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장. 나 이런 사람이야. -02
반호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이륭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말로만 들었음에도 백독환의 가치가 상당함을 알 수 있어서였다.
막말로 사천당가주의 허가 없이 외부유출이 안 된다면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제 것은 형님께 양보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 걸 드세요. 저에게는 축융신공이 있으니까요.”
망설이지 않고 돌려주는 정이륭의 말에 서조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 자신만 생각했음을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내가 왜 너희들에게 줬겠어? 나는 필요 없어. 이미 백독불침지체니까.”
“그럼 예비로 가지고 계시는 게.”
“너무 아끼면 똥 되는 법이야. 관리를 잘하면 상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급적 적기에 소비하는 게 좋아.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도 말이지.”
다시 한번 정이륭이 되돌려주려고 했으나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빠르게 발전하는 만큼 언젠가는 백독불침을 넘어 천독불침을 이루겠으나 사람 일이라는 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비명횡사할 수도 있는 게 인생사였기에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럼 저는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 부담 갖지 말고 먹어.”
“네가 아무 생각 없이 주지는 않았겠지. 나도 잘 받을게.”
서조운에 이어 선우방도 백독환을 챙겼다.
그냥 주려 했다면 너무나 부담스러웠겠지만 어찌 보면 정당한 노동의 대가였다.
물론 그런 것치고는 좀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건 차차 갚아 나가면 될 일이었다.
또 언제 백독환을 얻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선우방은 머쓱하게 웃으며 목함을 쥐었다.
“전 처음부터 감사히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이들과 달리 당당하게 목함을 챙기는 모용척의 모습에 반호진은 싱긋 웃었다.
뻔뻔하기보다는 시원시원해서였다.
반호진도 어르고 달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렇게 솔직한 게 편했다.
“지금 먹을까요? 이왕 다 같이 있는 거?”
“그건 나중에. 아직 분배가 끝나지 않아서.”
“네?”
“백독환이 귀한 건 맞지만 또 엄청 대단한 건 아니니까. 물론 내 기준에서야. 그러니 조금 있다 먹어. 일단 이것부터 본 뒤에.”
반호진이 곱게 접어 두었던 종이를 펼쳤다.
그러자 모두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일목요연하게 목록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보는 순간 일행들은 알 수 있었다.
무엇들을 적어 놓은 목록인지 말이다.
“어?”
“이건?”
“암월교의 비밀금고에서 나온 무공비급들이야. 현재 성세를 유지하고 있는 곳들은 제외했어.”
확실한 기준으로 한 차례 걸렀음에도 불구하고 종이에 적혀 있는 목록의 줄은 꽤나 길었다.
글자가 큰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직 반호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선택지는 세 가지야. 돈, 무공비급, 혹은 반반.”
“너, 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가져가도 탈이 안 나는 무공들만 해도 눈이 돌아가는데 거기다 돈까지 나누어 준다고 하자 모용척이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함께 싸웠다지만 그래도 너무 퍼 주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도 암월교에서 털어 온 게 많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과해도 너무 과한 수준이었다.
“웬일이래? 주면 주는 대로 잘 받을 녀석이.”
“저도 염치는 있습니다. 백독환이야 목숨을 걸었으니 충분히 보상으로 받을 만하지만 이건 좀…….”
모용척이 말끝을 흐렸다.
당장 무공서들의 목록만 보더라도 반호진이 옆에 짤막하게 설명을 붙여 놓았다.
절정이면 절정, 일류무공이면 일류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절정 이상의 상승절학도 제법 있었다.
다른 이였다면 눈이 돌아가서 살인이 일어날 정도로 말이다.
“나도 염치가 있어서 그래. 특히 너나 방이는 그냥 개인이 아니라 소가주 신분이잖아. 만약 잘못되었으면 내가 어떻게 선우가주님과 모용가주님을 뵙겠어? 그렇다고 둘에게만 차이를 둘 수도 없고. 그러니 어떡해? 공평해야지.”
꿀꺽!
하나같이 맞는 말에 모용척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슬그머니 선우방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은 동갑이자 친구인 선우방이 나서는 게 여러모로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럴 때만 나를 찾지?”
“그런 게 아닌 거 알잖아요.”
“근데 나도 척이의 생각에 동의해. 이건 너무 과해. 백독환만으로도 충분해.”
“어차피 팔 거야. 너희들이 고르지 않으면. 나도 내 몫으로 몇 개 챙길 거고.”
판다는 말에 네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디에 판다고 말은 하지 않았으나 예상 가는 곳이 있었다.
그렇기에 다들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팔 거라면 자신이 챙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저는 고르겠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서가장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참고로 사본은 남기지 않을 생각이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부님과도 담판을 지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나도 진본인지 아닌지만 확인했을 뿐 따로 암기하지는 않았고.”
“솔직히 형님한테 도움이 될 법한 무공은 없잖아요.”
“맞아.”
서조운의 말에 모용척이 맞장구를 쳤다.
이미 혼자만의 힘으로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고수가 반호진이었다.
소림사의 무공을 넘어 자기만의 무도를 완성해 가는 반호진에게 여기 있는 무공서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확인하는 게 시간낭비일 정도였다.
“확실하게 해서 나쁠 건 없다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방이나 척이도 무공비급은 크게 필요하지 않잖아?”
“있어서 나쁠 건 없죠. 제 가문이 돈이 부족한 가문도 아니고. 솔직히 검공이 많아서 권장지각 계열이나 경신술 쪽에 관심이 가는 게 몇 개 있습니다.”
“흠흠! 나도 무공비급.”
모용척과 선우방은 무공비급을 택했다.
반호진의 말대로 금전적인 어려움이 없기에 둘은 망설이지 않았다.
“저는 돈을 택하겠습니다. 무공은 사문의 무공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요. 지금 익히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게 사실이기도 하고.”
“필요하면 장경각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줄게. 간혹 외부인에게 허가가 되기도 하니까. 대단한 무공들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양성적인 측면에서는 도움이 될 거야. 똑같은 병기를 다루는 무공이라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추구하는 게 완전히 달라지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얼추 정리됐네.”
약간의 설전이 있었으나 이 정도면 충분히 빠르게 정리가 된 셈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형님.”
“왜?”
“근데 형님 몫은 있는 겁니까?”
“왜? 다 퍼 준 거 같아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것 같아서요.”
서조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 몫을 안 챙길 성격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너무 과하게 퍼 주는 것 같아서였다.
“여기 있는 무공비급들만 팔아도 돈이 얼만데. 걱정할 필요 없어. 오히려 여기에 적지 못한 무공비급들을 감안하면 살짝 덜 주는 셈이야.”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이것만으로도 넘치는데요.”
서조운과 정이륭이 손사래를 쳤다.
결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럼 다행이고. 이참에 백독환을 먹을 사람은 먹어. 내가 호법을 서 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백독환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듯이 다들 목함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행동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서였다.
“전부 다 흡수하면 백독불침지체란 말이지.”
“무조건 다 흡수해야지.”
스윽.
네 사람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묘한 경쟁심이 서서히 타올라서였다.
별거 아닌 승부였으나 어떻게 보면 개인의 역량을 보여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넷 다 지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봤다.
“얼른 먹기나 해.”
“옙!”
“잘 부탁해.”
더 이상 기다리기 싫다는 듯이 반호진이 입을 열자 네 명은 냉큼 목함을 열었다.
그러고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백독환을 응시하더니 이내 똑같이 입에 넣고 씹었다.
“우웩!”
“써……!”
부르르르!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지만 백독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차라리 소태를 씹는 게 더 맛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쓰고, 떫은 지독한 맛에 네 명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런데 더 짜증 나는 건 좀처럼 삼켜지지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영약이나 영초들은 보통 혀에 닿으면 물처럼 변해서 식도를 넘어간다는데 백독환은 그렇지 않았다.
“으으으!”
입안에서 녹지 않았기에 그냥 삼켜 버리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침과 섞이면서 부피가 점점 커졌기에 한 번에 삼키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나눠서 삼킬 수밖에 없었는데 그로 인해 괴로운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다.
꿀꺽! 꿀꺽!
하지만 뱉어 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백독환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았기에 이내 가부좌를 틀고서 온전히 흡수하는 데 집중했다.
‘쯧쯧!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다 삼켰음에도 여전히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네 사람의 모습에 반호진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전쟁 시에는 먹을 게 없어 뱀이나 쥐를 잡아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때에 비하면 백독환의 괴랄한 맛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흡수하려나.’
서서히 평온해지는 네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반호진이 생각에 잠겼다.
묘한 경쟁심리 덕분에 다들 기본 이상은 해 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개인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체질과 내공의 성질에 따라 성과가 달라지기에 반호진도 누가 가장 많이 흡수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왕이면 넷 다 제대로 흡수했으면 좋겠네.’
구하기 힘든 물건인 만큼 반호진은 이왕이면 최상의 결과가 나오길 바랐다.
눈부신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기에 가능성도 충분했고.
그래서 반호진은 조용히 네 사람을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숭산의 전경을 보며 당서린이 입김을 내뿜었다.
그러자 뽀얀 입김이 허공을 수놓았다가 사라졌다.
“숭산은 바뀌지가 않네.”
“따로 마중을 나온 사람은 없는 듯합니다.”
“없겠지. 미리 연락을 하고 온 게 아니니까.”
당우혁이 붙여 준 수신호위의 말에 당서린이 피식 웃었다.
너무 과한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사천당가의 위세가 대단하다지만 그래도 소림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적어도 무당파나 남궁세가 정도는 되어야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에 비벼 볼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소림사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만 둬. 엄밀히 따지자면 소림사를 찾아온 건 아니니까. 숭산에 머무는 반 공자님을 찾아온 거지. 정확하게는 일행들이지만.”
“숭산은 여전하구나.”
당서린의 곁으로 중년인이 나란히 섰다.
숙부뻘의 장한으로 당우혁이 하나뿐인 딸의 보호를 위해 직접 붙여 준 인물이었다.
“숙부님은 오랜만이신 모양이네요.”
“십 년은 훌쩍 넘은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진짜 오랜만이시네요.”
“근데 똑같아. 마지막으로 왔을 때도 겨울이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네.”
“큰일은 없을 거예요.”
구천문과 전쟁 중인 사천당가와 달리 소림사는 평화로웠다.
암월교와의 싸움이 있긴 했으나 완벽하게 괴멸시켰기에 위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그녀가 소림사를 찾은 이유가 싸우러 온 게 아니기도 했고.
“어?”
“서린이?”
한겨울인데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향화객들을 보고 있을 때 당서린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런데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당서린이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커다란 눈이 그녀에게 못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