 말고.”
“우리가 애냐?”
“머리하고 몸만 큰 애지.”
“이게 진짜.”
“얼른 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팽추영의 얼굴이 붉어지자 팽화영이 시기적절하게 나섰다.
그러자 팽추영과 팽주영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콧김을 크게 한 번 내뿜고는 몸을 돌렸다.
일부러 바닥을 울리게 걸으면서 말이다.
“애야, 애.”
“또 사고 치면 안 되는데.”
팽화영이 진심으로 걱정했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무관심한 거지만 만약 반호진의 심기에 거슬리면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반호진뿐만 아니라 서조운과 모용척도 무시 못 할 강자이기에 팽화영은 오빠들이 진심으로 걱정됐다.
“네가 나서니까 도망치는 것 봐.”
“막내라서 그런 거지.”
“흥! 막내라서가 아니라 너한테 두들겨 맞을까 봐 그런 거지. 자존심은 둘째 치고 쪽팔리니까.”
멀어지는 오빠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팽수영이 흥흥거렸다.
어째 나이를 헛먹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팽수영의 목소리가 그리 작지 않았음에도 팽추영과 팽주영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가자, 언니.”
“그래. 저 인간들 봐 봤자 가슴만 답답하고 머리만 아프지.”
“지금 가는 곳도 썩 마음이 편할 것 같지는 않지만.”
“괜찮아. 어차피 서린이는 실패할 테니까. 쉬웠으면 우리가 이러고 있겠어?”
금세 오빠들에 대한 걸 잊었는지 팽수영이 활짝 웃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돼. 너만 강해져도 남는 장사니까.”
“겸사겸사 언니 짝도 찾고 말이지?”
“호호호.”
방금 전 살쾡이 같던 모습은 사라지고 몸을 비비 꼬는 팽수영의 모습에 팽화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살짝 드세기는 해도 팽수영 역시 여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감사합니다.”
반호진이 직접 따라주는 차를 모용희수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러고는 반호진을 향해 생긋 웃었다.
“별말씀을.”
“갑자기 찾아오셔서 놀라셨죠?”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척이가 있으니까요.”
“올 때 오더라도 연락은 하고 오지. 만약에 엇갈렸으면 어쩔 뻔했어?”
모용척이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말투와 달리 그의 두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모용세가에서 소림사가 있는 숭산까지 거리가 상당해서였다.
호위대를 대동했다고 하나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혼자 왔나. 호위무사분들이랑 같이 왔는데.”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그럼 집에만 박혀 있어?”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잖아.”
입을 삐죽 내미는 모용희수의 모습에 모용척이 달래듯이 말했다.
그라고 모용희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올 때 오더라도 신중히 고민하고 왔으면 싶어서였다.
아니면 미리 서신이라도 보냈으면 그가 마중을 나갈 수도 있었고.
“아빠가 오빠 한 번 보고 오라고 하셨어. 아무리 아들이라지만 너무 연락이 없는 거 아니냐고. 심지어 춘절에도 편지 하나 안 보냈잖아.”
“흠흠! 그랬었나?”
모두의 시선이 모용척에게 집중됐다.
설마하니 춘절에도 연락하지 않았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모용척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정신없이 수련에 매진했기에 춘절이 왔는지도 몰랐다.
“아빠도 아빠지만 엄마가 엄청 서운해하셔. 아마 본가에 가면 엄마에게 가장 먼저 붙잡힐 거야.”
“헉!”
모용궁은 무섭지 않지만 엄마는 달랐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약해진다는 말이 맞았다.
그렇기에 모용척은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얼른 편지 하나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일 빠른 전서응으로 보내는 게.”
“역시 그렇겠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지만 후회한 순간 움직이지 않으면 더욱더 늦을 뿐이야. 그리고 있을 때 잘해. 우리의 시간이 가는 것처럼 부모님의 시간도 흐르고 있으니까.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고.”
“아.”
이상하게 가슴에 확 와닿다 못해 꽂히는 반호진의 한마디에 모용척이 살짝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말이 가슴에 화인처럼 박혀들어서였다.
“참고로 난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내고 있다.”
“형님께서 은근히 섬세하다는 거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전서구 보내는 걸 봤거든요.”
“그걸 어떻게 봤대?”
“다 형님께 지극한 관심이 있어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흐흐흐!”
“너도 본가에 꾸준히 편지를 보내고 있었구나.”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지 짐작이 가서였다.
“사실 나도 보내고 있어. 아버지께는 아니고, 어머니께.”
“허어. 저만 나쁜 놈이군요.”
모용척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는 배신자를 쳐다보듯 서조운을 바라봤다.
선우방이야 형이지만 서조운은 달라서였다.
하지만 서조운은 당당했다.
“이런 건 알아서 해야죠. 시켜서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요?”
“실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