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장. 악수(惡手)의 말로. -02
“마마, 말도 안 돼!”
지켜보던 암월교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괴성을 질렀다.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오직 그만의 비밀금고가 바로 저곳이었다.
그런데 반호진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찾아내자 암월교주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세상에는 말이야. 아주 가끔씩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해.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여. 어차피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잖아?”
“어, 어떻게. 어떻게 거기를…….”
“그리고 벌써부터 놀라면 쓰나. 아직 한 곳이 더 남아 있는데.”
꿀꺽!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암월교주의 안색이 확 변했다.
한 곳이 더 남아 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근데 비밀금고를 귀신같이 찾아내는 걸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일단 이곳부터 둘러볼까나.”
“어? 그런 곳이 있었어요?”
반호진이 지하공간으로 몸을 반쯤 들어갔을 때 서조운이 나타났다.
그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발견한 것이었다.
“암월교주의 비밀금고야.”
“오오오!”
딱 들어도 뭔가 있어 보이는 네 글자가 서조운이 눈을 반짝거렸다.
특히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암월교주를 보자 서조운은 더욱 재미있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악인은 악인답게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그래야 악인에게 당한 이들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서조운은 생각했다.
덧없이 죽어 간 불쌍한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퍼억!
사지가 잘린 채로 쇠사슬에 고깃덩이처럼 매달려 있던 아이가 떠오르자 서조운은 자기도 모르게 암월교주를 발로 찼다.
근데 그 위치가 하필 정가운데였다.
남자의 급소이자 가장 안전히 보호받아야 하는 그곳 말이다.
“끄어어억!”
사지는 잃었어도 아직 그곳만은 멀쩡했던 암월교주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서조운이 그곳을 정확히 가격하자 암월교주의 눈알이 뒤집어졌다.
두 개의 고환 중 하나가 터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기에 암월교주는 비명을 질렀다.
“에이. 안 터졌어. 내공은 안 실었다고. 그리고 어차피 앞으로 쓸 일도 없는데 하나 터지면 어때?”
“잔인한 놈.”
“아이들에 당한 거에 비하면 이건 약과죠.”
“그건 인정.”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암월교주가 몸을 바르르 떨었으나 반호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고환이 터졌다면 또 모르겠으나 서조운의 육체제어능력은 반호진과 선우방 다음으로 뛰어났다.
“우와…….”
“비밀금고답네.”
“이게 다 형님 거라는 거죠?”
반호진을 따라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온 서조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한 재화가 쌓여 있음을 볼 수 있어서였다.
은도 귀한데 은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금괴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내 거가 아니라 우리들 거다. 인원수대로 나눠야지.”
“형님이 찾으신 거잖아요.”
“다 같이 고생했잖아. 그러니 나눠야지.”
반호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 여기에 쌓여 있는 재물은 상당하다 못해 엄청났다.
그러나 반호진이 마음먹으면 이보다 더한 것도 모을 수 있었다.
“나중에 형님께서 가문이나 문파를 세우면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지금 당장 할 것도 아니고, 이 정도쯤은 금방 모아.”
“역시 형님!”
자신감 넘치는 반호진의 대답에 서조운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이런 자신감이 그는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없으면 문제지.”
“다른 형들도 좋아하시겠어요. 어떻게 보면 공돈이잖아요.”
“공돈이라기보다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지.”
툭툭.
반호진은 작지 않은 공간을 둘러보며 벽을 두드렸다.
비밀금고의 위치는 알았어도 내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반호진은 꼼꼼하게 벽을 두드리거나 바닥을 다시 한번 발로 차 봤다.
“또 다른 공간이 있을까요?”
“그 정도로 똑똑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열기로 녹여 볼까요? 석벽 정도는 제 극양지기로 녹일 수 있는데. 때리면 무너질 우려가 있지만 녹이면 아주 간단하게 확인 가능해요. 소리도 크게 안 나고요.”
서조운이 언제든지 지시만 내려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예민한 기감에도 다른 공간은 감지되지 않아서였다.
“없는 거 같아. 아직 갈 곳이 한 군데 더 있기도 하고.”
“또 비밀금고예요?”
“뭐라고 해야 하나. 개인적인 공간? 비밀 장소? 아마 계약이나 의뢰에 관한 것들이 보관되어 있을 거야.”
“밖에 있는 건 다 위장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서조운이 눈을 빛냈다.
어떻게 보면 암월교주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그곳 같아서였다.
“위장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들이지. 잃어버리거나 소실되어도 상관없는.”
“이, 이 악마 같은 놈!”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은 반호진을 향해 암월교주가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아까 전의 여유는 완전히 사라진 모습으로 말이다.
하지만 반호진은 저 악 쓰는 모습 저변에 깔려 있는 속마음을 읽었다.
“그렇게 떠들어도 소용없어. 지금 바로 갈 거니까.”
“네가 모아 놓은 건 우리가 요긴하게 잘 쓸게. 세상에 이롭게 말이야. 그래도 막판에는 세상에 도움 되는 일도 하고 가네. 그치?”
“이……! 이……!”
히죽거리는 서조운을 향해 암월교주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문이 막힌 듯한 모습에 서조운은 더욱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이번에는 여기.”
“헉!”
반호진의 걸음이 비밀금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췄다.
완전 가깝다고 볼 수는 없지만 휑한 공터 한가운데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반호진이 멈춰 서자 암월교주가 숨을 들이켰다.
“제대로 짚은 모양인데요?”
“암월교주의 반응은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이곳에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지.”
그그그긍!
비밀금고 때와 마찬가지로 반호진은 단숨에 정사각형의 철판을 찾아냈다.
그러자 암월교주가 오한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떨었다.
처음도 아니건만 암월교주는 여전히 경악한 표정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사람을 부를까요?”
“일단 필요한 것들부터 찾고. 재물이야 금가장의 무사들에게 시켜도 되지만 여긴 좀 민감하거든. 아마 명문세가나 대문파의 무공비급도 있을 거야.”
“하긴. 단순히 죽이기만 하지는 않았겠죠. 무공비급을 가지고 다니는 무인들도 제법 있으니까요.”
“겸사겸사 도둑질도 하고. 은신술과 잠입술은 종이 한 장 차이니까. 죽이느냐, 훔치느냐의 차이랄까.”
이제는 암월교주의 반응도 재미없었기에 반호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계단을 밟았다.
그런데 책들과 기밀문서들을 모아 놓아서 그런지 냄새가 아주 퀴퀴했다.
“어후, 뭔 냄새가.”
“필요할 때만 열었다는 뜻이지.”
“그래도 나름 환기에 신경 쓴 거 같은데요?”
반호진을 따라 들어온 서조운이 손으로 코를 움켜잡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방이 꽉 막혀 있던 비밀금고와 달리 이번에는 곳곳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아무래도 종이에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나름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목숨 줄이니 당연히 신경 써야지. 근데 꽤 많네. 중요한 의뢰들만 모아 놓았을 텐데.”
“근데 계약서는 따로 없지 않아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보통은 구두계약을 한다던데. 의뢰비도 출처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게 현물로 거래하고요.”
“잘 아네?”
“나름 열심히 알아봤어요.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만 노력하지 않는 건 죄니까요. 또 형님하고 연관된 일이라 여기저기 발품 좀 팔았죠. 헤헤!”
반호진이 의외라는 듯이 쳐다보자 서조운이 겸연쩍게 웃었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알아봤지만 살수문파라는 게 애초에 드러나 있지 않는 세력이다 보니 알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많이 알아서 나쁠 건 없지. 의외로 실생활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밀봉도 잘해 놓았네요. 기름으로다가. 확실히 이러면 습기는 차단할 수 있겠네요.”
의외로 꼼꼼하게 보관되어 있는 기밀문서들의 모습에 서조운이 감탄했다.
동시에 호기심이 무럭무럭 샘솟는지 이곳저곳 다 뒤지고 다녔다.
“어디 보자.”
반면에 반호진은 주로 자신과 관련이 있을 법한 문서들을 살폈다.
금가장이나 상관세가가 연관된 것들 말이다.
“가장 최근 것들 중에 있지 않을까요?”
“내 생각도 그래. 찾았다.”
“정말요?!”
찾았다는 말에 서조운이 황급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반호진의 손에 들린 밀봉된 서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윽고 반호진이 느릿하게 밀봉되어 있는 걸 풀고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역시 따로 조사해 두었네.”
“의뢰하러 온 이를 뒤쫓아 갔네요? 하긴 건수가 크다는 건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전표까지 남겨 놓고. 이건 역추적하면 증거가 될 수 있겠는데.”
개인의 수결이나 직인은 없었으나 선금으로 준 금액은 결코 적지 않았다.
더욱이 전표를 발행한 곳이 금가전장이니만큼 이걸 가지고 가면 역추적하는 게 가능할 듯싶었다.
더욱이 날짜와 어디서 발행했는지가 전표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에 반호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혹시 상관세가에 관한 것도 있지 않을까요? 약점 같은 걸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깨너머로 암월교주가 직접 작성한 걸 보던 서조운이 눈을 빛냈다.
잘하면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패를 손에 쥘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순간 들어서였다.
“시간은 많으니까 찾아보자고. 정리가 얼추 끝났을 테니 다른 애들도 데려오고.”
“제가 데려올게요!”
이런 자잘한 일은 자신이 하겠다는 듯이 서조운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암월교주도 힐끔 쳐다봤다.
부르르!
근데 서조운을 보자 아까 전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암월교주가 허벅지를 오므렸다.
본능적으로 급소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나온 김에 한 번 차고 갈까나.”
“으윽!”
서조운의 중얼거림에 암월교주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민하는 게 느껴져서였다.
그리고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웠다.
“뭐, 어차피 넌 끝났으니까. 그러니 잘 지켜보고 있어. 괴멸에 이어 파멸하는 걸 말이지.”
서조운이 떠나갔으나 암월교주의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걸 잃어버린 허망한 표정으로 어둑해진 하늘만 올려다봤다.
하나 남은 바람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암월교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금가장은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문이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있었음에도 인산인해를 이루는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여기는 여전하네.”
“겨울인데도 사람이 엄청 많네요.”
“금가장은 처음이에요.”
“나도.”
두 번째인 선우방, 서조운과 달리 정이륭과 모용척은 눈을 빛냈다.
반호진과 함께 다니면서 금가장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으나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 다 신기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별거 없어요. 좀 큰 것 빼고는? 사천당가보다 사람들이 많기는 해요. 들락날락 거리는 규모는 사천당가와 당가타를 합친 정도일 거예요.”
고작 두 번째인데 서조운이 거들먹거렸다.
예전에 첫 방문했을 때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고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람을 보내셔도 되는데.”
“하하하. 반 대협께서 오셨는데 어찌 아랫사람을 보내겠습니까. 당연히 제가 와야지요. 그보다 어디 다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