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장. 악수(惡手)의 말로. -03
한쪽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온 금호연이 빠르게 반호진의 몸을 살펴봤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피풍의를 입고 있었으나 그래도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다칠 일이 없었습니다. 대사형도 함께 가고, 팔대호법께서도 힘을 보태 주셔서.”
“저도 그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팔대호법님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 분들이시지 않습니까. 또 어떻게 보면 그만큼 방장께서 반 대협을 아낀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요.”
“대신 일행들이 고생했습니다. 금 공자님께서 보내 주신 인원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하하하. 그 정도 가지고 큰 도움이라니요. 실질적으로 싸운 것도 아닌데요.”
금호연이 옅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도 들은 게 있기에 지금의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반호진이 그의 수하들이 다치지 않게 배려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꼭 싸움에만 손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죠.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반 대협께서 찾아간다고 했을 때 심장이 조마조마했거든요. 반 대협이 고수인 건 알지만 살수들과의 싸움은 또 다르니까요. 숫자가 많다고 해서 유리한 게 아니다 보니. 또 똥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엔 이렇게 여기에 와 있지 않습니까.”
반호진은 설명 대신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러자 금호연도 씨익 웃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빚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갚고 싶은데, 어떻게 갚아야 할지 솔직히 감이 안 잡힙니다.”
금호연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반쯤은 진담이기도 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처럼 반호진은 화를 복으로 만들었다.
그가 몰고 온 암월교라는 위기를 본인의 힘으로 때려잡아서 말이다.
“시간은 많으니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나아지네요. 그보다 지금 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예.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요. 애초에 목적이 이것이기도 하고.”
“으음.”
금호연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누가 봐도 할 말이 있는 모습에 반호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먼저 운을 띄워 주었다.
“하실 말이 있으신 거 같은데, 편히 하시죠. 우리가 어색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저도 잘 알고 있지요. 하하하. 다만 제가 고민한 건 장주님의 전언, 아니.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장주님요?”
반호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 상황에서 금가장주의 부탁이 있다면 한 가지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호진의 반문에 금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반 대협께서 생각하시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장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관여하지 않겠다고요. 모든 행동에는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고 하시면서요.”
“호오.”
반호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고 해도 혈육이었다.
열 손가락 중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자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금가장주는 지금 무림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걸 알면서도 만류하지 않았다.
‘손익계산이 확실해.’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금가장주에 대해서 들은 건 많았다.
이번 생은 물론이고 지난 생을 통틀어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맺고 끊는 게 확실하기에 금가장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잘 이끌어 가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불어 또 다른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암월교가 괴멸한 걸 알고 있군.’
반호진이 본 금호연의 성격상 암월교에 대한 사실을 금가장주에게 말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소장주의 자리를 놓고 후계 다툼을 벌인다고 하나 그래도 형제였다.
금가장주에게는 똑같은 자식일 것이기에 금호연은 자세한 내용들을 말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했다는 건 금가장주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걸 뜻했다.
‘모르는 게 이상하려나.’
개방과 하오문 못지않은 정보력을 갖춘 곳이 금가장이었다.
그리고 금가장주는 그런 금가장의 수장이었고.
반호진 일행이 제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해도 금가장주가 마음먹고 알아내고자 한다면 못 알아낼 것도 없었다.
“조금 냉정하시죠?”
“아닙니다. 수장이라면 당연히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속된 말로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우는 게 맞으니까요.”
“맞습니다. 저도 어릴 적부터 그렇게 교육받기도 했고요. 다만 이번 문제는 선을 넘었죠. 아주 많이. 말이 좀 돌아갔는데, 장주님께서 반 대협을 뵙고 싶어 합니다. 지금 일이 끝나면요.”
“저번에도 말씀하시긴 했었죠.”
“다행히 기억하고 있으셨군요.”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만나고자 했다면 좀 더 빨리 자리가 만들어졌을 것이었다.
다만 꼭 만날 이유가 없기에 만나지 않은 것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찾아뵙지요. 아, 지금 같이 가시겠습니까?”
“반 대협께서 허락하신다면, 함께 가고 싶습니다. 어찌 됐든 형제이니까요. 비록 이복형제이자 경쟁자이지만요. 그러니 저도 마지막 모습을 볼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여기는 금가장인데요.”
“반 대협은 자격이 있습니다. 하하하.”
“그럼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제가 길을 몰라서.”
머쓱할 법도 한데 당당하게 안내를 부탁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금호연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참 반호진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동시에 무서움도 느꼈다.
그가 알기로 반호진은 암월교의 본거지를 찾는 데 하오문이나 개방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소림사의 정보력이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암월교의 본거지를 알아낼 정도도 절대 아니지.’
길을 안내하면서 금호연은 궁금증을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림사의 힘으로 암월교의 본거지를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너무나 궁금했다.
‘미리 알고 있었나? 하지만 소림사가 알고서 가만히 놔두었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이런 추측도 떠올랐으나 금호연은 이내 생각을 흩어 버렸다.
천하의 소림사가 암월교의 위치를 알고도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없어서였다.
꼭 소림사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고.
당장 암월교에게 당한 명문세가나 대문파에만 위치를 알려 줘도 지워 버릴 수 있었다.
‘신기한 분이라니까.’
결국 금호연은 실소를 흘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여전히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을 하며 금호연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전각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초조한 얼굴의 금상룡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자신의 손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도 모른 채 금상룡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극도의 불안감으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었다.
“대체 어디에 있다가 온 거지? 왜 하필 본가로?”
방금 전 수족에게서 반호진 일행이 서문을 통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금상룡은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렸다.
소림사에서 사라진 후 뜬금없이 금가장을 찾아오자 한 가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증거는 없어. 암월교와 연락두절된 상태지만, 상대가 소림사니 숨는 게 당연해.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그놈이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극도로 초조한 얼굴로 금상룡은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곱씹었다.
금호연에게 살수를 보냈을 때부터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 연결 지을 만한 증거나 흔적은 전무했다.
물론 심증은 가질 수 있으나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심리적으로 날 압박하려고, 혹은 떠보려고 온 것일 수도 있어. 아니면 그냥 그 새끼를 보려고 온 걸 수도 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감을 금상룡은 애써 털어 냈다.
자신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막말로 반호진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금가장을 찾아온 것일 수도 있었다.
금호연과는 상당히 친밀한 사이니까.
그래서 금호연이 짐승 대가리를 보고 겁에 질려 반호진을 찾아가지 않았던가.
“차악은 아버지가 부른 것인데.”
금상룡이 심각한 얼굴로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금가장의 일 공자이자 대공자인 만큼 그도 들었다.
부친인 금가장주가 반호진을 한 번 만나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웬만한 명문세가의 가주들도 어떻게든 한 번 만나 보고자 하는 게 금가장주인데 놀랍게도 반호진은 정반대로 자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들었었다.
“미친 새끼. 이번에 확 뒈져 버렸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금상룡은 욕이 저절로 나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바로 반호진이었다.
때문에 금상룡은 너무나 아쉬웠다.
만약 암월교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지금 그가 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은 오지 않았을 터였다.
“멍청한 놈들! 돈을 그만큼이나 처먹고도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
금상룡의 분노는 반호진을 지나 암월교에게 향했다.
선수금으로 지불한 금액이 적지 않았기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까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선수금을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연락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이기에 그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냉정히 말해 지금은 아까워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고.
“후우! 끓는다, 끓어!”
괜히 선수금을 돌려받겠다고 나서다가 암월교와의 연결 고리가 드러날 수도 있었기에 당분간은 쥐 죽은 듯이 있어야 했다.
소림사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말이다.
“대, 대공자님!”
“왜 이제야 오느냐!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알아봤어?”
그때 문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잔뜩 떨리는 음성이었는데 금상룡은 다급해서 그런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윽박지르기만 했다.
“지, 지금 오고 있답니다!”
“뭐? 누가?”
“이 공자와 반호진 소협이요!”
“……여기를 왜?”
금상룡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 정도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금상룡은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멍청한 놈! 그걸 알아봐야 할 것 아니더냐! 얼른 가서……!”
“그럴 필요 없어.”
“응?”
갑자기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금상룡과 하인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러자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금호연과 반호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할 얘기가 있죠?”
인사도 건너뛰고 반호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금상룡에게는 너무나 섬뜩하게 다가왔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기에 금상룡은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언질도 없이 무작정 찾아오다니! 이곳은 소림사가 아니라 금가장입니다!”
금상룡은 일단 큰소리를 쳤다.
누가 뭐래도 여기는 그의 집이었다.
또한 그는 금가장의 대공자였기에 금상룡은 도리어 큰소리를 치며 반호진을 노려봤다.
“무례하다라. 당장의 상황만 보면 그게 맞지만, 전후사정을 전부 따져 보면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건 일 공자인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전 손님으로 여기에 온 게 아닙니다. 죄를 물으려고 온 거지.”
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